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여 년 전 동아시아의 장자는 단순히 중국의 철학자들 중 한 명도, 혹은 제자백가 중 한 명도 아니었습니다. (…) 그는 우리가 인생 전체를 갈아 넣어 얻으려 하는 삶의 가치들이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유해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 통용되는 가치들, 우리가 목매는 가치들은 모두 ‘당근과 채찍’ 논리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통찰입니다.
--- p.5~6, 「책을 펴내며」 중에서
인재, 즉 체제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격렬히 거부하자는 것!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자는 것! 크게는 국가나 사회, 작게는 회사나 가정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쿨하게 떠나자는 것! 2,500년 전도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도 『장자』가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는 이유, 체제를 위한 교재가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책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14, 「프롤로그」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쓸모를 기준으로 무언가를 평가하곤 합니다. 저만 해도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그거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라는 말이었습니다. (…) 2,500여 년 전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BC 22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아니면 국가든 생존과 경쟁이 최고의 화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은 상징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까? 이 논리는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죠. 어떻게 하면 개인은 부유하고 강해질 수 있는가?
--- p.27~28, 「철학을 위한 찬가 - 황천 이야기」 중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배를 얻어 타고 황하를 건넌다고 해볼까요. 이때 다른 배가 잘못해서 이 배에 부딪히면, 배 주인과 배를 얻어 탄 사람 중 누가 더 화를 낼까요? 아마도 ‘내 배야’라는 의식을 가진 배 주인일 겁니다. 층간 소음이 발생한 경우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집이어도 월세로 사는 사람과 자기 집인 사람 중 누가 층간 소음에 민감할까요?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면 집 소유자가 더 민감할 가능성이 클 겁니다. (…) 이는 모두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설명한다는, 달리 말해 나는 내가 가진 것이고 내가 가진 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해묵은 편견과 관련됩니다.
--- p.56, 「소요하라! 당신의 삶을 - 빈 배 이야기」 중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작게 만들어 협소한 세계에 적응할 것인가. (…) 그래서 바람이 중요한 겁니다. 바람은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상징, 협소한 세계 밖에는 타자가 있다는 상징이니까요. 곤은 바람을 통해 더 큰 세계를 꿈꾸었고, 붕은 바람을 타고 더 큰 세계로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큼에 어울리는 세계를 선택하려는 겁니다.
--- p.73~7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 대붕 이야기」 중에서
장자는 심각한 그들 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말합니다. 당신들은 세계가 둥그런 원기둥이라고, 그래서 밀리면 추락해 죽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파국을 미리 예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 아니냐고. 장자는 미소와 함께 희망을 말합니다. 원기둥 가장자리는 절벽이 아니고, 그 바깥도 낭떠러지도 아니라고. 자신이 서 있는 육지에서 보면 저 먼 바다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직접 가보면 절벽이나 낭떠러지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 p.119,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 손 약 이야기」 중에서
타자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혹은 타자와 ‘같이하면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삶도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육체 노동자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타인이든, 소이든, 나무이든, 물고기든, 철이든 티타늄이든, 혹은 땅이든 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죠. 반면 상명하복에 포획된 정신노동은 삶의 세계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기 어렵습니다.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 p.134, 「타자와 함께 춤을 - 포정 이야기」 중에서
바람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바람 소리가 났다고 하면 그 소리에는 ‘어떤 구멍’과 ‘어떤 바람’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이 마주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구멍의 모양새는 다양하고, 바람도 그 속도와 방향에 따라 복수적입니다. 구멍의 모양에 따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각자 고유한 바람 소리를 냅니다.
--- p.151, 「텅 빈 하늘의 바람 소리 - 바람 이야기」 중에서
장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타자’와 ‘문맥’일 겁니다. 물론 장자가 이 키워드를 개념화해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두 키워드가 개념으로 주제화된 것은 20세 후반기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이 『장자』라는 이야기책이 아직도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이미 2,500여 년 전 장자는 현대 서양 철학자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타자와 문맥을 숙고하니까요.
--- p.189, 「선과 악을 넘어서 - 위악 이야기」 중에서
전국시대에 중국 대륙에서도 문명으로 치장한 야만이 거부할 수 없는 추세로 심화하고 팽창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철학자가 탄생합니다. 바로 장자였습니다. (…) 장자는 짧지만 강렬한 사생 이야기를 통해 가축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 상벌로 길들여지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간, 야생마나 늑대만큼 자유를 향유하는 인간을 꿈꾸었습니다.
--- p.223,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 - 사생 이야기」 중에서
성심은 ‘이루어진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 정착민적 마음, 즉 성심은 내 집, 내 땅, 나아가 내 것이라는 강력한 소유욕과 함께합니다. 반면 유목민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 성심이 없다면 시비도 없다는 통찰, 혹은 정착생활이 시비를 낳는다는 통찰입니다.
--- p.279~286, 「광막지야에서 장자가 본 것 - 성심 이야기」 중에서
이제야 장자의 마지막 충고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이것에 따를 뿐이다(無適焉, 因是已)”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느껴지는 그 충만한 상황,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다”고 느껴지는 그 애절한 상황, 그리고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경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말고, 이런 상황에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 p.314, 「바로 여기다, 더 나아가지 말라! - 하나 이야기」 중에서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고 타인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의지, 혹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을 업겠다는 사랑에의 의지는 “흐트러지지 않은” 열자의 원칙입니다. (…) 한결같다는 말, 마음을 비운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면, 열자는 이렇게 산 것입니다.
--- p.355~357, 「열자는 이렇게 살았다! - 열자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