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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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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 (1501-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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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선왕께서 제정하신 예를 고려하지 않고 감정대로 행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증삼의 효성으로는 상을 마친 뒤에도 상식을 그만둔 날이 없었을 것이다. 민자건의 효성으로도 상을 마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절절히 슬퍼하며 “선왕이 만드신 예이니, 감히 지나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그대는 증삼과 민자건이 행하지 못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효라고 할 수 없으며, 이치를 아는 군자로부터 나무람을 받기 좋을 뿐이니 어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 p.67 그대의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본래 알고 있었는데, 그런 몸으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몹시 건강이 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게다가 지금까지 나물만 먹는다 하니 몸을 지탱하지 못할 만큼 손상이 누적되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선왕께서 상례를 제정하실 때 비록 미음이나 죽 그리고 나물 반찬을 먹는 것에 신중을 기하셨지만, 그러면서도 상황의 적절성을 가늠하여 생명을 구제할 수 있는 방도를 반복해서 제시하셨다. --- p.116~117 “상례와 제례는 대대로 해 오던 방식을 따른다”라는 이 뜻도 좋지만,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들은 대로 행할 수 있는가”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제사 의식의 잘못된 점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실천하는 것이 진실하고 독실한 결과 부형이나 종족이 점점 신뢰해 간다면 예에 맞지 않았던 것들도 오히려 방편으로 고치기를 청하여 개선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p.162 동네 지인이 술을 따라야 하는지 여부는 스스로 가부를 헤아려 대처함이 마땅할 것이니, 그렇다고 해서 어찌 지나치게 후해서 의리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만일 술을 따른다면 3년이 이미 지난 다음에는 마땅히 묘소로 가서 해야지, 남의 집 사당에 가서 행해서는 안 된다. --- p.201 질문한 사안들은 모두 변례(變禮)에 해당하는 것들로, 사람들에게 난처한 것이며 식견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평소 이런 사안들에 대해 서로 강명(講明)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감히 그릇된 소견으로 고금의 시의를 참작하였고, 그대의 재량과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니 이치에 어긋난 데가 있다면 평하여 일깨워 주기를 바란다. --- p.203 시속의 잘못을 바로잡고 고례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로 군자의 일이기는 하지만 경솔한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는 점도 있다. 그것은 단지 화를 피하자는 것뿐만 아니라 도리가 마땅히 그렇기 때문이기도 해서이다. …(중략)… 소강절은 “우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오늘의 옷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자께서는 이 말이 일리가 있음을 깊이 찬탄하였다. --- p.284 문: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는 것과 관련하여. 답: 기한에 맞추어 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 불행하게도 곤궁해서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날짜를 잡아서 장례를 하는 것도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형제들이 저마다 길흉에 구애되어서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 p.446~447 두 분을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은 비록 온 세상이 다 그렇게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역시 효자가 옛날을 믿고 예에 의거하는 데 달려 있다. 지성으로 애통해하며 고쳐 나간다면 세속의 비례를 고쳐 예문대로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 p.452 대개 옛날에는 대(代)마다 각각 사당을 달리하여 그 제도가 매우 거창하였기 때문에 대수의 차등이 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후세에는 같은 사당에 감실만 나누어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제도가 매우 간솔하여 여러 대수의 제사를 모두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옛날과 달라진 것이니, 이른바 “예(禮)가 비록 옛날에 없었던 것일지라도 의(義)로써 제기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이 3대만 제사 드리는 것은 시왕(時王)의 제도이고, 4대까지 제사 드리는 것은 정자와 주자의 제도이다. 힘이 미칠 수만 있다면 4대까지 제사 드리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p.473~474 『가례』에도 장례에는 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분명하게 있다. 빈궁한 처지에 예를 지키는 자는 오히려 이것을 법으로 삼을 만한데, 하물며 돌아가신 분이 살아생전에 지극히 애통한 심정을 품고 살다가 이런 유명을 했는데 가족이나 붕우들이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버리려고 한다니 가장 도리에 어긋난 것이기에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들어 보니 회곽으로 하라는 유명이 또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되면 나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대들이 마땅히 그런 유명이 온전한 정신에서 하신 것인지, 혼미한 상태에서 하신 것인지를 잘 살펴서 적절하게 잘 대처해야 할 것이다. --- p.563 문: 주자께서 일찍이 소목의 예가 오랫동안 폐기된 것을 한탄하셨는데, 『가례』를 지으시면서 도리어 시속의 예를 따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시왕의 예제를 어찌 가볍게 고치겠는가? 더구나 예란 천하가 공통으로 행하는 것인데, 온 세상이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공허한 예문을 완성해 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러기에 문제자들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고례가 회복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시면서도 끝내 “어찌 조정에 말씀을 올려서 빠르게 그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씻어내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 p.582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재물이 탐이 나서 다투어 후사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후사가 되고 나면 살아 계시는 분을 섬기거나 돌아가신 분의 상례나 제례 등을 치를 때 도리어 낳아 주신 어버이에게 치중하면서 후사로 삼아준 분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풍속이 야박하고 못된 정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 p.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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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법에 대한 원숙한 이해와 유연한 적용
