여기는 대한민국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스마트탐정사무소. 신용 정보법이 허락하는 합법적인 탐정 회사지. 오늘 이 회사에 신입 사원이 들어왔어. 이름은 고주운. 행정학과를 자퇴하고 법원직 공무원 시험을 3년간 준비했던 24세 여성이야. 유독 눈이 크고 휘둥그레서 별명은 ‘슬픈 개구리’ 현재 헤어스타일은 칼단발에 일자 앞머리, 입고 있는 옷은 흰 셔츠에 아이보리색 재킷과 검정 슬랙스, 들고 있는 가방은 급하게 출근용으로 구입한 5만 원짜리 토트백, 구두는 검은색 로퍼, 입술 색깔은 보라색, 정신 상태는 좌절.
매우 좌절.
사람에게는 느낌이란 게 있잖아. 직감, 예감, 인생 빅데이터, 조상신이 흔드는 레드 라이트. 이 건물에 발을 들일 때부터 고주운에게 그게 왔거든.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 스마트탐정사무소가 위치한 이곳 대륭테크노타운 빌딩에 들어설 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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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숙 선생님.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곽재영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건네자 안경숙이 글자를 확인하기 위해 빨간 안경을 추켜올렸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 가짜 명함엔 GDR 스튜디오 피디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지. GDR은 곽곽디라라의 약자래.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자기 별명이라며, 곽재영이 한사코 일러 줬어.
“저희 스태프 때문에 놀라셨죠? 죄송해요. 인서트 컷 구도를 미리 잡아 보던 중이었거든요. 촬영은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저희 스튜디오는 공중파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건을 정식으로 취재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사건.
고주운으로서는 안경숙이 교통사고 피의자라고만 들었으니까, 자세한 경위는 몰랐어. 어째서 그 단어를 듣고 안경숙의 얼굴이 갑오징어처럼 창백해지는지, 왜 양팔로 가슴을 가리고 물러나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 자세를 취하는지, 무슨 까닭으로 누진 다초점 렌즈 너머로 보이는 늘어진 눈꺼풀이 그토록 요란스레 경련하는지를 말이야. 나중에서야 곽재영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지. 자기가 손녀를 죽인 사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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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숙 약점을 잡아 오랬더니, 이딴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위약금이나 준비해 두라는 엄포를 들으며 쫓겨난 곽재영. 문 앞에 비서가 대기하고 있어. 내부 정책상 보안 게이트를 나갈 때까지 임직원이 반드시 동행해야 했거든. 로비로 나가면서 곽재영이 물었어.
“오늘 행사가 있어서 그런가. 다들 바쁘시네요.”
아까 들어올 때 무슨 미디어 데이를 개최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걸 봤거든. 곽재영과 동행한 비서가 기계적으로 대답했어.
“그러게요.”
“본부장님도 저기 가시는 것 때문에 식사도 못 하신 것 같던데.”
“그러게요.”
자연스럽게 이동선의 오후 스케줄을 확인한 곽재영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어.
“고양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비서의 핸드폰에 달린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키링을 보고 하는 말.
“아, 이건, 받은 거라.”
“그렇구나. 근데 그거 위치 추적기인 건 알고 계세요?”
앞만 보고 걷던 비서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그만의 치트키인 ‘공동 인증서 비밀번호도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발사하며 곽재영이 비서에게 스마트탐정사무소 주소가 적힌 명함을 건넸지.
--- pp.112~113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곽재영이 왜 그렇게까지 고주운에게 솔직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뿐이야. 터놓고 말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은, 10년 전 동료가 칼에 맞아 순직한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선단 공포증이 생겼다고. 그래서 집에 그 흔한 과일칼 하나 없었던 거고, 주야장천 패스트푸드점만 갔던 이유도 조리 과정에서 칼을 볼 일이 없는 장소라 그랬던 거라고. 나영훈이 들고 있던 흉기를 보고 공황 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그건 생물학적인 반응이었을 뿐, 결코 너의 곤경을 외면하려거나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날의 고주운은 모르지. 그냥 저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위험한 상황이 닥치니까 모른 척했다고 받아들여. 완전히 나를 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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