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한 번도 동일한 신을 믿은 적이 없다”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화해 온 신의 의미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에서 신을 찾아온 인류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며 “인간은 언제나 자기 시대에 유용한 신을 창조해 왔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신이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타당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고통과 불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기에 신을 믿었다. 바빌론의 유수에서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까지 유대인은 숱한 박해와 추방, 절멸의 위기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신을 끊임없이 상상해 왔고, 기독교 교부들은 인간 예수를 신이라고 확신하며 새로운 ‘인격신’ 개념을 창조해 발전시켜 왔다. 무슬림은 이슬람 제국의 흥망성쇠와 굴욕적인 식민지 경험 속에서 언제나 자신들에게 힘이 되는 신을 열망해 왔다.
이 책은 시대와 변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형언할 수 없는 신의 실재 그 자체의 역사가 아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의 역사이다. 인간의 신 개념은 역사가 있다. 다양한 시점에서 그 개념을 사용한 각 집단 사람들에게 항상 조금씩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 ‘신’이라는 말에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개념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심지어 상충하기까지 하는 의미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유연성이 없었더라면 신이라는 관념은 결코 인간의 위대한 생각 중 하나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말, 24~25쪽」중에서
늘 그렇듯 새로운 신학이 성공하는 이유는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고 희망을 고취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낯선 땅으로 추방당해 혼란에 빠져버린 유대인들은 야훼 숭배의 단절성을 더는 이질적이고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2장 유일신의 탄생, 128~129쪽」중에서
“인격신은 결코 종교의 이상이 될 수 없다”
인격신을 넘어 초월의 신으로
암스트롱에 따르면 신이 인간처럼 보고 듣고, 창조하고 파괴한다는 ‘인격신’에 관한 믿음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인간을 닮은 신에 관한 상상은 세 종교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이며,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가 인본주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 토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들은 언제나 신이 인간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욕구와 두려움의 투영이 될 것을 경계해 왔다. 그들은 이러한 위험성에 인격신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했기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신’을 추구했다. ‘초월의 신’은 인간이 지닌 편견과 아집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동정심과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인격체인 신 그리고 인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신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신’을 터무니없는 폭군이나 심판자로 만들거나 인간의 기대를 충족하는 존재로 만들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우리는 각자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신’을 토리당원이나 사회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혁명가로 만들 수 있다.
---「5장 이슬람의 신, 302쪽」중에서
인격신은 심각한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인격신이 그저 우리 자신을 형상화한 우상, 곧 인간의 한정된 욕구와 두려움과 욕망의 투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우리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며, 편견을 부정하기보다 용인한다고 추정하곤 한다. 신이 재앙을 막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극을 바라는 것처럼 보일 때, 신은 냉혹하고 잔인하게 보일 수 있다. 재난이 신의 뜻이라는 손쉬운 믿음은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까지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
---「7장 신비주의자의 신, 376쪽」중에서
세상의 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선한 신과 전쟁의 신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관한다면 이 세상에 악은 왜 있는 것일까? 신이 악의 창조자라면 선하다 말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선하고 너그러운 행동을 요구하는 신과 종교적 갈등과 폭력의 단초가 되는 신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암스트롱은 삶에 만연한 고통과 불행의 문제는 언제나 종교의 중요한 주제였다고 강조하며, ‘악’을 이해하려는 뛰어난 사유들에 주목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원죄)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저주를 내렸고, 이로 인해 인간은 늘 악의 수렁 속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기독교 내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마르키온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을 통합하는 길을 포기하고 두 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유대 신비주의자들은 독특하게도 ‘악’의 탄생 신화를 통해 인간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사유하고자 했다.
선한 신이 어떻게 이처럼 명백하게 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창조했을 수 있는가? 또한 마르키온은 정의를 행한다는 열정으로 민족 전체를 살육하는 잔인하고 광포한 신이 등장하는 유대교 경전을 읽으며 경악했다. 이 유대인의 신, 곧 “전쟁을 즐기고, 태도가 일관되지 않고, 자가당착적인” 신이야말로 이 악한 세상을 만든 신이라고 마르키온은 결론지었다.
---「3장 이방인을 위한 빛, 190쪽」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기 저작에도 깊은 슬픔이 가득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에 관한 교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원죄 교리는 이후 서구인의 세계관에서 핵심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저주를 내렸다고 믿었다.
