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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상제례답문
이황, 삶의 도리를 말하다 양장
아카넷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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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top20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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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고전총서

책소개

목차

초간본

이담에게 답하다·1564
이담에게 답하다·1565
송언신에게 답하다·1570
김태정의 문목에 답하다· 1569
이순의 문목에 답하다·1564
안동부관에게 답하다·1565
김우굉, 김우옹에게 답하다·1566
김우굉, 김우옹에게 답하다·1570
이문규에게 답하다·1567
안동부사 윤복에게 보내다·1566
기대승에게 답하다·1564
기대승에게 답하다·1565
기대승에게 답하다·1567
기대승에게 답하다·1569
이정에게 답하다·1560
이정에게 답하다·1565
이정의 문목에 답하다·1566
조목에게 답하다·1563
정유일에게 답하다·1561
정유일에게 답하다·1564
정유일의 별지에 답하다·1567
정유일에게 답하다·1569
정유일의 별지에 답하다·1570
금응협, 금응훈에게 보내다·1563
김부륜에게 답하다·1553
김부인, 김부신, 김부륜의 문목에 답하다·1555
김부륜에게 답하다·1557
김부륜에게 답하다·1570
김취려에게 답하다·1561
김취려에게 답하다·1565
김취려에게 답하다·1566
우성전에게 답하다·1566
우성전에게 답하다·1567
우성전에게 답하다·1568
우성전에게 답하다·1570
허봉에게 답하다·1570
정곤수에게 답하다·1569
김성일에게 답하다
김성일에게 답하다·1568
김성일에게 답하다·1570
김기에게 답하다·1569
이덕홍에게 답하다·1570
금난수에게 보내다·1561
금난수에게 보내다·1563
류중엄에게 답하다·1569
권호문에게 답하다·1564
이함형에게 답하다·1569
조진에게 답하다·1568
정구에게 답하다
한수에게 답하다·1564
김택룡에게 답하다·1568
조카 녕, 교, 혜에게 답하다
아들 준에게 답하다·1565
종도에게 보내다·1559
권대기에게 답하다
정유일에게 답하다
김부필에게 답하다
정윤희에게 답하다
후지

보본

보본
노수신에게 답하다·1566

해제
옮긴이의 말
부록
부록 1 발췌한 문답과 같은 글이 실려 있는 위치
부록 2 퇴계와 문답을 나눈 인물 소개
부록 3 문답 내용의 주제별 분류
찾아보기

저자 소개2

원저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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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 (1501-1570)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퇴계 이황의 다른 상품

1971년 서울 출생. 서당(書堂)에서 15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한 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연수장학생(21기)과 동양학연구장학생(16기)으로 선발되었다. 고려대학교 강사와 겸임교수를 지냈고(2012년~2020년),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2008년~현재)와 연세대학교 연구교수(2012년~현재)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청계서당과 (재)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중국어심화과정에 출강하고 있다. 유가철학 가운데서도 특히 예(禮)를 철학적 주제로 해명하고, 이를 인문학적 담론으로
1971년 서울 출생. 서당(書堂)에서 15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한 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연수장학생(21기)과 동양학연구장학생(16기)으로 선발되었다. 고려대학교 강사와 겸임교수를 지냈고(2012년~2020년),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2008년~현재)와 연세대학교 연구교수(2012년~현재)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청계서당과 (재)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중국어심화과정에 출강하고 있다. 유가철학 가운데서도 특히 예(禮)를 철학적 주제로 해명하고, 이를 인문학적 담론으로 설명해내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주요 논문으로는 「‘先在’와 ‘後名’의 대립구도로 읽은 다산의 심성론」, 「『喪祭禮答問』 分析을 통한 退溪의 俗禮觀 考察」, 「朱子의 ‘新民’ 해석과 ‘道統論’의 함수관계」, 「退溪의 書院享祀禮 定礎에 대한 考察「白雲洞書院 享祀禮 修正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예’담론의 이론적 구도」, 「유학의 시대적 대응논리로서의 聖人觀-맹자와 주자를 중심으로」, 「『대학사변록』에 나타난 박세당의 ‘격물치지’ 해석과 주희 비판의 성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예학 논의」, 「The Confucian Concept of Li 禮-The Transition from “Worship Rituals” to “Governance Norms”」, 「한국과 베트남의 유교 수용과 예교 시행 비교」 등이 있고, 저서로는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퇴계이황의 예학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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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6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712쪽 | 128*188*40mm
ISBN13
9788957339251

