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주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전과는 다르게 이 표현의 생경함에 붙들렸던 까닭은 그때까지도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익히 알던 세계의 많은 부분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왜곡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어서였으리라. 아버지는 분명 소풍을 간 아이처럼 멀어진 것도, 난장판인 사무실에서 사라진 중요한 서류처럼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한데 이 표현은 죽음을 에둘러 말하는 여느 말들과는 달리 면피한다거나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슬픔 그 자체처럼 단순하고, 애달프고, 쓸쓸하게 들렸다.
--- p.14~15
잃어버린 결혼반지 하나 때문에 동네 공원의 소박한 지형도가 로키산맥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이킹을 하다가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평화로운 개울과 숲이 무시무시한 황무지로 돌변하기도 한다. (상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경외와 비탄처럼, 상실은 주변 환경과 우리의 크기를 단번에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작아지고 이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광활해진다.
--- p.34
발견은 본질적으로 여섯 살 난 아이의 마음 그대로 땅에서 동전 한 닢을 찾아내던 순간을 꼭 닮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그렇게 밝게 빛날 때, 그러니까 중고품 가게의 잡동사니 장식품이나 눈부신 아이디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빛날 때, 장차 결혼하게 될 여자가 눈을 사로잡을 때, 그것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이다.
--- p.114
그녀는 정오에 출발했다. 한데 내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슬쩍 꺼내 내 눈길이 반드시 닿을 만한 곳에 보란 듯이 고른 페이지를 펼쳐놓고 간 거였다. 얼마 후 나는 시집을 보게 되었고, 그러자 갓 불을 붙인 촛불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 p.151
아버지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는 삶의 새로운 조건이 그저 나를 좌절케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너무 짜증 나.” 어느 날에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전적으로 사실이었지만 실은 이렇게 말하려던 거였다. “핸드폰이 꺼져서 너무 짜증 나.”
--- p.89~90
우리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상실하지만, 그 비율은 시간에 따라 고르게 나타나지 않고, 상실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게, 더욱 파괴적인 내밀함으로 충격을 가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직면하는 어려움의 유형이 달라진다.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가 결국 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
--- p.290~291
애도의 이야기 구조가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듯, 사랑 이야기는 모두 발견의 연대기이며 특별한 발견의 개인적 역사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큰 상실들과 작은 상실들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누군가에게 빠져들면서 사랑을 발견하는 일과 대상이 무엇이건 여하간 더 넓은 범위의 발견이라는 행위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p.112
코스타리카에서 맞이한 그날, 우리의 허기와 고갈과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평범한 욕구는 선글라스가 나타나면서 신속히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를 놀라움과 고마움, 경이로움, 경외감처럼 완전히 다른 감정들이 대체했다. 이런 감정들, 우연하고 놀라운 발견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감정들은 전체로서의 우주가 야기하는 감정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 역시 같다. 삶이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았고, 특별히 받아 마땅하지도 않은 어떤 근사한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 p.122
말하자면 연애 상대를 찾아 나서는 모험은 메논의 첫 번째 질문과 더불어 두 번째 질문을 불러낸다. 상대를 어떻게 찾을까 하는 문제뿐 아니라, 찾았을 때 내가 찾던 그 사람인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이미 안다면 특별히 신비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서로에게 속한다고 느낀다. 이럴 때 사랑은 노출된 필름 사진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다른 경우, 더 이상한 경우라면 사랑은 섬광처럼 출현한다. 사랑에 관한 온갖 불가사의(그 기원, 목적, 사랑의 주체인 우리 스스로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이상하고 독재적인 선별 과정) 중에서 아마도 이 점이 가장 곤혹스러울 것이다. 때로 우리는 찾았다, 하고 즉시 알아차리는 것 같다. 찾던 것과 하나도 닮지 않은 걸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우리가 그간 찾고 있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을 때조차도.
--- p.145
사랑에 빠진다는 건 정보를 갈망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단테처럼 자신의 감정을 상대가 모른다면 먼 거리에서 온갖 세세한 정보들을 어렵사리 구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이의 몸과 마음, 정신, 습관, 집을 포함한 전부에 대해 포괄적이고 사적인 탐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철저함과 탐욕 면에서, 상대를 알고 싶은 갈급함은 전형적으로 지식에 대한 갈망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에 대한 갈망은, 그것이 육체적이건 감정적이건 지적이건 실존적이건, 언제나 ‘더 많이’ 요구한다.
