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다시피 지구가 위치한 제44 은하계는 생명 개체수가 희소하며 경제적, 문화적 가치가 적어 비교적 뒤떨어진 지역으로, 최근 교류를 시작한 몇몇 은하계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우주 지성체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 은하계의 유일한 생명활동이 있는 행성인 지구는,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즉 우주 지도에 조그맣게 표시는 되어있지만 굳이 가볼 생각을 하기 어려운 작은 무인도 같은 별이었다.
그런 제44 은하계에, 지구에, 그것도 봉천동 구석에 갑자기 우주 환승터미널이 생기게 된 것은 순전히 제38 은하계 내에 있던 블랙홀 하나가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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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터미널 이용객 몇 분의 민원이 있었습니다. 가게 주인이랑 말이 안 통한다고요. 좀 더 알아보니, 여기가 현지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교통공사 측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더군요.”
“외계인들이 돈을 안 내고 이상한 물건만 잔뜩 놓고 갔어!”
원동웅 씨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카운터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가리켰다.
“아…… 그거 돈 맞아요. 교통공사에서 주기적으로 환전 처리를 해줄 겁니다. 그것도 공지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리고 외계인이라는 용어는 멸칭이라, 웬만하면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아마 모르셔서 그런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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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처 직원은 의자에 등을 탁 기대고 눕다시피 하더니, 원동웅 씨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 제44 은하계에서 온 외계인인가?”
“외계…… 뭐? 지금 외계인이라고 한 거야?”
“44 은하계에서 왔다면서? 그럼 외계인이지.”
“맞긴 한데…….”
원동웅 씨는 가게를 시작한 첫날, 가게를 찾은 손님들을 서슴없이 외계인이라 부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38 은하계를 대상으로 한 장사에 익숙해지며, 외계인이라는 단어는 점차 손님이나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손님들이 자신을 아저씨니, 사장님이니, 친구니 하는데 저 혼자만 외계인, 외계인, 하고 부르는 것도 민망했던 것이다. ‘외계인’이 멸칭이라는 지적도 여러 번 받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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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웅 씨는 버드나무 씨앗 같기도 하고, 민들레 같기도 한 그 꽃을 다시 꾸러미에 싸서 넣다가, 칭칭 싸맨 손님이 대고 있던 수건이 푸른빛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나도 평범하진 않지만, 당신네 은하계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 일단 그 외투 좀 벗어봐요. 피가 이렇게 나는데. 이거 피 맞죠, 피?”
원동웅 씨가 구급 상자를 다시 열었다. 칭칭 싸맨 손님은 원동웅 씨가 천을 풀려고 하자 몸을 휙 돌려버렸다. 원동웅 씨가 소리쳤다.
“고집 그만 부리고 빨리 천 풀어봐요! 이놈의 천, 이놈의 천! 맨날 그렇게 수상하게 칭칭 싸매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녀! 그 차표 손님도, 경찰들도 바로 알아보잖아. 평범하게 좀 입고 다녀. 주변 사람들이랑 똑같이 꾸미고 다니면, 떠돌인지 DP인지 그놈들이 알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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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같이 쓰면 어떻겠습니까?”
기자 손님의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 땅콩을 사러 온 정장 손님이었다. 정장 손님은 놓여있던 연필을 집어 들고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자 손님의 것과는 달리, 정갈한 글씨체였다. 기자 손님이 글씨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오, 이냅스어를 할 줄 아시는가?”
“네. 대사 일을 하다 보니, 몇 가지는 대강이라도 알게 되더군요.”
원동웅 씨는 구불구불한 글씨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다, ‘구멍가게’라고 적힌 거라는 거지?”
“동웅…… 제발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말게. 우리한테는 뭔가 다른 단어로 전달되는 것 같은데……. 뭐랄까, 매우 이상하게 들리네.”
“다 외행성 쪽 언어라는 것이 좀 걸리는군요. 내행성 쪽은 필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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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웅 씨가 종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자 손님과 정장 손님 이후로도 몇몇 손님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구멍가게’라고 적어두고 간 종이였다. 원동웅 씨는 그 낯설기 짝이 없는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번역기 없이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글들. 통역기 없이는 영영 대화할 수 없을 사람들. 낯선 제38 은하계 이방인들이 드나드는 이 터미널 속에서 그의 가게는, 다시 말해 그의 삶은 어느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 우주 저 너머에서 온 진정한 이방인들의 틈은 차라리 고향 같았다.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원동웅 씨는 이곳이 좋았다. 영원히 머무르고 싶을 만큼. 그럼에도 곧 떼어내기로 마음먹은 오래된 한글 간판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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