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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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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20g | 128*208*20mm
ISBN13 9791198173652
ISBN10 119817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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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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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구 - 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던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 - 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 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포크볼 - 형
왼손잡이였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형은 소속팀를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 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 - 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돌아섰다 인기가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 - 나
나는 실업팀에 무명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박찬호가 던진 강속구에 맞은 BMW차량의 수리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 워낙 튼튼해서 하나도 안 나온대 …… 난 마구를 던질 거야 꼭 BMW차를 무너뜨릴 거야 ……
형은 말이 없었다 누나는 죽음만이 은퇴를 허용한다고 주절거렸다 관중들은 건넛방 초록색 그라운드에서 야유하듯 화투장을 날렸다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전문

건전지 갈아 끼우듯 여자를 바꾸던 아버지가
안방에 들어서면 스파크가 튀는 밤이다
두꺼비집에 두꺼비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저항 한 개를 추가하며
꼬마전구처럼 소심하게 깜빡거리고만 있다
아버진 뒤늦게 어머니와 접속을 시도하지만
어머닌 차단기 내린 지 오래
전압이 센 할아버질 수발한 이력을 어머니가 토해낼 때마다
양과 음이 쪽쪽 빨아대는 전류의 본능만 탓하는 아버지
어머닌 한이 충전된 배터리를 꺼내
아버지 몸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여자들을 지져댄다
눈이 뒤집힌 여자들이 하나둘 꽁무니를 뺄 때
아버진 수명 다한 필라멘트처럼 퍽 맥이 풀린다
과부하가 걸리는지
면상에 손가락까지 찔러대는 어머니
오긴 왜 와? 여기가 어디라고!
급기야 하늘과 지상 사이에 퓨즈가 나가는 소리
이승과 접속이 끊기는 소리 살벌하게도 튄다
어휴, 난 어머니가 차려준 전기만 먹고 살아야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희한한 발전기를 몸 안에 단 어머니
다 타버린 향불 앞에 독주 한잔 따라 올리며
40년이 넘은 울음센서 스위치를 누른다
누전(漏電)인지 누전(淚田)인지……

제삿밥도 못 먹은 방전된 아버지, 내년에도 또 오실라요?
--- 「어머니의 저항(Ω)」 전문

신상품을 설명하던 점원의 입술은
3일째 되던 날 시들고 말았다
매몰된 후 체온이 되어 주던 여자는
전달되지 않을 유언을 내게 맡겼다
누난 내 여자니까 누난 내 여자니까 ……
어린 애인이 자주 불러주던 노래라고 했다
멜로디는 점점 부패되어 악취를 풍겼다
5일째가 지나자
목마름이 오줌을 받아먹었고
6일째가 지나자
배고픔이 여자의 몸을 뜯어 먹으려다 멈추었다

나의 지층은 무슨 색깔로 기록될까?
관 뚜껑이 열리듯 빛이 들어오는 순간
발견될 죽음의 자세를 7일째 날 생각했다
똥과 오줌으로 얼룩진 삶의 최후라니
뉴스는 죽음마저 팔아먹겠지

8일째가 되어도 불 꺼진 세일은 계속되고 있다
꿈속에서 죽은 여자가 뺨을 때려도 일어날 수 없다
희미한 정신이 화석의 마음을 이해한다
--- 「8일째 날― 암흑의 낮을 통과한다」 전문

어미보다 먼저 죽은 자
상갓집에서 추궁을 당한다
아비가 병명을 발설한다
시에 미친 놈
바보 바보, 바보 같은 자식
온몸이 표적인 건 바보가 노래를 불렀기 때문

저녁 안에서 삽날이 빛난다
대지의 심장을 열어
차갑게 식은 심장을 묻어야 한다
까마귀가 건조한 생각들을 읽고 간다
탕, 하얗게 사진이 찍힌다
봉인된 어둠
죽은 자들이 다가와 뼈를 내밀 때
흙의 질문은 가볍다
들린다 만질 수 없는 지상의 바람소리
눈만 계속 쌓이고
겨울 뒤에 겨울이 오고
황량한 시간이 오래도록 삭아간다
나의 노래
더 이상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 「묘혈(墓穴)」 전문

바람이 묘지에서 울고 간다
너는 건조한 뼈를 내민다
불결한 소문이 도시로부터 전해지는 밤
도시 안엔 낡은 고향이 있다
썩지 않아 역겨운 방부제 속 고향
죽기 전 네가 불던 낭만적인 휘파람은
서러운 자폐아가 되어 여전히 네거리를 떠돈다
멸종 직전인 너의 이상은 얼마나
추방당하기 좋은 순진함으로 헐떡거렸던가
텍스트를 거부하던 주관적인 몸부림
그날 너는 맥박이 불규칙한 자동차를 타고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 위를 날았다
도시의 등에 칼을 꽂으면
환락의 피가 벌컥벌컥 쏟아질 것 같은
오염된 금요일 밤에 유서를 쓰듯 스키드마크를 그렸다

초식동물의 순한 숨소리가 되고픈 휘파람을 누가 기억이나 할까
밤마다 싱싱한 해골을 국적 불명의 바람이 만지고 간다
바람의 독백이 지나간 자리마다 묘지의 동공이 불안하게 열린다
--- 「시체들의 밤」 전문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보들레르처럼 춤 속에 비수를 감췄거나 황홀한 날갯짓 속에 독을 내장한다는 진술 그대로 하린 시는 이상에서 우리가 읽어온 대로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그것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면서 풍자를 내장한 작품세계들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팝아트처럼 기성 대중문화를 시적 대상이나 이미지로 두루 차용하기도 한다. 이들 복합성이 그의 이번 시집을 읽는 재미라면 한 재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백처럼 거기에는 비수 아니면 독이 있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혼미하고 난해한 마술’의 춤을 추게 만드는.
- 홍신선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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