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30일 지리산에 갔을 땐 선생님은 몸이 안 좋아서 산에는 못 오르시고, 선생님이 빨치산으로 누비고 다니던 지리산 백무동 계곡에서 종일토록 둘이서 물에 발 담그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사진은 지금도 내게 소중한 추억이다.
선생님! 8월 17일이면 당신이 떠나신 지 벌써 10년입니다. 유일하게 제게 욕하시던 선생님이 안 계시니까 욕해줄 사람이 없대나요. (박현채와 김동완)
--- pp.91~92
선생님은 수선화나 군자란 같은 흔한 꽃 이름도 모르신다. 내가 웃으면서 “아이 참! 무식해서 같이 못 놀겠네.” 하면 선생님은 “아니, 꽃은 예뻐서 보면 기분 좋고, 음악도 좋아서 들으면 고만이지 제목은 알아서 뭘 하능고?” 하고 대답하신다.
옳으신 말씀이다. 나 같은 날라리는 영화 제목, 주인공 이름, 노래 제목, 가수 이름과 가사 외우는 데만 귀신이고 공부는 딱 질색인지라 푼수시인밖에 못 되는데, 선생님은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살아있는 신화’로 추앙받으며,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하여 2005년 출간된『대화』까지 10여 권의 책을 출간하시지 않았는가? (리영희와 박정호)
--- p.16
마야의 시디를 열어보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 아이가 감히 내가 존경하는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시디 사진을 찍은 거다.
1989년 5월이 생각났다. ‘산모임’ 사람들과 망월동을 찾았을 때 입은 내 티셔츠에, 철조망 조국에 갇혀서도 활짝 웃는 문익환 목사님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박 장로님께서 “이행자 시인은 남의 남편을 가슴에 품고 다니네!” 하시는 바람에, 문익환,유원호 방북 사건 재판이 자꾸만 연기되어 다들 속상해하다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영애와 마야)
--- pp.251~252
행자 누님
나이가 쉰이라니요, 그런 거짓말에 속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쇠창살 안에 있다고 적당히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도 볼 것은 다 보고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누님의 생리적인 나이(사실 그것을 누가 확인합니까?)는 쉰이신지 모르지만 제가 정확히 판단하기는 생김새는 30대, 시는 20대, 마음은 10대입니다. 누님은 아직도 그렇게 젊고 아름답습니다. (이수호와 단병호)
---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