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그녀는 엄마가 등을 문지를 수 있도록 무릎에 이마를 붙이면서 엄마가 그 단어를 말하던 모습을 흉내내어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그게 어떤 식으로 소리가 날까 상상했다. 어떤 단어들은 어릴 때 듣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서 쉬웠다. 하지만 '토요일'은 아니었다. 한 번도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엄마는 그녀가 말을 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녀의 입술을 찰싹 때리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항상 다른 가람들과 구분되는 별도의 규칙이 적용됐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락에 있는 자신만의 비밀 장소에 올라가면 원하는 건 모두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락에서라면 그녀의 애완용 생쥐를 제외하곤 그녀의 행동을 고자질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선 트렁크 속에 들어 있는 옛날 옷들로 레이디처럼 치장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엄마처럼 티파티를 여는 흉내를 내거나,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볼 수도 있고, 또 가끔은 춤을 추기도 했다.
---pp.45~46
소리. 애니에게 있어서 '소리'란 그녀를 감싼 침묵의 벽을 뚫고 가끔씩 들려오는 지것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자제력이 부족한 어린 시절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르간에 몸을 붙인 채 그녀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동물 같은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든 지금도 그녀는 '소리'에 대한 유혹을 주체하기 힘든 것 같았다.
소리. 그것은 애니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소중한 건물이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그녀에게 그것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 p.210
말없이 그의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녀는 우뚝 멈춰섰다. 미소도 없었고,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냥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선은 망토 자락을 꼭 움켜잡은 채, 알렉스는 혹시나 그녀의 마음이 바뀐게 아닌지. 자신을 보고 실망한게 아닌지 물안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책을 떨어뜨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했다. 종이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바람에 날려갔다.
--- p. 424
달빛 아래 반짝이는 금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앞으로 기나긴 세월 동안 악몽에 등장할 그 얼굴을 발견한 순가, 그녀는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조용히 숨어 있으려던 원대한 계획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다! 얼른 달아나야만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 p.33, --pp.4-8
다음날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온 알렉스는 침대 시트를 한아름 안고 침실 문앞에 서있는 하녀와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마님께선 아직 안 일어나신 모양이지?' 이본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그러나 아직 침대 시트를 갈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예요.'
문이 살짝 열려있는 걸 보니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였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방안으로 고개를 살짝 디밀었다. 매디가 방 한가운데 서서 팔을 내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가에서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는 알렉스를 발견한 매디가 눈인사를 건넸다. '애니가 또다시 침대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매일같이 이런다니까요'
--- p.15장
누가 사랑을 환희에 찬 감정이라고 말했던가! 애니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미루어보건대, 그의 사랑은 웃음보다는 오히려 눈물을 많이 불러올 것만 같았다. 유일한 희망은 그 눈물이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 될 수 도 있다는 것뿐이었다.
--- p. 225
그는 분노로 몸을 떨며 깨끗해진 탁자 위에 가죽끈을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칼을 꺼내 마구 자르기 시작했다.
'소리 질러!'
그가 소리쳤다.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내며 울라구! 난 상관없어, 애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당신이 소리를 낸다고 벌을 주는 일은 없을거야, 절대로 당신을 벌하지 않아, 절대로!'
알렉스는 가죽끈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갈기갈기 잘라낸 다음에야 비로소 칼질을 멈췄다. 마침내 고개를 든 그는 애니가 여전히 양팔로 무릎을 감싸안은 채 한쪽 구석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숨을 참느라 빨개진 그녀의 얼굴. 눈물이 가득 고인 커다란 눈동자가 마치 잉크처럼 새파랬다.
알렉스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랑해, 애니.' 그가 거칠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 pp.264-265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살짝 부풀어 잇는 것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백마 탄 왕자로는 실격이로군. 공주가 조금 용기를 줬다고 마치 꿀을 향해 달려가는 곰처럼 거칠게 달려들다니.
--- p.353
그녀는 평생을 외롭게 침묵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평생을 말도 안 되는 규칙에 매여 살아야 했고, 그 규칙을 어길 때마다 심한 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는 바람에 관자놀이와 목덜미의 혈관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보라색으로 변한 혈관이 마구 고동치는 것 역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렉스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제임스 트림블, 그리고 그 저주받을 가죽끈. 그는 미친 듯이 다락에서 달려나가 좁고 가파른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가 다락에서 나가자마자 끔찍한 비명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불쌍한 애니. 그녀는 분명 자신이 얼마나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치 늪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움직임이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알렉스는 미친 사람처럼 서재로 뛰어들어갔다. 가죽끈, 그 망할 가죽끈을 어디다 놓아두었더라?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 p. 263
그녀가 원했던 것은 학교도, 새로운 친구도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단순하고 조그만 세상과 그녀를 존중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었다. 정상적인 삶.... 그것은 그녀의 꿈이었다. 생각과 욕구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 사랑받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주는 대신 그는 그녀를 바꿔놓으려고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데.
알렉스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침대 속에서 알을 찾던 애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입술을 꼭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속옷 리본을 풀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애니, 오르간의 한 음만 계속해서 두드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애니,....
--- p.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