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에서 아랍 이슬람 고전 문명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8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중엽에 르는 시기에, 아랍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 문화에 주요한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아랍어로 철학과 신학에 관한 문헌을 저술했다. 그들은 그리스어·시리아어·콥트어로 기록된 자신들의 여러 교회적 전승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아울러 학자와 과학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며, 이들은 당대의 아랍 세계에서 부러움을 살 만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본서는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 이처럼 흥미롭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아랍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개괄적인 이야기를 풍부한 서지 정보를 담은 각주와 함께 제공하고자 한다.
--- “서론” 중에서
비록 꾸란이 그리스도인을 직접 거론하고 또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실제로 언급하는 적은 없다. 대체로 꾸란에서 그리스도인은 본문 가운데 “성서의 백 성”,“경전의 백성”,“성서의 사람들”이라 불리는 이들 가운데 포함된다. 이 일반적인 명칭은 54회 정도 나오며, 여기에 그리스도인 외에도 유대인과 이따금씩 조로아스터교도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을 특별히 지칭하는 “복음의 백성”이란 말은 한 번 등장한다(5:47).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꾸란에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기 위해 14회 정도 사용하는 안-나싸라라는 아랍어다. 현대의 모든 학자는 이 용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용어의 어원과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적잖은 논란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 말이 [...] 보통 예수의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형용사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 제1장 “‘복음서의 백성’, ‘성서의 백성’” 중에서
놀랄 만한 첫 군사정벌에 뒤이어,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들이 하나씩 신속하게 아랍인 침략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우선 다마스코스(635)와 예루살렘(637)에 이어서 안티오케이아(637)가 함락되었고, 그다음으로 시리아의 에뎃사(Edessa, 640)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642)에 이어서 티그리스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수도인 셀레우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 645)이 정복되었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단 십수 년 만에, 그리스도교의 총대주교구 다섯 곳 중의 세 곳과, 페르시아에 있던 “아시리아 동방 교회”(the Church of the East) 교종(catholicos)의 감독좌가 아랍인 예언자를 신봉하는 열성적 추종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 제2장 “묵시록과 아랍족” 중에서
이슬람에 의해 정복된 토에서 그 지배하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랍어로 글을 작성한 것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증거는 8세기의 마지막 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가 되면 이른바 아랍화(Arabicization) 곧 칼리파국에서 아랍어가 공용어로 확산됨에 따라 이슬람 세계 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아랍어를 일상 언어로서만이 아니라 교회 영역에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랍어를 교회의 언어로 채택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장차 “황제파”로 불리게 될 공동체에서 맨처음 시작되었는데, 이 공동체는 그 본래의 교부적·전례적 전통에 따라 언제나 그리스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나중에까지도 그러한 성격을 유지할 것이었다.
--- 제3장 “아랍어 그리스도교 신학” 중에서
테오도로스 바르 코니의 저작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세 문헌은 그리스도교 변증 문학 중에서도 독특한 장르에 속하는데, 이 장르는 아랍어로 “에미르 궁정의 수도사”(The Monk in the Emir’s Majlis)라 불리며 모든 변증 장르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이다. 이 이름이 암시하듯 이 장르에 속한 문헌의 전형적인 특징은 수도사나 교회 지도자가 무슬림 당국자 앞으로 소환되어 칼리파나 에미르, 그리고/또는 일단의 무슬림 학자와의 공개 토론에서 신앙을 변호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이야기다.
--- 제4장 “아랍어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태” 중에서
그러나 범사회적 활동 중에서도 8-10세기에 바그다드에서 진행된 그 유명한 번역 사업만큼 그리스도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적은 없었다. 이 시기에 헬레니즘 세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수입된 철학 문헌과 과학 문헌 및 지혜 문헌이 그리스어·시리아어·팔레비어(중세 페르시아어─옮긴이)로부터 아랍어로 체계적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학식을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아랍 세계의 철학 발전 자체를 위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한 철학적 생활 방식이 지닌 가치를 새로이 인정케 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 그리스도교 지성인들과 무슬림 지성인들은 이러한 철학적 생활 방식이 칼리파 국가 내의 여러 종교 집단에 속한 신자들 간에 더욱 생산적인 대화를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제5장 “바그다드와 그 외 지역의 그리스도교 철학” 중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네스토리오스파라고 불리는 교회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지나칠 정도의 단순한 설명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호칭(테오토코스)에 함축된 의미를 둘러싸고 네스토리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Cyril of Alexandria, 444 사망)와 신학 투쟁을 벌였던 사건은 페르시아의 소위 네스토리오스파 교회의 기원을 말하는 실제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사실을 호도하는 눈속임 장치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제6장 “바그다드는 콘스탄티노플 내지 로마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중에서
선교학 분야에서 새로운 성찰이 나타나고 20세기 초 종교 간 대화에 참여했던 여러 영향력 있는 선구자들의 경험이 공유됨에 따라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65)의 혁명적 선언에서 나타난 전향적 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기타 그리스도교 교회들도 이와 비슷한 선언을 많이 발표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서구인들이 수세기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살아왔던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무슨 교훈을 배워야 할지 깊이 성찰할 때가 되었다.
--- 제7장 “초승달과 십자가 사이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