책 속으로

만일 선왕께서 제정하신 예를 고려하지 않고 감정대로 행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증삼의 효성으로는 상을 마친 뒤에도 상식을 그만둔 날이 없었을 것이다. 민자건의 효성으로도 상을 마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절절히 슬퍼하며 “선왕이 만드신 예이니, 감히 지나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그대는 증삼과 민자건이 행하지 못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효라고 할 수 없으며, 이치를 아는 군자로부터 나무람을 받기 좋을 뿐이니 어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 p.67

그대의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본래 알고 있었는데, 그런 몸으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몹시 건강이 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게다가 지금까지 나물만 먹는다 하니 몸을 지탱하지 못할 만큼 손상이 누적되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선왕께서 상례를 제정하실 때 비록 미음이나 죽 그리고 나물 반찬을 먹는 것에 신중을 기하셨지만, 그러면서도 상황의 적절성을 가늠하여 생명을 구제할 수 있는 방도를 반복해서 제시하셨다.
--- p.116~117

“상례와 제례는 대대로 해 오던 방식을 따른다”라는 이 뜻도 좋지만,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들은 대로 행할 수 있는가”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제사 의식의 잘못된 점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실천하는 것이 진실하고 독실한 결과 부형이나 종족이 점점 신뢰해 간다면 예에 맞지 않았던 것들도 오히려 방편으로 고치기를 청하여 개선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p.162

동네 지인이 술을 따라야 하는지 여부는 스스로 가부를 헤아려 대처함이 마땅할 것이니, 그렇다고 해서 어찌 지나치게 후해서 의리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만일 술을 따른다면 3년이 이미 지난 다음에는 마땅히 묘소로 가서 해야지, 남의 집 사당에 가서 행해서는 안 된다.
--- p.201

질문한 사안들은 모두 변례(變禮)에 해당하는 것들로, 사람들에게 난처한 것이며 식견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평소 이런 사안들에 대해 서로 강명(講明)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감히 그릇된 소견으로 고금의 시의를 참작하였고, 그대의 재량과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니 이치에 어긋난 데가 있다면 평하여 일깨워 주기를 바란다.
--- p.203

시속의 잘못을 바로잡고 고례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로 군자의 일이기는 하지만 경솔한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는 점도 있다. 그것은 단지 화를 피하자는 것뿐만 아니라 도리가 마땅히 그렇기 때문이기도 해서이다. …(중략)… 소강절은 “우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오늘의 옷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자께서는 이 말이 일리가 있음을 깊이 찬탄하였다.
--- p.284

문: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는 것과 관련하여.
답: 기한에 맞추어 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 불행하게도 곤궁해서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날짜를 잡아서 장례를 하는 것도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형제들이 저마다 길흉에 구애되어서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 p.446~447

두 분을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은 비록 온 세상이 다 그렇게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역시 효자가 옛날을 믿고 예에 의거하는 데 달려 있다. 지성으로 애통해하며 고쳐 나간다면 세속의 비례를 고쳐 예문대로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 p.452

대개 옛날에는 대(代)마다 각각 사당을 달리하여 그 제도가 매우 거창하였기 때문에 대수의 차등이 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후세에는 같은 사당에 감실만 나누어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제도가 매우 간솔하여 여러 대수의 제사를 모두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옛날과 달라진 것이니, 이른바 “예(禮)가 비록 옛날에 없었던 것일지라도 의(義)로써 제기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이 3대만 제사 드리는 것은 시왕(時王)의 제도이고, 4대까지 제사 드리는 것은 정자와 주자의 제도이다. 힘이 미칠 수만 있다면 4대까지 제사 드리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p.473~474

『가례』에도 장례에는 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분명하게 있다. 빈궁한 처지에 예를 지키는 자는 오히려 이것을 법으로 삼을 만한데, 하물며 돌아가신 분이 살아생전에 지극히 애통한 심정을 품고 살다가 이런 유명을 했는데 가족이나 붕우들이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버리려고 한다니 가장 도리에 어긋난 것이기에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들어 보니 회곽으로 하라는 유명이 또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되면 나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대들이 마땅히 그런 유명이 온전한 정신에서 하신 것인지, 혼미한 상태에서 하신 것인지를 잘 살펴서 적절하게 잘 대처해야 할 것이다.
--- p.563

문: 주자께서 일찍이 소목의 예가 오랫동안 폐기된 것을 한탄하셨는데, 『가례』를 지으시면서 도리어 시속의 예를 따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시왕의 예제를 어찌 가볍게 고치겠는가? 더구나 예란 천하가 공통으로 행하는 것인데, 온 세상이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공허한 예문을 완성해 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러기에 문제자들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고례가 회복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시면서도 끝내 “어찌 조정에 말씀을 올려서 빠르게 그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씻어내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 p.582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재물이 탐이 나서 다투어 후사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후사가 되고 나면 살아 계시는 분을 섬기거나 돌아가신 분의 상례나 제례 등을 치를 때 도리어 낳아 주신 어버이에게 치중하면서 후사로 삼아준 분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풍속이 야박하고 못된 정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 p.592

