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 년 가까이 민중에게 사랑받아온 진정한 국민문학
우리에게도 알려진 NHK의 송년 오락프로그램 「홍백노래시합(紅白歌合戰)」에서는 가수들이 홍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노래경연을 벌인다. 또 운동회 등에서도 사람들은 홍팀과 백팀으로 편을 가른다.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문화는 바로 『헤이케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천하를 놓고 다투었던 다이라 씨의 깃발은 붉은색이었고 미나모토 씨의 깃발은 흰색이었기 때문에 두 팀으로 나뉠 때 홍팀과 백팀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한다.
『헤이케 이야기』는 일본의 중세 이후 예술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헤이케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14세기경에 등장하는 ‘오토기조시(단편소설)’는 현존하는 300여 편 가운데 30여 편이 『헤이케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왔으며, 무인들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그들이 즐겼던 ‘고와카마이(춤을 수반한 창[唱])’의 대본 가운데에서는 10여 편, 가면극 ‘노’의 경우에는 37편이 이를 배경으로 삼았다.
근세 시대에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무대극인 ‘가부키’와 ‘분라쿠(인형극)’의 경우에도 무려 16편의 대본이 바로 『헤이케 이야기』를 출전으로 하고 있다. 또 본 번역서 각 권의 첫머리에 들어간 컬러 그림은 대다수가 ‘헤이케 모노가타리 에마키’라는, 그림과 글을 결합한 두루마리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들은 근세 이후 일본인들이 즐겨 보았던 작품들로서 『헤이케 이야기』가 무대예술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숱한 등장인물 가운데서 가장 사랑받았던 이가 바로 미나모토 노 요시쓰네인데 2005년 NHK 대하드라마가 바로 「요시쓰네」로 젊은 나이에 큰 전공을 세웠으나 결국은 형 요리토모의 질시를 사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마는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패배한 영웅에 대해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심리를 일본인들은 판관이었던 요시쓰네의 관위를 따서 ‘판관 편들기(判官?)’라 부르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헤이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이와나미쇼텐, 쇼가쿠칸 등의 대형 출판사 등을 비롯하여 여러 출판사들이 다양한 기획 아래 수많은 주석본을 출판하였다. 또 「미야모토 무사시」로 유명한 요시카와 에이지, 「인간의 증명」의 모리무라 세이이치, 일본적인 인습에 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을 그리는 소설가 미야오 도미코 등 당대의 작가들이 리메이크한 『헤이케 이야기』는 곧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곤 하였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TV 드라마, 뮤지컬, 만화, 게임 등의 세계로까지 『헤이케 이야기』의 영역은 계속 넓어져가고 있는데, 일본의 고전문학 중 이처럼 시대와 계층 그리고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계속 읽히고 인용되고 있는 작품은 달리 예를 찾기 힘들다. 『헤이케 이야기』는 그러한 점에서 문자 그대로의 고전(古典)이며,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요 등장 인물
『헤이케 이야기』에는 수많은 사건만큼이나 숱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다이라 일문의 운명과 크게 연관되어 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요 인물 몇 명만을 소개한다.
다이라 노 기요모리(平淸盛)
다이라 일문의 수장. 호겐 정변과 헤이지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워 태정대신(조정의 정무를 담당하는 태정관[최고 행정기관]의 최고위직)에 올랐으며 일문의 번영을 이룩한 인물이다. 이후 임금의 외조부까지 되는 등 온갖 영화를 누렸으나 권력 남용으로 인해 왕실의 지지를 잃고 민심이 떠나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열병에 걸려 사망하며 그의 사망 이후 다이라 일문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다이라 노 시게모리(平重盛)
다이라 노 기요모리의 장남. 언행이 반듯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충효의 상징처럼 묘사되는 인물이다. 아버지인 기요모리의 실정을 막고 일문을 이끌어갔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음을 기원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죽음은 다이라 일문의 몰락을 알리는 전조처럼 묘사되고 있다.
몬가쿠(文覺)
수도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배포가 큰 인물로 묘사되는 승려.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에게 거병을 권하여 미나모토 일문의 중흥과 다이라 일문의 몰락에 한 단초를 제공한다. 다이라 일문의 마지막 장손이었던 로쿠다이를 구명하여 제자로 삼기도 한다.
v미나모토 노 요리토모(源賴朝)
가마쿠라 막부를 연 초대 장군. 헤이지 정변 당시 아버지 미나모토 노 요시토모가 패하여 피살되고 요리토모 본인은 귀양을 가 있었으나 몬가쿠의 거병 권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다이라 일문과 싸우게 된다. 잠시 정권을 잡았던 기소 노 요시나카를 패퇴시키고 다이라 일문을 멸망시킨 후 동생인 요시쓰네마저 자결하도록 만들어 확고한 무인 정권을 세운다.
기소 노 요시나카(木曾義仲)
시나노 지방에서 성장한 미나모토 일문의 사람으로 잠시 정권을 잡으나 곧 왕실과 귀족의 지지를 잃고 미나모토 노 요시쓰네에게 패해 전사하고 만다.
미나모토 노 요시쓰네(源義經)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으로 다이라 일문과의 숱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민심을 얻는다. 그러나 동료의 참언으로 형 요리토모의 질시를 사게 되고 결국 젊은 나이에 자결하게 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고시라카와(後白河) 임금
다이라 일문의 도움으로 집권하나 그들의 세도가 지나치게 되자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미나모토 일문에게 이들을 칠 것을 명한다. 자신의 뒤를 이은 네 명의 임금과 둘째 왕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모두 겪게 되는 비운의 임금이기도 하다.
다카쿠라(高倉) 임금
현명함과 어진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으로 그려지는 임금. 다카쿠라 임금과 그를 둘러싼 궁인들의 애틋한 사랑은 『헤이케 이야기』 안에서 묘사되는 남녀 간의 애정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나다고 할 수 있다.
안토쿠(安德) 임금
다카쿠라 임금과 중전 겐레이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임금. 다이라 일문이 서울(헤이안쿄)을 버리고 도주할 때 데리고 떠나 내내 바다 위에서 떠돌며 생활하게 된다. 다이라 일문이 패망하는 최후의 순간에 외할머니인 기요모리의 부인이 품에 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
겐레이몬인(建禮門院)
다이라 노 기요모리의 둘째 딸. 다카쿠라 임금의 중궁이 되고 국왕의 모후로 겐레이몬인이라는 원호를 제수받으며 다이라 일문이 누리는 영화의 정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문의 몰락으로 화려한 궁궐을 벗어나 힘들고 어려운 피난 생활 끝에 아들인 국왕과 자신의 어머니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비극을 눈앞에서 겪는다. 마지막 권인 ‘후일담’을 이끌어가는 인물로 자신의 생을 반추하며 다이라 일문의 영욕에 걸친 세월을 한눈에 그려 보여준다.
로쿠다이(六代)
다이라 일문의 마지막 장손. 일문의 몰락 후 가족과 함께 숨어 지내다 주변 사람들의 밀고로 참화를 입을 위기에 처하게 되나 몬가쿠 대사의 도움으로 삶을 연장하게 된다. 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끝내 참수당하여 다이라 일문의 직계는 완전히 끊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