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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대중, 그들이 만든 세상

: 국제부 기자가 본 한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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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708쪽 | 152*225*40mm
ISBN13 9791197821004
ISBN10 11978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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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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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던 해, 박정희는 28살, 김대중은 21살이었다. 박정희는 해방된 조국에서도 군인이었고, 김대중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청년 사업가였다. 두 사람 모두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보냈기에 개인적 취향이나 가치관, 정치 현안이나 사회 문제를 보는 시각 또 그 뒤의 삶에 있어서까지 알게 모르게 일제 (日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의 4·19혁명은 모든 분야에서 각성의 계기가 된다.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팽창한 군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 내부 역시 혼란했고 부패 또한 심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군에 대한 외부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4·19혁명 이후 젊은 장교들은 정군(整軍)운동을 이어간다. 김종필(金鍾泌), 김형욱(金炯旭), 길재호(吉在號) 등 육사 8기(3~6개월 교육, 49년 5월 임관) 영관급 장교들은, 부정선거에 협조하고 부패한 군 수뇌부의 퇴진과 숙정(肅正: 부정을 엄격히 다스려 바로잡음)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이들은 ‘그렇다면 군 내부의 부패도 문제지만, 나라의 발전이 이렇게 정체돼서야 희망이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혁명(革命)을 해서 나라를 싹 바꿔버리자’고 결의한다(1960.9.10). 연수를 통해 미국과 한국의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경험한 장교들은 마음이 급했다. 나라를 빨리 전진할 수 있도록 바꿔야 했다. 박정희 소장은 강직하고 청렴한 장군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 「군인 박정희」 중에서

김대중은 당시 사업이 번창해 목포에서 지프(Jeep)를 타고 다니는 몇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1·4후퇴로 정부가 부산에 꾸려지자, 김대중도 사업 무대를 부산으로 옮긴다. 나라는 전쟁 중이었지만, 김대중은 나름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고,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 김대중으로서는 네 번째 낙선이다. 그는 54년(3대 총선, 목포), 58년(4대 총선, 인제), 59년(보궐선거, 인제), 60년(5대 총선, 인제) 계속해서 낙선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장면 총리의 신임을 받던 김대중은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1960.9)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도 차츰 안정을 찾아간다. 시위가 줄어들면서 사회도 조용해지고 현안인 한일회담과 경제개발 계획 등을 챙기면서 장면 총리의 미국 방문도 검토한다. 1961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김대중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인제군에서 59년 보궐선거와 60년 5대 총선에서 김대중을 연거푸 이기고 국회에 진출했던 경찰서장 출신의 자유당 소속 당선자(전형산)가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피선거권 몰수로 낙선 처리된다. 김대중은 민주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이번에는 당선된다(5.13). 네 번 떨어지고 다섯 번째의 당선, 삼전사기(三顚四起, 세 번 넘어지고 네 번 일어난다)를 뛰어넘는 ‘사전오기’였다. 정치에 입문한 지 7년, 37살이었다. 14일 인제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민의원[국회의원] 당선증을 받고 김대중은 슬펐다. 슬픈 정도가 아니라, 통곡했다.
--- 「당선 그러나 쿠데타」 중에서

박정희의 길은 5·16으로 시작됐지만, 김대중의 길은 5·16으로 꺾이게 된다. 조국 근대화의 전기를 만든다는 군부의 거사는 ‘의도치 않게’ 김대중 개인의 불운(不運)으로 이어진다. 박정희는 이를 ‘안타깝고 미안하다’고 술회했다. 앞서 본 5월 17일 자 경향신문도 제목에서 쿠데타(Coup d’tat)라고 했지만, 5·16의 호칭은 상당 기간 쿠데타, 군사혁명(革命), 군사정변(政變) 사이를 오갔다. 사전을 찾아보면 그 말이 그 말이지만, 군사정부에서는 ‘쿠데타’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싫어했다. 자신들은 무력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한 쿠데타군이 아니고 나라 전체를 개조하는 세력, 혁명 세력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발생한 쿠데타 소식에 미국은 아연 긴장한다. 미국 정보 관계자들은 한국군의 동향 특히 쿠데타 가능성을 예상하고 거론되는 장교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박정희도 물론 포함돼 있었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 대대(大隊) 단위 부대까지 고문단을 파견하고 있었다.
--- 「5월 16일의 쿠데타」 중에서