정서와 상황을 생각하는 퇴계의 신중함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의 『가례』에서 제시하는 규범을 실생활에서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규범이 모든 상황을 일일이 규정할 수는 없었기에, 때로는 변례(變禮)라는 방식으로 예외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특히 상례와 제례에서는 『가례』의 규범이 당시 조선에서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나 국가에서 제정한 법령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가례』는 신주에 조상의 영혼을 모시고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우선시했지만, 사람들은 조상의 육신이 누워 있는 무덤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선호했다. 또 주자는 사대부들이 고조(高祖)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당시 조선 국법은 일반 사대부들이 증조(曾祖)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원칙과 예외 사이에서 일어나는 까다로운 문제들에 대해 퇴계는 경전으로 내려오는 고례(古禮),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만든 예서(禮書)뿐만 아니라,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 여러 자료를 꼼꼼하고 폭넓게 참조하여 이런 변례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언한다. 퇴계의 답변을 보면 그가 예법의 자구에 갇히지 않고 예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예법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밝히는 데 힘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법을 통해 개인의 정서를 충분히 담아 표현하면서도 개인의 삶, 사회적 관계, 자연의 섭리도 해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즉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치르는 상례와 제례도 궁극적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의 도리에 맞도록 행해져야 하므로 퇴계는 성현들이 세운 규범이라는 대원칙 아래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적 질서를 고려해 관습과 법령을 존중한 방안들을 제시한다. 이처럼 퇴계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예학을 충분히 소화하고,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예학에 대해 원숙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퇴계는 변례를 만들고 적용하는 데 사뭇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과 과거의 실수를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의 의견도 잘못될 수 있으므로 항상 질문자에게 더 나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직접 판단해 보라고 권한다. 퇴계의 이런 자세는 변례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고 점차 성현의 예법에 맞도록 고쳐야 한다는 그의 예학적 견해와 자신이 예법을 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는 생각에 입각한 것이지만, 퇴계 본인의 겸손하고 솔직한 성품, 을사사화와 같은 경험을 통해 얻은 퇴계 개인의 상처가 녹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제자가 발췌하고 퇴계 예학의 전문가가 보완하여 번역한 상례와 제례에 관한 447개의 대화 이러한 조심스러움에도 퇴계의 의견은 예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으로 인정받았고, 퇴계 사후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견을 중요한 길잡이로 삼았다. 사람들이 매번 퇴계의 문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글을 일일이 찾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제자 조진이 상례와 제례에 관한 글을 발췌하여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흩어진 것을 모았다는 점에서는 편리해졌지만, 여전히 이 책을 바로 읽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이 원래 편지였기에 질문자는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묻고 퇴계도 질문자가 상당히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개별 사안에 집중하여 답한다. 그래서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는 읽기 어렵다. 더구나 순서가 주제별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질문자에 따라 글이 묶여 있어서 궁금한 문제를 바로 찾을 수도 없다. 옮긴이 한재훈 교수는 퇴계 예학의 전문가로, 오래전부터 『퇴계선생상제례답문』에 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옮긴이는 이 책이 지닌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충실한 번역과 함께 맥락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주석을 달았다. 또 구별 없이 묶여 있는 내용들을 주제에 따라 447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각각 번호를 매기고, 각 조목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분류한 부록을 실어 이 책의 활용을 더 편리하게 하였다. 사람의 마음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고려하는 현대인에게 귀감이 되는 퇴계의 정신 최근 퇴계 종가에서 차례 때 상차림을 소박하게 한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처럼 형식보다는 의미와 마음을 중요시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퇴계의 정신은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관계망과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수시로 도덕적 딜레마를 겪는다. 때로는 규범들이 의미와 맥락을 잃고 너무 형식적으로만 행해진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질서가 없어 각자 너무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런 문제를 느끼고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안에 올바른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도덕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마흔두 명의 질문자들이 마주한 문제는 제각각이지만,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개인의 마음을 잘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잃지 않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동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규범을 찾는 문제는 16세기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성찰하여 삶의 도리를 찾는 퇴계의 정신은 조선 사회보다 더 복잡하고 다변하는 사회에 살며 더 쉽게 아노미에 빠지는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ㆍ 이 책은 대우재단 학술연구지원 사업 논저 부문에 선정되어 연구 및 출간 지원을 받은 저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