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신체 조건을 가진 도준은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했다. 그랬던 그가 갑작스러운 심정지라니, 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1, 119…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은수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긴장해 굳은 손가락은 세 개의 숫자도 제대로 터치하지 못했다. 의건도 심폐소생술을 포기한 채 은수를 바라봤다. 간신히 키패드에 119를 누른 은수가 통화 버튼을 터치하려는 순간, 민기가 핸드폰을 뺏었다.
“뭐 하는 거야, 김민기?”
“우리가 뭘 했는지 잊었어?”
민기의 말에 세 남자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이들은 모두 마약을 했다. 도준의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부검하면 마약을 했다는 걸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 pp.54~55
“어? 너 도준 오빠와 사귀었어?”
해주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제야 의건과 정우가 해주를 불편하게 대한 게 이해됐다. 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파티에 참석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진은 재호와 그의 친구들이 돌아오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과거 연애를 묻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진짜? 언제? 얼마나?”
수진의 질문 폭탄이 이어졌다. 정우뿐만 아니라, 해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필사적으로 눈치를 줬지만, 안타깝게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준영은 탄식했다. 이게 다 자신이 서도준의 이름을 입에 올린 탓이었다.
“구백이십육…”
“헤엑! 그렇게 오래 만났어?”
해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놀란 수진이 말을 끊었다. 그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수진과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하지 못한 말을 덧붙였다.
“…시간.”
“어?”
수진이 바보처럼 얼빠진 소리를 냈다.
“분으로 따지면 오만오천오백육십분, 초로 따지면 삼백삼십삼만삼천육백초.”
“……”
“도준 오빠와 내가 사랑한 기간이야.”
--- pp.67~68
“나 서도준에게 협박받았어.”
재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건과 은수를 깜짝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협박이라니, 친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협박을 당했다는 건 약점을 잡혔다는 말이었다.
“협박이라니… 그래서 홧김에 서도준을 죽인 거야?”
의건은 재호가 도준을 죽였다고 확신에 차서 물었다. 은수도 자신의 추리가 망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수를 보며 이죽거렸다.
“서도준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과연 나뿐일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은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놓칠 재호가 아니었다.
“최은수. 너야말로 서도준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왜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 나는 서도준과 아무 일도 없었어.”
은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뒷짐을 졌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보는 모습은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재호는 시치미 떼는 은수를 비웃으며 말했다.
“왜 서도준이 너에게 매달 돈을 보내줬을까? 그것도 500만 원씩 말이야.”
의건이 눈을 크게 뜨고 은수를 쳐다봤다. 은수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 pp.103~104
“억울하면 해명해봐, 최은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은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기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김민기. 나와 재호가 서도준에게 약점을 잡힌 건 맞아. 그렇지만 절대 죽이지 않았어.”
“너는 지금 네 말이 앞뒤가 맞는다고 생각해?”
“일반적으로 사이가 안 좋다고 살인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너도 서도준을 죽일 이유가 충분히 있는 걸로 아는데.”
민기는 은수를 비웃었다. 그가 의심을 벗기 위해 헛소리를 한다고 치부했다.
“이제 아무 말이나 해보겠다는 거야? 내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프란시스.”
은수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민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 너… 그, 그걸 어떻게!”
민기가 심하게 동요하자, 재호와 의건이 놀라서 쳐다봤다. 은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 다 알고 있어. 서도준과 있었던 일, 이야기해. 아니면 내가 할 테니까.”
“씨발! 개새끼… 그걸 최은수에게 다 말했어? 좆같은 새끼!”
민기는 배신감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의리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고 뒤통수를 맞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 좆같은 새끼. 아주 잘 뒤졌네.”
민기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pp.160~161
“혹시… 서도준이 죽는 걸 바라는 사람이 더 있는 건 아닐까?”
은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말에 의건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도대체 왜?”
“솔직히 우리가 서도준 친구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서도준 인성을 봐. 사방이 적이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런데 카지노 호텔 손자라서 못 건드는 거잖아. 하물며 친구인 우리한테도 약점을 잡았던 놈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랬겠어?”
은수의 주장에 설득된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기도 일부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그 말은 이해가 가. 그런데 시체를 숨겨서 뭐 해? 서도준을 싫어하는 놈이 있었다면, 시체를 보고 얼마나 기뻤겠어. 시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고.”
민기의 말에 객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의건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내리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중얼거렸다.
“…시체라도 곁에 두고 싶어 한 걸 수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세 남자의 시선이 의건의 얼굴로 향했다.
“박해주 말하는 거야.”
--- pp.204~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