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언어학으로서의 한국어 문법 기술이 시작된 것을 어느 시점으로 잡아야 할까? 서구의 인구어 문법 틀을 한국어에 적용시킨 것을 근대 문법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이전 한국어 문법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들의 생각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런 선조들의 생각이나 언어관을 보여주는 글들이 있다면,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한국어 관련 문헌들을 보면, 문법을 바라보는 관이 반영되어 있는 글들이 거의 없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외국어 학습에 관련된 문헌도 별로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옛날에 활동한 역관들의 기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 해당 외국어를 습득하고 교육했는가 하는 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 등 현지에 가서 해당 외국어를 직접 배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선조들의 문법관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는 자료가 기껏해야 학습에 참고했던 어휘집 정도가 대부분이란다. ‘무슨무슨 노걸대’라고 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몇몇의 ‘어휘 단어장’이나 ‘영어노걸대’를 던져 주고, 그 외국어를 익히라고 했을 때,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다면, 정말 그 당시에 언어를 특히 외국어 습득이나 학습에 관해서 우리 선조들이 아무런 생각이나 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당시에도 뭔가 학습 기제나 그에 대한 생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든 재구해 내야, 우리 선조들이 언어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이나 외국어 학습 방법에 대해 알고 있던 어떤 효율적인 기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급한 결론이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걸 재구해 낼 수만 있다면, 현 우리의 사고 체계, 인식 체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한 사고나 인식의 단절 때문에, 우리는 지금 너무나 편협한 서구 중심의 언어관을 가지고 언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반성해 볼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흔히들 서구와 동양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야기들 한다. 그 중에서 필자는 동서양의 언어학적 인식의 차이를 음과 양의 두 축으로 풀어 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언어학사는 거의 다가 서구인 또는 서구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언어유형론에서 현대 문법이론에 이르기까지 발상과 비교의 중심에는 항상 편향되게 서구의 것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형적인 위치의 문제를 떠나서, 언어학사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파니니문법’이 아니던가?
인도 지역을 보더라도, 산스크리트어만 쓰이던 게 아니라 드라비다어, 팔리어 등이 많았는데, 왜 그러한 언어에 대한 문법서나 문법관은 쏙 빠지고 ‘파니니문법’이 언어학사의 젖줄 역할을 해 왔을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문제제기가 정말 불가능할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형국에 처해 있음이 더 안타까운 것은 아닐까? 근본적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고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을 해 낼 수 없다는 상식적인 공리를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일례로, 한국어는 교착어이고, 영어는 굴절어라고 규정하고 시작하는 논의도 또한,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언어유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한국어가 교착어이고, 영어가 굴절어인지를 따져 본 논의가 얼마나 있었던가? 한국어를 교착어라고 하면서도, ‘명사 곡용어미’, ‘동사 활용어미’ 등의 용어를 써 가면서, 한국어 문법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세세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기서 임홍빈 선생의 철저한 극단주의가 생각난다. 한국어는 교착어이므로 모든 문법형태는 교착소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그러나 이것도 일방적으로 한국어만을 중심으로 삼은 결과는 아닐까 한다. 평등한 비교론적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언어학 전쟁에서도 지피지기(知彼知己)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국내외의 언어학사의 전통에서 볼 때, 서구 언어학은 언어를 어휘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 듯하다. 현대 구조언어학의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는 후기구조주의 문법의 대표격인 기욤(Guillaume)의 정신역학론(psychomecanique)에서조차도 언어의 중심에는 여전히 명사니 동사니 하는 어휘들이 놓여져 있고, 그 중심적인 어휘가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개별적인 어휘에 따라 밝히고 그들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 언어활동을 잠재(=무의식) 단계와 현실(=의식) 단계의 전이과정으로 파악하는 서구의 오랜 전통에서 문제의 핵심은 바로 주어진 잠재적 어휘가 어떻게 실현된 어휘로 옮겨가는가에 있었다. ‘현동화(actualisation)’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발리(Bally), 기욤 등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문제에만 집착하다 보면, 문법이란 것은 바로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것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하여 항상 어휘가 자립, 자율, 중심이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문법은 종속, 억압, 변방이라는 덤터기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사유체계를 혼미하게 만들고 있는 ‘자율 형태소’, ‘구속 형태소’ 등의 구분이 바로 이러한 구조에 맥락이 닿아 있다. 이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언어학, 비교언어학의 발달 과정을 보더라도 이러한 인식구조가 반영이 되어 있다.
한 언어의 계통을 확립하고자 할 때, 다른 언어와의 비교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부분, 친족어휘, 수사, 기본어휘 등의 어휘요소들이었다. 문법요소들 간의 비교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시 문법요소가 언어의 노리개(accessoire) 정도로 취급되던 분위기에서 문법요소의 비교를 통해 언어의 친소관계나 계통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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