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인접성에서 계속성으로 이행하기 위한 일관된 해법으로서 특정 시간에도 다음의 다른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순간, 즉 ‘시간 바깥’이라는 순간을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 가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두 시간, 즉 이전과 나중을 연결하려면 시간 바깥의 ‘갑자기’를 만들어 내는 것 말고는 다른 근거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는 그 자체로는 가능한 ‘장소’가 실제로 없는 ‘비-장소’로서 지극히 ‘괴이한’ 것이며 변화의 연속성에 난폭하게 구멍을 내는 것이다.
--- p.29
어떻게 우리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한 단락에서 다른 단락으로, 한 장章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가? 선행하는 것과 단절하고,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사유를 이 단절을 통해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텍스트 내에 남겨진 여백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가 그 안에 쓰지 않지만 텍스트가 계속해서 나아가는 생산 장소이다. […] 우리가 배를 타고 있고 노를 잠깐 들어 올릴 때 이것은 이행과정의 기술이다. 우리는 더 이상 노를 젓지 않고, 노를 젓는─글 쓰는─움직임은 멈췄지만, 배는 물결에 실려 이미 진입한 쪽으로 나아간다.
--- p.34
유럽 사유와 반대로 중국 사유는 언어에 의해 열린 다른 길을 따름으로써 이행과정의 비-분리,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고요한 변화를, 실존의 모든 과정에 접근할 관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삶과 세계는 끊임없는 이행과정에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철학에서 내세우는 ‘유동성’과는 다른 것이다.
--- p.38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이 어느 불거진 데에서 나타나지는 않을지라도, 지각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변했고 이는 태양이 구름 뒤로 지는 방식에서까지 그렇다. 우리의 여정에서 커다란 전복이 일어났지만 그 전복을 나타내는 균열 없이 그렇게 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스며듦 또는 분위기, 환경은 속성의 용어로 획정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에 의한 포획을 거스른다.
--- p.57
늙음만으로도 그리스 사유가 비틀거리는 모든 지점이 집약된다. 우선 늙음은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에 덧붙여 내게 닥칠 일이 아니라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과 분리 불가능하다. 늙음은 여러 속성들 가운데 가능한 하나의 속성이 아니고 그 속성들과 떼어 놓을 수 있는 속성도 아니다. 따라서 늙음은 술어의 양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늙음은 주지하다시피 분리 가능한 특징들이나 특질들로 분해되지 않고, 서로 묶여 있으며 이들의 총체가 노화를 이룬다(눈동자, 안색, 피부, 눈빛 등).
--- pp.61~62
실효성 있는 반전은 감지 불가능하게 준비되고 고요하게 가동될 뿐이며, 동시에 이 반전은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 도중 이미 새로운 형국에 진입해 있고 새로운 배태에 흡수되어 있다. […]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않은 채 스스로 퇴색된다. 군주나 영웅의 위상을 이었던 부르주아의 위상은, 예고되었던 위대한 순간에 의해 전복되지 않았지만 우리 눈앞에서 잘게 부스러져 와해된다. 더 정확히는 이번에는 추락의 예고도 없이 햇살 아래 눈처럼 나날이 녹아 버린다.
--- p.74
번영은 쇠퇴를 불러일으키며, 나아가 이미 쇠퇴를 포함하고 쇠퇴로 전환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전은 눈에 띄지 않은 채, 한 국면에서 그 대립 국면으로 아주 꾸준히 진행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단절이 없으며 ‘고요한’ 변화인 것이다.
--- p.95
사건들이 실행하는 사건화는 사건들이 관심을 끌어내는 데 기여하고 이로부터 사람들이 듣고 영향을 받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마이다스의 손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이 되는 것처럼,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고유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 p.133
사건은 돌출하듯 나타나지만 이처럼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 흡수된다. 상류에서는 은미한 숙성으로부터 사건의 앞선 형국이 생겨난다. 하류에서는 이루어진 변화의 완만한 동화에 기인한 동요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