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가슴-마음이라는 것이 제 자리를 잡고, 그러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다른 존재와 합쳐지기 위한 열림이다. (대상이 다른 사람이든 신이든, 사랑은 결국 다 같은 사랑이다.) 사랑은 만물과 하나가 되기 위한 문, 온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있기 위한 ‘열린 문’이다. 이러한 ‘하나임’에로의 귀환, 그저 ‘있음’의 단순성, 무조건적인 사랑의 단순성에로의 귀환은,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가 된 상태가 진정한 요가, 즉 합일이다.
그 모든 편집증이 나에게서 씻겨 나갔고,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나는 환상적인 사랑과 평화의 느낌과 함께 남겨졌다. 나는 마하라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살아있는 현존 속에 있었다. 나는 그렇게 완전하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마하라지의 발을 만지고 싶었다. 간절히.
마음을 길들이는 과정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마음의 스위치를 끄라. 당신 안에는 생각의 헤아림을 초월한, 당신이 이미 알고 있고 신뢰하고 있는 장소가 있다. 예수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선불교 禪佛敎에서 ‘초심자의 마음’이라고 불리는 어린이 마음은, 순수한 존재의 청정무구함, 무조건적인 사랑의 순수함을 가리킨다.
그 순수한 존재 상태에서 살려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죽어야 한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다. 애벌레는 ‘날아다니는 애벌레’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비로 변신한다.
내가 사랑인 자리에서 살면, 어디서 누구를 보든 나는 사랑을 보게 된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안에서 사랑을 본다고 상상해 보라.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 여기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괜찮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 그들이 열려 있는 만큼, 그들 역시 사랑으로서 존재하는 자리(사랑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들이 사랑 자체인 자리)와 조화로운 공명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갑자기 여기에서, 사랑의 바다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 같은 광대한 사랑의 품에 안겨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소유욕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긁어 모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의 삶에 대해 중립적인 관찰자가 되기 위해 목격자 의식을 배양하는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목격의 장소는 단순한 인식, 즉 모든 것을 인식하는 당신의 일부이다.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보고, 판단하지 않고, 단지 지금 여기에 있으라.
때가 무르익으면, 당신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투사하는 대로만 본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유희는 영의 투사이다. 그러한 투사가 당신의 카르마이고, 이번 생에 당신에게 주어진 커리큘럼이다.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카르마에 의해 당신이 끌어안고 있는 것들과 당신의 집착을 불태우기 위해 고안된 가르침이다. 당신의 인간성과 욕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정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당신이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있고 싶다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하나로 합해지듯이, 우주와 하나임을 느끼고 싶은 열망이다. 그곳은 그 순간에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는 자리이고, 완전한 성취감을 느끼고 사랑 안에 안겨 있게 되는 곳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당신이 그 순간에 있을 때, 시간은 느려진다. 이 순간 안에서, 당신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한 순간도 낭비하지 말라. 진정한 당신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리스도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면서 모든 순간을 새롭게 맞이하라는 뜻이다. 당신이 진실로 이 순간에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존재하는 전부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은 또 다른 순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크고 밝은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훨씬 더 심오한 우리 자신의 본질을 사느냐, 그렇게 살지 않느냐는,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지만, 본질과 멀어진 삶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 “나는 이 몸이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래, 내 몸은 이것을 할 수 있었어. 내 머리는 예전에는 이렇게 백발이 아니었어. 나는 훨씬 더 강했어. 나는 더 날씬했어. 나는….” 몸이 바로 나라는 생각 때문에 몸의 변화는 괴로움을 일으킨다.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병과 나이 듦,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피할 길이 없다. 마하라지는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지킬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부처님 말씀이 옳다. 이 몸은 시간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을 뿐이다.
우리의 여정은 단순함을 향한, 고요함을 향한, 시간 안에 있지 않은 어떤 기쁨을 향한 여정이다. 시간으로부터 ‘지금 여기’로의 이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모델을 뒤에 남겨둔다. 이 여정은,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이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도록 우리들 존재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과의 일차적 동일시에서 우리의 영혼과의 동일시로, 그런 다음 신과의 동일시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동일시를 넘어서서 나아가는 여정이다.
인생이란 우리들 존재의 가장 깊은 진실을 깨우는 길이며, 풍부하고 열정적으로 살게 하는 놀라운 커리큘럼이다. 한 영혼으로서, 내게는 단 하나의 동기가 있을 뿐이다. 신과 하나가 되는 것. 한 영혼으로서, 나는 매 순간 속에서, 풍요롭고 소중한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늘 부족함 없이 충만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