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유의 역사는 주로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정의하고 설명하고 증명하는 역사였다. 있음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어떠한 예외도 없이, 부여된 내적 질서 안에서 정합적으로 맞물려 정확하게 한계지어질 수 있어야 했다. (…) 철학(philo-sophia)이 어원 그대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래서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철학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면, 비록 개념적 앎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지혜라는 큰 범주에서 ‘삶’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닌 ‘현재’를, 절대적 ‘있음’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실존적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 p.4~5
“‘타자’는 ‘나’와의 ‘거리’를 형성하고, ‘거리’를 통해 생성된 타자와의 ‘간격’은 관계의 지평선을 한계지음 저 너머 무한으로 이끄는 ‘간격’으로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한계지어짐 없이 흐르게 한다.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를 ‘친밀함(l’in-time)’이라고 한다. ‘친밀함’은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타자가 존재하고, 그러한 나의 타자와 마주 보며 존재를 함께 내밀하게 ‘나누는’ 것이다.”
--- p.16
“‘친밀함’을 나누는 사랑은, 지향하는 대상으로서의 사랑이나 이것의 또 다른 단면일 뿐인 맹목적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닌, 그리하여 맹세하고 이벤트하고 찬양함으로써 지향했던 대상을 ‘이루어 내는 사랑’이나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증명해 내는 사랑’이 아닌, 점차 서로 적셔지며 관계의 ‘사이’에서 현재가 펼쳐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이는 첫 번째의 ‘소란스러운 사랑(l’amour bruyant)’이 아닌, 은근히 ‘스며드는 사랑’이며, 한계가 분명한 첫사랑 다음의, 다른 차원에서 한계지어짐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두 번째 사랑이며, 그러기에 ‘지치지 않는 사랑(l’amour qui ne se lasse pas)’이다.”
--- p.18
“나와 타자, 각자의 타자성을 유지하되, 서로를 끊임없이 만나고 바라보면서, 함께 나누지만, 이를 원동력으로 또 각각 자신의 고유함과 개별성을 발전해 나감에 그 바탕이 있다.”
--- p.56
“단번의 의지적 선언과 돌연한 실천이 아닌, ‘경험’이 이어지고 축적되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개혁이 이뤄져 밝아지게 되면서, 어느 순간 지체함 없이 다음의 삶, 즉 ‘두 번째 삶’으로서의 윤리적 선택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실존’, 즉 세상이 부여한 한계, 그 벽으로부터 밖에 있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유로운 삶이다. 매일, 다음의 날을 맞이함은 반복되는 어제가 아닌, 새롭게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는 늘 ‘두 번째’인 오늘인 까닭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 p.176
“프랑수아 줄리앙의 작업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중국의 사유를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타자인 유럽의 사유와 함께 고찰함으로써, 우리가 갇혀 있던 사유의 한계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익숙해진 중국 사유를 낯설게 해보고 새롭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사유의 한계지음에서 벗어나 사유해 보지 않았던 것, 사유의 주름에 대해 성찰해 보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작업에 대자적으로 함께 동참할 수 있다. 사유의 ‘마주 봄’은 한쪽만 주체로 정립되지 않고, 다른 쪽도 함께, 즉 대상이 아닌 동일한 주체로서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기존의 사유의 틀에서 나와 보기도, 다시 새롭게 묶이기도 하는, 즉 사유를 우회하고 회귀하는 그의 작업과 함께하면서 사유의 한계지음 저 너머 ‘실존’하는, 진정한 의미의 ‘밖에 있는 존재(l’existence)’로 거듭날 수 있다.”
--- p.170
‘프랑수아 줄리앙의 글쓰기는 안의 언어에서 밖의 사유를 드러낸다’ - 폴 리꾀르
“번역 가능함의 바탕에는 패러독스가 있습니다 : 한편에서는, 한나 아렌트가 자주 말하는, 복수의 언어들, 복수의 종교들, 복수의 문화들이 있는, 예외 없는 인간의 복수성입니다. 다른 편에서는, 상인들, 사절들, 첩자들, 직업적인 또는 현장을 누비는 번역가들이 항상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항상 번역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유들의 사유 가능함이 전혀 다르다면, 어떻게 번역이 가능할까요? 번역 가능함은 무엇입니까? (…) 전제되어 있는 것은, 모든 독자는 자신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이고, 언어 사이에 있는 간격(decalage)을 이용해 또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고백하건대, 밖으로부터의 해체는 해체를 따르는 무엇인가를 가정하기보다는, 소중하게 정복되면서 언어에 대한 환대로 나아가는, 언어의 성찰적인 면을 따르는 무엇인가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이러한 번역의 패러다임에 대해 성찰하고 썼는지 묻습니다. 『토론』이라는 집약적인 그의 책에서 나는 ‘간격의 작업’이라는 이와 가까운 개념을 (…) 찾을 수 있습니다.”
--- p.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