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그것을 꼭 해야 하느냐에 대한 신중한 고려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윤리는 ‘해야만 한다’(ought)라는 요소를 다룬다는 점이다. 즉 윤리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과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반면 과학은 ‘이다’(is)라는 요소를 다룬다. 과학은 그저 ‘무엇은 무엇이다’를 서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 어떤 것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생명윤리학의―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의 영역이며, 그리스도인은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논쟁에 이러한 윤리적 측면을 부각시킬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과학의 영역에서 무엇이 가능하다고 할 때,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기술공학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윤리적 측면에서 조율되어야 한다. (찰스 콜슨, “서론. ‘인간 폐지’를 막을 수 있는가?”, 20쪽)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낙태가 합법화된 30여 년 전에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이 사건을 외면했던 것처럼, 우리는 또다시 도덕적 대재앙을 외면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 즉 생명공학의 최신 발전과 더불어 인간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낙태와 안락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신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인간의 생명도 만들 수 있는 신적 특권을 전유하려 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에게 던져진 가장 심오한 질문은 어떤 것이 하나님께 대적하는 더 무거운 죄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을 빼앗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형상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것인가? (찰스 콜슨, “서론. ‘인간 폐지’를 막을 수 있는가?”, 28쪽)
공상과학영화 시나리오라고 치부하기에는 더욱 실현 가능한 것이 되어 가는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식들을 설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미래의 시나리오대로 된다면, 제작자의 요구에 맞게 설계되고 솜씨 있게 만들어진 새로운 인간은 단지 다른 인간의 창조된 소유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그 인간은 자신을 만든 장인(匠人)이 지닌 품질을 절대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 생식세포 유전공학의 결과가 예측불가능하며 통제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기술은 유전적 카스트 제도(‘유전적 부유층’gene-rich 또는 형질 개선층 대 ‘정상’층)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비극적인 실패로 이끌 것이다. 아울러 자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제조자와 같은 마음자세를 갖게 되며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 붕괴되는 상황으로 이끌 것이다. (데이비드 프렌티스, “2장 생명공학 혁명”, 89~90쪽)
유전자 요법은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쓰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개선된 목적 또는 설계된 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좀더 예측가능하고 좀더 안전한 유전자 요법이 가능하다면, 부모들은 시험관 수정을 통해 이식 전 배아에 머리카락 색깔, 눈 색깔, 키 그리고 다른 신체적 특징을 가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함 유전자는 제거되고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는 유전자로 대체될 것이다. 우수한 지능, 우수한 운동 능력이나 미모를 갖게 할 수 있는 유전자가 삽입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신들과 다른 인종의 아이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유전자 조절을 통해 배아의 성별도 바꿀 수 있고, 더 나아가 최근 한 과학자가 시도한,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인 배아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배아의 소유권자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소유권자들이 ‘완전’하다고 계획한 바대로 배아가 조작될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아이는 성인으로 성장하여 ‘완전’한 배우자를 만나, 한결 더 ‘완전’한 아이들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인류는 개량된 인종과 개량되지 않은 인종으로 이분화될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데이비드 스티븐스, “5장 약속과 위험”,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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