결혼 열흘 뒤(5.20), 김대중은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다. 5·16 쿠데타 이후 발생했던 10여 건의 반혁명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과거 집권당인 민주당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국의 발표처럼 ‘어마어마한 반국가 사건’은 아니었으나 눈길을 끄는 사건임은 틀림없다.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은 “구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5·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빼앗긴 데 분노해, 정치계는 물론 군인들까지 포섭해 군사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고 발표한다. 소위 「이주당 반혁명사건」이다. 이들 반혁명 분자는 “61년 11월 서울 효창공원에서 만나 모의를 한 끝에, 6월 13일을 기해 무력 쿠데타를 일으키고 간단한 과도정부 기간을 거쳐 8월 15일 민정이양을 한다”는 음모를 꾸몄다고 발표됐다. 그런데 반혁명 분자들의 거사 본부가 효창운동장이라니? 발표되는 내용은 상당히 빈약하고 어설프다. 이 사건으로 김상돈(전 서울시장), 조중서(민주당 조직부장), 김대중(민주당 대변인), 김인측(CIC 대령), 이성렬(백의사) 등 41명이 구속됐고, 장면 전 총리도 배후 인물로 지목돼 불구속기소 된다. 당시 언론은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가 관련됐다고 해 크게 보도했다. 김대중은 구속돼 한 달 동안 조사를 받았으나, 기소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 관련자들도 대부분 무죄로 석방됐다. 쿠데타로 졸지에 정치 낭인이 된 사람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을 쏟아냈겠지만, 불과 1년 전 쿠데타에 성공하고 군사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시킨 군부를 뒤엎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텐데도, 당국은 그렇게 발표했다. 세월이 수상했다. 김대중은 “정보정치로 숨통을 조이던 당시 분위기로 보아서 이런 모의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했다”고 회고했다.
--- 「이주당(貳主黨) 사건」 중에서

위기에서 기회를 보면 기업가, 어려움을 보면 전문가라고 했다. 이 말을 인정한다면 쿠데타 주도 세력은 전문가보다는 기업가에 가까웠다. 혁명 공약에서 밝혔듯이 이들은 수천 년 내려온 가난을 끊어 내고,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행동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실권을 잡자마자 바로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을 신설하고(61.7.2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당시 박정희는 나라 살림의 실상을 파악하고는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했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 「답답한 현실」 중에서

이듬해에도(1969) 북한의 도발은 이어졌지만, 대통령은 ‘본인과 조국의 미래’와 관련해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해야 했다. 바로 3선 개헌이다. 3선 개헌은 1967년과 1971년을 잇는 징검다리였다.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출마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3선 출마가 가능하도록 헌법 개정이 이뤄져야 하고, 그 개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화당이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5월 대선(제6대)이 끝나고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는 여·야 간에 ‘개헌 대 반(反)개헌’ 전선이 형성되면서 아주 치열하게 전개된다, 신민당은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며 공세를 계속했다.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도 이 문제를 제기한다.
--- 「드디어 3선 개헌」 중에서

시간이 바쁘게 지나갔다. 68년 69년은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한껏 고조됐던 시기였고, 70년 71년은 대통령 선거로 서로 바빴다. 김대중은 야당의 다크호스로 강력한 도전자였다. 72년은 유신이 선포됐고, 김대중은 도쿄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반(反)유신 활동을 이어갔다. 73년 한국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한낮 도쿄 도심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서울로 데려온다(8.8~8.13). 서울로 돌아온 뒤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지난 67년 대선에서의 지원 연설과 71년 대선의 사전 선거운동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또 「3·1민주구국선언」(1976)을 주도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이 확정된다(77.3). 이듬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으나, 또다시 가택연금 상태로 감시받는 생활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통 만날 일이 없었다. 달라도 아주 다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 지난 1979년 여름, 유신정권이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국민도 정권도 함께 신음하고 있었다.
--- 「79년 여름, 마지막 기회」 중에서

69년으로 접어 들면서 3선 개헌 문제가 현안이 된다. 야당도 반대 투쟁의 강도를 높인다. 여당도 야당도 힘의 바탕은 국민이다. 이 원칙에 충실하면 민주주의, 반대면 독재 정치다. 신민당은 재야와 힘을 합쳐 「3선 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69.6.5). 전국 각 대학에서도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이어진다. 야권은 전국을 돌며 크고 작은 집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야당의 주요 연사는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젊은 의원들이었다. 69년 7월 3선 개헌반대시국대연설회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거의 대선급 열기였다. 연사로 나선 김대중은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모습을 ‘사람의 바다에 내가 떠
있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 「40대 기수」 중에서

사실 권력에 대한 박정희의 집념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용어로, 그가 만주로 올라갈 때 이미 증명이 됐다. 젊은 시절의 만주행(滿洲行)도 만주행이지만, 단적으로 권력의지가 없는 사람이 생사를 걸고 쿠데타를 하겠는가? 박정희도 애초 쿠데타를 결심한 동기가 “나라를 이대로 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 수천 년 내려온 가난 때문에 수많은 국민이 굶고 있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정치를 바꿔야 한다”에서 출발했다. 젊은 김대중이 정치를 결심한 계기도 “6·25 남침을 당해 정부가 부산까지 쫓겨 왔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정치인을 보고, 정치만 제대로 돌아가면 나라도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 「박정희의 권력의지」 중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를 일본에서 맞았다. 그는 한 해 전(71.5.24)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股關節)을 치료하기 위해, 10월 11일 도쿄에 도착해 치료와 관련한 일정을 거의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국회 주변에서는 정부 여당이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언제 어떤 내용이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17일 저녁에 발표된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은 충격이었다. 1년 전 대선 유세 과정에서 김대중은 “만약 이번에도 정권교체에 실패하면 박 정권하에서 우리 손에 의한, 국민 직접투표에 의한 정권교체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한 예언이 불행히도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 「일본에서 맞이한 유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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