출판사 리뷰

예법에 대한 원숙한 이해와 유연한 적용
정서와 상황을 생각하는 퇴계의 신중함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의 『가례』에서 제시하는 규범을 실생활에서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규범이 모든 상황을 일일이 규정할 수는 없었기에, 때로는 변례(變禮)라는 방식으로 예외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특히 상례와 제례에서는 『가례』의 규범이 당시 조선에서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나 국가에서 제정한 법령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가례』는 신주에 조상의 영혼을 모시고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우선시했지만, 사람들은 조상의 육신이 누워 있는 무덤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선호했다. 또 주자는 사대부들이 고조(高祖)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당시 조선 국법은 일반 사대부들이 증조(曾祖)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원칙과 예외 사이에서 일어나는 까다로운 문제들에 대해 퇴계는 경전으로 내려오는 고례(古禮),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만든 예서(禮書)뿐만 아니라,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 여러 자료를 꼼꼼하고 폭넓게 참조하여 이런 변례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언한다.

퇴계의 답변을 보면 그가 예법의 자구에 갇히지 않고 예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예법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밝히는 데 힘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법을 통해 개인의 정서를 충분히 담아 표현하면서도 개인의 삶, 사회적 관계, 자연의 섭리도 해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즉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치르는 상례와 제례도 궁극적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의 도리에 맞도록 행해져야 하므로 퇴계는 성현들이 세운 규범이라는 대원칙 아래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적 질서를 고려해 관습과 법령을 존중한 방안들을 제시한다. 이처럼 퇴계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예학을 충분히 소화하고,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예학에 대해 원숙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퇴계는 변례를 만들고 적용하는 데 사뭇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과 과거의 실수를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의 의견도 잘못될 수 있으므로 항상 질문자에게 더 나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직접 판단해 보라고 권한다. 퇴계의 이런 자세는 변례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고 점차 성현의 예법에 맞도록 고쳐야 한다는 그의 예학적 견해와 자신이 예법을 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는 생각에 입각한 것이지만, 퇴계 본인의 겸손하고 솔직한 성품, 을사사화와 같은 경험을 통해 얻은 퇴계 개인의 상처가 녹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제자가 발췌하고 퇴계 예학의 전문가가 보완하여 번역한
상례와 제례에 관한 447개의 대화


이러한 조심스러움에도 퇴계의 의견은 예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으로 인정받았고, 퇴계 사후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견을 중요한 길잡이로 삼았다. 사람들이 매번 퇴계의 문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글을 일일이 찾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제자 조진이 상례와 제례에 관한 글을 발췌하여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흩어진 것을 모았다는 점에서는 편리해졌지만, 여전히 이 책을 바로 읽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이 원래 편지였기에 질문자는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묻고 퇴계도 질문자가 상당히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개별 사안에 집중하여 답한다. 그래서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는 읽기 어렵다. 더구나 순서가 주제별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질문자에 따라 글이 묶여 있어서 궁금한 문제를 바로 찾을 수도 없다. 옮긴이 한재훈 교수는 퇴계 예학의 전문가로, 오래전부터 『퇴계선생상제례답문』에 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옮긴이는 이 책이 지닌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충실한 번역과 함께 맥락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주석을 달았다. 또 구별 없이 묶여 있는 내용들을 주제에 따라 447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각각 번호를 매기고, 각 조목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분류한 부록을 실어 이 책의 활용을 더 편리하게 하였다.

사람의 마음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고려하는
현대인에게 귀감이 되는 퇴계의 정신


최근 퇴계 종가에서 차례 때 상차림을 소박하게 한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처럼 형식보다는 의미와 마음을 중요시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퇴계의 정신은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관계망과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수시로 도덕적 딜레마를 겪는다. 때로는 규범들이 의미와 맥락을 잃고 너무 형식적으로만 행해진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질서가 없어 각자 너무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런 문제를 느끼고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안에 올바른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도덕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마흔두 명의 질문자들이 마주한 문제는 제각각이지만,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개인의 마음을 잘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잃지 않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동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규범을 찾는 문제는 16세기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성찰하여 삶의 도리를 찾는 퇴계의 정신은 조선 사회보다 더 복잡하고 다변하는 사회에 살며 더 쉽게 아노미에 빠지는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ㆍ 이 책은 대우재단 학술연구지원 사업 논저 부문에 선정되어 연구 및 출간 지원을 받은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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