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례家庭儀禮
기본적 정의
가정의례는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과 관련되고 가족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일련의 의례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가정의례는 사회나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고 변화된다. 〈건전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가정의례법)〉에 따르면 가정의례는 ‘가정의 의례로서 행하는 성년례(成年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회갑연(回甲宴)’ 등을 말한다. 가정의례는 ‘통과의례(通過儀禮)’, ‘일생의례(一生儀禮)’, ‘가례(家禮)’ 등의 용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개념의 기원과 발전
의례는 일정한 법에 따르는 예식이나 종교적인 의식을 가리킨다. 일상생활에서 시간과 공간은 의례라는 행동 양식을 통해서 일상과는 다른 신성한 시간과 공간으로 변모된다. 의례에 참여하는 인간은 의식에서 규정하는 의상이나 장식물 등을 착용하고 그에 맞는 행위를 한다. 이러한 의례를 수행함으로써 의례 행위자는 새로운 지위나 상태를 획득하게 된다. 또 행위자와 참여자가 속한 커뮤니티의 통합에 기여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정의례’는 가족 구성원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과 연결되기 때문에 ‘통과의례(通過儀禮)’와 관련된다. 통과의례는 인류학자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이 제시한 개념이다. 통과의례는 일상생활의 구성요소인 인간, 시간,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구성요소들을 포함하는 우주에 대한 종교적 이념이나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는 생활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면 생일 · 새해 등 역년(歷年)의 계절과 관련하여 삶의 중요한 사건을 확인할 때 갖는 의식이나 개인의 출생 · 성년 · 혼인 · 사망 같은 삶의 계기들을 통과할 때에 갖는 의식 등을 통과의례라고 한다. 통과의례의 과정 내지 단계에 대해서 반 게넵은 분리의례(separation rite), 변환의례(transition rite), 통합의례(incirporation rite)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주기성을 띠기도 하며 또는 탄생이나 성년식과 같이 임시성을 띠기도 한다. 통과의례는 새로운 지위로 옮겨 갈 때에 겪게 되는 생활의 혼란이나 갈등을 완화시켜 새로운 지위 집단에 통합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좁은 의미의 통과의례’를 ‘일생의례’라고 할 수 있다. 통과의례가 전 우주와 모든 생활관 속에서의 넓은 개념이라면 일생의례는 개인이 한평생 살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의 의례를 치르고 그 위기를 넘길 때마다 그 사회의 전통에 따라 새로운 역할에 따른 대우를 받는 협의의 통과의례이다. ‘일생의례’는 ‘평생의례’라고도 한다. 일생의례는 각 의례의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분리, 전이, 결합의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 개인이 이전에 가졌던 지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위 앞에서 가로막힌 장애를 제거하고 새롭게 얻은 지위를 일상생활 속에서 인정받는 과정이 의례를 통해 진행된다. 이러한 일생의례는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개인이 겪는 고비는 개인적인 사건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은 한 사회생활 단위의 구성원으로서 가족, 친족, 커뮤니티 등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결정적 계기들은 곧 그 커뮤니티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고 커뮤니티의 성원이라면 그 커뮤니티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동일한 형태의 일생의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소의 사회적 단위인 가정에서 한 개인은 생애 중요한 분기 지점에서 그 의미를 부가하는 의례를 하였다. 대체로 일생의례는 출산의례, 성년의례, 혼례, 수연례, 상례 등을 가리킨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가례(家禮)’를 실천해 왔다. 가례는 12세기 중국에서 주희에 의해서 관혼상제로 집약하여 정리되었으며 조선 건국 이후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유교이념에 기반한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의 수행방식을 명시하였다. 관혼상제라고 하는 사례(四禮)가 비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의례라면, 『가례』 가장 첫머리에 놓인 통례(通禮)는 가정 내에서 매일 실천하는 의례였다.
이상의 ‘협의의 통과의례’인 ‘일생의례’와 ‘가례’는 의례의 목적과 형태에 있어서 의례의 영역에 다소 차이가 있다. ‘가례’는 ‘관혼상제례’ 등 사례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면, ‘협의의 통과의례’인 ‘일생의례’는 ‘관혼상례’라고 하는 삼례는 포함하되 제례는 조상숭배가 목적이므로 제외하고 ‘출생의례’나 ‘회갑연’ 등을 포함하고 있다.
‘가정의례’라는 명칭은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서 명시되었지만, 가정에서 행해지는 의례는 우리 역사상에서 생활화, 관습화 되어 쭉 지속되어 왔다. 고대에는 별도의 가례서는 없었지만 무교(巫敎)라 불리는 토착 신앙의 기반 위에서 동옥저, 고구려, 신라 등 각 나라의 상례, 제례, 혼례에 대한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남아있어서 가정의례가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 속에서 가정의례가 행해졌다. 다만 고려 시대에는 장례와 제례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이 국가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렇지만 고려 말경까지도 일부 상층에만 유교식 장례와 제례가 한정적으로 거행되었을 뿐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채택된 유교적인 가정의례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 국가 주도로 추진되었다. 세종 때에 편찬하기 시작한 『오례의(五禮儀)』와 세조 때에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사(士)와 서인(庶人)의 가정의례로서 관혼상제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었다. 뿐만아니라 고려 말 전래된 주희의 『가례』를 기본 모형으로 하여 조선 사회 가정의례의 유교적 개혁이 추진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추진한 상례 및 제례뿐만 아니라 관례와 혼례의 유교적 개혁이 추진된 것이었다.
조선은 유교적인 가정의례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제도를 마련하고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벌을 가하는 등 유교적 실천을 법으로 강제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상례의 경우 오랫동안 장사를 거행하지 않거나, 부모와 남편의 상을 숨기고서 상례를 행하지 않거나, 상가에서 남녀가 어울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거나, 부모와 남편의 복상 중에 혼인을 하거나 또 상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경우에는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교적인 가정의례 제도가 일반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노력이 뒷받침 되었다. 조선시대의 가정의례에 관한 학자들의 저술은 중종 때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를 효시로 하며, 이황(李滉)의 『퇴계상례문답(退溪喪禮問答)』, 이이(李珥)의 『제의초(祭儀抄)』 ·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으로 이어진다. 16세기 이러한 저술이 편찬되면서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인 가정의례가 정착될 수 있었다. 16세기 전반기까지 상례와 제례를 중심으로 정리된 가정의례는 16세기 말 17세기 초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이항복(李恒福)의 『사례훈몽(四禮訓蒙)』,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 조호익(曺好益)의 『가례고증(家禮考證)』 등에 관례 및 혼례에 대한 내용이 함께 정리되기 시작하여 관혼상제례로 정리될 수 있었다. 이 때에 『가례언해(家禮諺解)』가 편찬되어 민간에 더 널리 보급되었다. 숙종 대부터 정조 대 사이에는 가정의례의 절차뿐만 아니라 여러학자들의 설과 고사를 바탕으로 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다. 박세채(朴世采)의 『육례의집(六禮疑輯)』, 박성원(朴聖源)의 『예의유집(禮疑類輯)』,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 김종후(金鍾厚)의 『가례집고(家禮集考)』 등이 대표적이다. 또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회갑례와 회혼례 의식 절차들이 정리되었는데, 우덕린(禹德麟)의 『이례연집(二禮演輯)』이 그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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