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맨 앞, 처음 등의 개념을 빌려 책을 낸다. 이 책은 그러므로 처음 시작하는 작업의 의미를 살피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 말이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와 연결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기존의 그 개념들에만 묶여 있지 않기를 소망한다. 모든 처음은 언제나 백지의 평면에서 가능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과거의 입김과 대결하면서 시작된다. 출발선이 놓인 백지는 그러므로 이전의 입김들을 잠재적인 것으로 물리면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힘과 운동이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 자리이다. 그리고 모든 잠재적인 것은 그 자리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지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절망이 지식인들을 좌절시킨 때가 얼마 전이지만, 그 절망 또한 현실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단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버린다’는 혁명가의 말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움을 믿지 않는 태도는 언제나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확신과 서로 이어지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새로움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상대편을 믿지 못하는 태도이다. 여기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 다른 공동체, 다른 민족, 다른 생명, 비생명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낯선 관계를 위한 활력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새로움을 믿지 않는 태도는 그것이 실은 얼마나 새로움에 대해 무지한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이미 있는 자기 자신, 나아가 이미 부패해버린 공동체를 그 공동체의 오래 지나 효력 없어진 말들에 구속되어 변해버린 세계를 파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태도이다. 여기에는 오직 철 지난, 스스로도 지킬 능력이 없는 그 말들의 무게에 기대어 자기 자신이 과거 자신의 적이었던 존재들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새로움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태에 묶여 있지 않아야 한다. 새로움이 오직 새로움 자체에 대한 맹목적 탐구인 것은 아니다. ‘맨 앞’으로 만드는 책은 백지에서 시작하되 백지의 평면 아래 잠재된 과거의 입김을 불러내어 대화하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모든 새로움이 거쳐 가야 할 필연적인 운명인데, 이 운명이 대화할 과거란 지난 시간의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묻혀 있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저 과거는 새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뇌리를 압박하면서 지금 이곳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과의 대화는 새로움과 마주할 가능성을 은폐하고 있었던 이면을 드러내어 지금 이곳이 가진 진짜 모습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대화하는 대상은 이미 과거부터 억압되고 왜곡되어 지금 이곳에서 입김의 흔적조차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에 형태와 온기를 부여하고 영토를 찾아내어 제자리를 부여함으로써만 우리의 과거는 온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그것에 현실의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이 현실의 이면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위상의 정확한 점과 선과 면을 다시 배치할 수 있다. 우리의 과거는 모두 소환되어 현실의 좌표 위에 정확한 위상으로 다시 배열되어야 한다.
현실의 모든 사건과 사물들의 배열을 평면의 글로써 살펴보는 일은 세계를 이루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종이 위에 건축해가는 일과 닮아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몇 편의 건축 사유를 선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의 글쓰기의 평면 작업이 비가시적인 공간까지 포함하여 평면에서 입체 면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모를 드러내는 4차원의 작업까지 상상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지금의 시도는 미약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건들의 공간을 포착하고 논의하기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뜻깊다. (후략)
--- 「서문」 중에서
김정환의 시는 신학철 화백의 현대사 주제 작품들을 토대로 만든 장시이다. 김정환이 최근에 보여준 일련의 미학적 프로그램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어려워졌다는 말은 그의 언어 사용 방식이 완전히 낯설어졌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의 시 세계가 보여준 전체적 지형을 보면 이 낯섦은 민감한 독자들에게는 예상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언제나 자신의 언어를 ‘뭉개면서’ 다른 언어와 장르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언어는 음악과 그림이라는 장르와 결합 중이다.
--- 「맥락과비평 편집위원 - ‘맨 앞’으로 하는 말」 중에서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구상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김정환과 신학철의 경계 허물기가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그런 방식으로 시를 쓰는 내적 이유를 포착해야 한다. 시인이 신학철의 그림에 대해 말하다가 자신의 시에 대해 말하는 경계 넘기의 순간은 신학철이 즐겨 사용했던 몽타쥬의 형식에 비견될 수 있는데, 이는 내용상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형식상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작업으로 비쳐진다.
--- 「박수연 - 「눈 먼 화가」를 위한 주석」 중에서
해방 이후 대전문단 또한 이러한 문학적 대립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전문학사’에서 해방기 대전문학은 순수문학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이 시기 진보 문예지와 신문 자료 등이 발굴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 ‘순수문학’의 전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진보 문학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거나 배제한 면도 없지 않다.
--- 「김현정, 남기택, 한상철 - 대전문학의 세 경계선」 중에서
그런 점에서 보면 1990년대 역시 사회적 ‘유동성’이 더없이 커진 시대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문학은 소비자본주의에 기반한 ‘일상성’을 문학적 테마로 한 다채로운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전시대의 문학과 같은 역동적인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거꾸로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공고화 과정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연관을 단절시켰고, 작가들 역시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의욕을 상실했다.
--- 「이명원 - 전환의 비평과 욕망의 교육」 중에서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들어서는 철도역사는 기존의 읍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신시가지를 만들면서 도시를 구읍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와 철도역사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의 2중적 구성으로 양분한다. 즉, 기존의 읍성 중심의 구시가지는 전통적인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성을 형성하게 되었고, 읍성 바깥에 형성된 철도역사는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시가지를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대전의 경우는 기존의 읍성이 없었기 때문에 대전역사와 충남도청이 중앙로를 중심으로 계획된 도시 구성을 이루면서 근대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김종헌 - 대전 근대역사의 출입구, 옛 104 충남도청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며」 중에서
아방가르드 건축은 기존의 건축이 아닌, 새로운 건축이라는 의미와 함께 1920년부터 시작된 전위적 건축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건축의 전위성을 강조한 사조는 구성주의, 신조형주의, 미래파, 해체주의, 표현주의 등이다. 혁명적 아방가르드 건축의 태동을 상징하는 건축가는 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다. 코르뷔지에는 1915년 도미노(Dom- Ino)로 불리는 표준 주거 건축을 제시했다. 코르뷔지에의 건축 사상은, 건축을 인간이 생활하는 기계(machine)로 간주한 근대적 기계주의 건축이다. 획일적 표준건축이 혁명적 아방가르드인 것은 바로 이점, 근대의 기계적 인간을 건축에 접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 「김승환 - 건축 거장 3인의 아방가르드 건축」 중에서
이상이 말하는 민족을 민족주의자의 그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을 미워하고 민족을 그리워하라고 말하는데, 그 민족은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게 하는 민족이다. 요컨대 민족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러므로 현재의 배타적 민족이라기보다는 미래의 공동체라고 할만한 집단이다. 이 민족의 위치는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지금도 그 형상은 ‘잔여’나 ‘무위’라는 개념으로만 어렴풋이 논의될 수 있을 뿐이고 이상이 절망했던 파시즘의 당대에는 그마저도 얘기되고 있지 않았다.
--- 「박수연 - 이상, 야스쿠니, 권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