--- p.162
대체로 나는 놀라움 쪽이 좋다. 나는 연못처럼 단순한 대상조차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수목원에서의 그날,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달았다. 가차 없는 상실에 직면했을 때 우리를 가장 잘 대접하는 건 슬픔이나 묵인이 아니라 주목이라는 사실을. 최소한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바꾸는 세계는 우리의 소유이고, 그걸로 됐다.
--- p.298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과 이미 사라진 것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 p.300~301
어떤 유형이건, 애도하는 이는 나이가 들어버린다. 부분적으로는 탈진했기 때문이지만, 주된 이유는 필연적인 죽음과의 대립 때문이다. 늙어버렸다는 기분(실제로 나이 든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은 남아 있는 날들과 남아 있는 즐거움이 줄어들고 있다는 기분이다. 부모에 대한 애도 역시도 우리를 나이 들게 하는데, 생애주기 전체를 앞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상실하고 나서 우리 세대의 행진에서 한 단계 앞선 기분이었다.
--- p.76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애도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사람들이 애도의 이런 측면에 대해 더 자주 말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애도의 초반에는 그렇지 않다. 슬픔이 너무나 강렬하고, 일상을 전반적으로 대정비하는 일이 지루함 따위를 허락하기에는 너무 초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애도에 익숙해지면서 단조로움이 들어선다.
--- p.87
애도는 마치 내 영향을 벗어난 힘, 순전히 야생적인 힘, 퓨마나 폭풍처럼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힘처럼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는 압도적이었고, 가끔은 두려울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약간 멀어지면 매혹적이었다. 단어가 지닌 오래된 의미처럼 강인하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금 사라지면, 그 예측 불가한 등장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길어지면, 나는 비뚤어진 사람처럼 애도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는 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은 애도를 그만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랬다.
--- p.93
그토록 슬픈 일이 정상적이고 필연적인 이치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상실의 여파에 남겨진 각자의 삶은 그토록 많은 상심을 담기에 너무 짧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역사를 좋아했는데, 내가 그 침묵과 신비조차 늘 사랑했던 역사가 돌연 서사적 스케일로 기록된 상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특히 기록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부분이 그러했다. 세계 자체가 덧없게만 보였고, 빙하며 생물 종이며 생태계가 마냥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고, 변화의 보폭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이라는 고통스러운 관점으로만 지켜보도록 허락된 것처럼, 저속 촬영한 것처럼 급속도로 느껴졌다. 하나같이 전부 위태롭고 유약하게만 보였다.
--- p.18
그녀 옆에는 커피 한 잔이, 앞에는 리갈패드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선 채로 창밖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 주방에서 그녀와 함께한 세상은 마법에 걸린 것 같았고, 그 빛나는 한밤중의 즐거움은 거의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내가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그 장면의 생생한 평범함이었다. 그녀가 바로 여기서, 내 집에서 일상을 이어가려고, 내 삶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다음 날 그녀가 일이 있어 맨해튼에 갔을 때, 나는 언니에게 전화해서 결혼할 여자를 만났다고 말했다.
--- p.169
나는 그녀의 진중한 갈색 눈동자가 눈부신 햇빛을 받으면 녹색으로 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녹갈색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마법이다.’라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그녀를 마법의 눈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집에서 커피를 끓이기보다 시내로 나가 마시기로 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집 앞 낮은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날 밤 서로를 만지던 손과는 전율이 일 정도로 다르게 다가오는, 더 순수하지만 훨씬 결정적인 손이었다. 밤새 나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가면서 상대의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p.150~151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촛불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이 세계는 우리의 웃음과 숨, 그리고 슬픔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지만. 난로가 발하는 불빛을 받은 C는 플랑드르 회화 속 인물처럼 보였다. 어둠과 대비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내 주머니에는 여섯 달 전까지 아버지 손에 끼워졌던 결혼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 역시 죽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C에게 사랑한다고,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고, 결혼하자고 말하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49년, 77년, 아니, 바라건대 1099년간 결혼 생활을 해보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았다.
--- p.256~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