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 개의 데생을 작업중이네. <흙탕>, <모래사장>, <쓰레기 하치장>, <석탄 싣기>가 그것이지.
테레빈유와 인쇄용 잉크는 감히 많이 쓰지를 못했네. 아직까지는 목탄, 석판화용 크레용, 원지 석판용 잉크만을 사용할 뿐이지. 예외적으로 <쓰레기 하치장>의 크로키작업 때만 테레빈유와 인쇄용 잉크를 썼는데,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군.
자네를 방문한 뒤 줄곧 고되게 작업했네. 오랫동안 습작에서는 손을 뗀 상태였지만 다시 시작하자마자 열정이 타오르더군. 며칠 동안 잇달아 새벽 네 시에 작업을 시작했지. 자네가 그 데생들을 봐준다면 얼마나 좋을지!
……
자연을 마주하는 작업에 많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네. 처음보다는 훨씬 더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할 수도 있게 되었지. 이제는 자연 앞에서 현기증을 덜 느낄 뿐 아니라 좀더 나 자신일 수가 있네. 운 좋게도, 이미 안면 있는 차분하고 이해심 많은 모델과 작업하는 날이면 나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같은 모델을 데생하지. 그리고 그렇게 그린 모든 습작품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느낌이 있는 하나를 선택하네. 물론, 선택된 작품도 더 서투르고 느낌이 덜 오는 다른 작품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지.
내 작품 <겨울 정원>을 보게나. 자네도 느낌이 온다고 말했지? 좋네. 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얻어진 결과가 아니네. 나는 그 작품을 여러 차례 데생했었네. 초기의 데생들에는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았네. 마치 철처럼 거칠었지. 그런 초기 데생들을 거친 다음에야 나는 자네가 본 그 작품을 완성했네.
---본문 중에서
답장 받았네. 고맙네. 이따금 자네의 작품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간혹 친구들 중 누군가가 내가 일하는 아틀리에를 한 번쯤 돌아봐주기를 바란 적은 있지만, 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네. 사실, 친구들이 찾아오는 일조차도 매우 드물긴 하지.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결코 내 작품들을 보러 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는 않네. 앞으로도 물론.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작업은 역시 소리 없이 이루어져야 하네. 세상에서 가장 부럽지 않은 것, 그건 바로 어떤 형태의 대중적인 인기라고 생각하네.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따뜻한 연민과 애정을 가져야만 하네. 그렇지 않으면 자네의 데생들은 항상 차갑고 무기력함을 면치 못할 걸세. 늘 자신을 감시하고 환멸을 멀리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네. 뿐만 아니라. 화가들 사이에서 조성되는 일종의 간계에 휩쓸리는 일은 그다지 이로워 보이지 않네. 그들의 간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방어 자세를 취해야만 하네.
사람들 중에는 예술가 무리와 자주 접촉함으로써 활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네. 그러나, 아마도 토머스 켐피스가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을 걸세. "인간들 속에 있을 떄 나는 늘 내가 덜 인간적이라고 느낀다."
---pp.8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