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가 한산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으면 포 사장님이 다가와 가까이 앉는다. 그는 나를 마치 지식iN에 고민 상담 글을 올린 사람처럼 바라본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고, 괜찮냐고 묻는다. 내가 사장님이야말로 괜찮냐고 되물으면, 포 사장님은 속 시원해질 정도로 호탕하게 웃으며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라고 답한다. 가진 내공을 모두 몰아주고 싶은 답변이다.
--- 「비록 껍데기만 남게 되더라도」 중에서
의사 선생님이 나간 후에야 비척비척 일어나 거울을 보니 이마에 붙인 거즈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참혹한 몰골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화장은 반쯤 녹아 있었으며 하얀 리넨 셔츠엔 핏자국이 방울방울…. 거즈를 떼어보면 쪼개진 이마 사이로 알코올이 흘러나올 것 같은 행색이었다. 비틀거리며 바깥에 나와 보니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아, 나 출근해야 되는데….
--- 「상처에 새살이 솔솔, 마데카술-집」 중에서
만약 아빠와 (굳이) 술집에 가야 한다면 꼽고 싶은 집이 있다. 정말 좋아하는 술집이지만 이름만큼은 좋아할 수 없는 집, 을지로의 ‘경상도집’이다. 여긴 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산 경상도 사람이고, 대학 다닐 때부터 줄곧 서울에서 살았지만 아직까지도 심한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고, 누가 봐도 경상도 출신인 사람이니까. 세상엔 정말로 다양한 경상도 집이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뿌리, 나의 본적으로 등록되어 있는 경상도 집은 불합리한 가부장제의 산물 그 자체였다. 딸을 내리 다섯 낳고 여섯 번째가 돼서야 아들을 얻은 여자가 한참 후 일곱 번째 늦둥이를 낳은 집. 제일 유감스러운 것은, 그 늦둥이가 내 아빠라는 점이다(이 문장을 보고 바로 아, 탄식하는 분들이 꽤 많으실 거라 믿는다).
--- 「K-장녀 생존기」 중에서
나는 루프엑스에서 일주일에 일곱 번 오는 손님,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본 손님,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손님이 되었다. 돈 말고도 술집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 나 있기도 했다. 필름 카메라로 루프엑스 내부를 찍은 사진을 인화해 뒷면에 짧은 편지를 써서 선물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에 다녀왔을 땐, 양손 가득 짐이 무거워 한 병만 들고 올 수 있었던 아이슬란딕 스타우트를 침착한 찰리 채플린을 닮은 맥주 선생님인 황재상 씨에게 주기도 했다.
--- 「지나고 보면 다 첫사랑」 중에서
보통의 해장은 술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급급하지만, 진정한 해장은 술을 다시 원하게 만든다. 술이 있어야 해장도 할 수 있고, 해장을 해야 술도 다시 마실 수 있는 법이니까. 이것이 가능할 때, 주정뱅이들은 현실에서 탈출해 2차원의 이상향으로 진입한다. 한 면은 음주, 다른 한 면은 해장이라고 쓰인 뫼비우스의 띠다. 이 띠 위에서 달리는 주정뱅이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해장을 하는지 술을 깨기 위해 해장을 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의심하지 말고 달려라. 계속해서 달려라. 달리다 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못지않은 드링커스 하이(drinker’s high)로 보답받을 것이니.
--- 「해장과 음주를 반복하는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한라산을 올라본 자만이 그 높이를 알 수 있다. 삼일식당의 국물과 한라산 소주를 번갈아 마셔본 자만이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산행 코스는 어찌나 빈틈없이 다채로운 풍경을 자랑하는지. 소주잔 걸음마다 그득그득한 선지와 내장 모듬이, 풍성한 콩나물과 우거지가 반긴다. 멜젓과 쌈장에 번갈아가며 혀를 놀리다 보면 심심할 틈이 없다. 힘들 새도 없다. 내장탕 특유의 누린내라는 장해물을 만날 법도 하지만, 삼일식당에서는 그저 매끄럽게 닦아놓은 꽃길만 오르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을 오를 때 노랗게 펼쳐진 유채꽃밭을 봤던 것도 같다. 물론 나는 앞이 노래질 때까지 마시는 게 더 좋지만.
--- 「한라산으로 맞는 미라클 모닝」 중에서
오빠들을 수없이 떠나보내 본 나는 이제 안다. 후회가 덕지덕지 붙은 기억을 떠올릴 바에야 곱창집에서 뜨끈한 곱에 시원한 소주나 한잔하는 게 낫다는 것을. 곱씹을 가치가 있는 것은 구남친도 아니고 후회도 아닌 곱뿐이라는 것을!
--- 「후회를 곱씹지 말고 곱을 씹자」 중에서
집과 술집 사이에 이물질처럼 회사가 껴 있다. 일을 좋아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가슴이 콱 막힌다. 예측할 수 없는 온갖 변수들로 야심한 시각에 퇴근하는 날일수록 술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악취나는 부산물 같은 감정들을 끌어안고 집에 누워봤자 체할 뿐이니까. 온종일 일했다면 새벽까지는 마셔줘야 워라밸이 맞는다.
--- 「매운맛, 보지 말고 먹으며 삽시다」 중에서
피냐 콜라다만 내리 열 잔을 마신 다음에는 불룩 나온 배를 비치 타월로 가린 채 럼을 샷으로 홀짝인다. 특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마시는 럼은 그 자체로 훌륭한 칵테일이다. 카리브해의 바닷물이 입술에 남긴 짭짤한 소금기 덕이다. 그러니 바다에서 나오자마자 럼을 마시면 바다의 짠맛과 럼의 단맛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천연의 단짠단짠을 즐길 수 있다. 배 위에서 럼을 병나발 불던 해적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다.
--- 「그럼, 그 럼만 있다면 어디든 술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