---「4장 기독교의 신, 236쪽」중에서
믿음을 향한 두 갈래의 길
이성의 신과 신비의 신
인간은 어떻게 신을 발견할 수 있는가? 암스트롱은 수천 년 종교의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믿음을 향한 두 갈래의 길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이어진 합리주의 전통으로 이성을 통해 신의 뜻을 해석하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면을 탐구해 신성한 힘을 체험하려는 신비주의적 전통이다. 이븐 시나(아비센나), 마이모니데스, 아퀴나스, 데카르트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 같은 ‘이성’을 통해 신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유대 신비주의 문헌인 《조하르》와 《바히르》,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서는 신에 관한 언어적 표현은 언제나 불완전하다고 여겼으며,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신화를 창조했다. 동방 기독교는 성서에 표현된 분명한 가르침 외에 신의 진리에 관해서는 ‘침묵’을 강조했다.
종교 경전에는 문자 그대로의 뜻 외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 실재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마치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 가운데 한 곡을 구두로 설명하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카파도키아의 교부인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가 말했듯이, 규정하기 어려운 종교적 실재는 오직 전례의 상징적 표현 혹은 (그보다 적절한) 침묵에 의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4장 기독교의 신, 222쪽」중에서
동방 기독교인들은 합리주의를 불신하게 되었는데, 개념과 논리를 초월하는 신에 관한 논의의 도구로 합리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세속 학문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신앙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철학은 인간 정신을 대변하는 한낱 장광설에 불과하며, 오로지 종교적 신비 체험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신에 대해 그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6장 철학자의 신, 362쪽」중에서
실패에서 태어난 기독교의 신승리에서 성장한 이슬람의 신
십자군 전쟁, 13~14세기 레콩키스타,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오랜 앙숙 관계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실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 종교이다. 두 종교는 어쩌다 ‘피로 물든’ 갈등의 역사를 쓰게 되었을까? 신을 향한 믿음과 종교적 활동에 관해 얼마나 다른 태도를 보이는가? 암스트롱은 두 종교가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한다. 기독교는 ‘메시아’로 믿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은 굴욕과 실패에서 탄생했다.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으나 태초부터 타락의 원죄를 지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는 영성을 발전시키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가치는 열등한 것이 되었고 신은 일종에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반면 이슬람교는 이전에는 한 번도 통일된 적 없던 분열된 아랍인들이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빛나는 승리의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알라는 특히 승리를 가져다주는 신이었다. 무슬림에게 세속의 정치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이루는 적극적인 종교 활동이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실패와 굴욕이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처럼, 이슬람교에서는 성공이 그런 역할을 했다. 세속적인 성공을 불신하는 기독교의 경우와 달리, 무슬림 개인의 종교적 삶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무슬림은 자신들이 신의 뜻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무슬림의 영성에서 움마의 정치적 건전성이 차지하는 위상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특정한 신학적 선택지(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감리교, 침례교)의 위상과 거의 같다. 만일 기독교인이 무슬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난해한 신학적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이 유대인이나 무슬림에게 똑같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5장 이슬람의 신, 295쪽」중에서
서구에서 기독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해 고통과 수난의 의미를 밝혀주는 종교였으나, 이슬람은 성공 지향적 종교였다. 쿠란은 정의, 평등, 부의 공정한 분배 같은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자들은 실패할 수 없다고 가르쳤고, 이슬람의 역사는 이 가르침을 실제로 입증하는 것 같았다. 예수와 달리 무함마드는 패배자가 아니라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은 7세기와 8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경이로운 발전을 이루며 더 강화되었다. 이 성공은 자연스럽게 신에 대한 무슬림의 믿음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10장 신의 죽음, 627쪽」중에서
우리 시대에 신은 여전히 가치가 있을까?
새로운 신의 창조를 위하여
한 세기도 전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운 문제로 남아 있다. 19세기 이후 시대 사조로 받아들여지며 유행하고 있는 무신론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결코 신을 떨쳐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만 같다. 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 것일까? 과학주의와 인본주의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이 시대에도 삶을 고양시키고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가치로 역할할 수 있을까? 시대에 걸맞은 신의 창조를 위해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인격신 개념은 도덕적, 지적, 과학적, 영적인 모든 이유에서 오늘날 점점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서구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최고 존재로서 형이상학적 신 개념 또한 만족스럽지 않다. 철학자들의 신은 진부한 합리주의의 산물에 불과하며, 전통적 신 존재 증명은 더는 설득력이 없다. 계몽주의 시대 이신론자들이 철학자들의 신을 널리 받아들인 것이 현재의 무신론으로 이어진 첫걸음이 되었다. 옛 천신처럼 인간과 사회에서 너무 멀어져 쉽게 ‘하는 일 없는 신’이 되어 이제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지고 있다.
---「11장 신의 미래, 673~674쪽」중에서
오늘날의 신 개념이 더 유효하지 않다면 그것은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 인간은 삶의 경이와 표현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 위해 항상 자신을 위한 믿음을 창조해 왔다. 오늘날 사회에 팽배한 목적 상실, 소외, 문화적 혼돈과 폭력은 현대인들이 이 시대에 걸맞은 신 개념을 창조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11장 신의 미래, 676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