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에도 일부 예술가들이 과학 기술을 예술의 소재, 대상, 매체로 사용했지만, 예술과 과학 기술이 확연하게 다시 가까워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20세기 예술은 대상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제약에서도 해방되었다. 즉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실험에 필수 요소로 도입되곤 했는데, 파블로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제창할 때 4차원 시공간에 대한 논의에 기댔다거나, 마르셀 뒤샹이 화학 실험실을 차려 놓고 새로운 재료와 개념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예술과 접목한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예술가들은 사진, TV, 비디오, 인터넷, 무선전화 등의 통신 기술을 예술의 매체로 사용했고, 강철, 합금, 플라스틱, 유전자 조합법 같은 과학 기술적 산물이나 방법을 예술과 접목시켰다. 지금은 첨단 기술인 인공지능도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 작업에 사용되거나, 예술 작업을 대체하고 있다.
백남준도 기술을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1960년대를 거치며 TV와 비디오를 이용한 예술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총천연색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합성하고, 매 순간 이미지들을 변형시켜서 TV를 통해 내보내는 형태를 취한 것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비디오아트를 위해 1970년 비디오 합성기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해 TV 방송으로 4시간짜리 비디오아트를 송출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1980년대에 위성을 사용해서 지구 반대편의 방송을 하나로 잇는 새로운 예술도 시도했다. 백남준에게 예술과 기술은 그의 활동 속에서 통합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기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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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예술 세계에 미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1958년에 만난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로부터 나왔다. 백남준은 케이지의 소리 콜라주에 매료되었고, 나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1958년에 케이지를 만난 이후 자신의 예술 세계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고백했다. 그는 케이지와 가깝게 지내면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같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고, 1960년에 열린 한 공연에서는 관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지에게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자신이 그의 예술에 빚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백남준은 훗날 케이지의 [4’ 33”] 같은 ‘침묵 음악’이 단순히 관객의 (소음, 기침, 부스럭거리는 소리 등) 참여를 통해 음악을 구성한 것에 그치지 않고, 메시지와 소음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켰다고 해석했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섀넌의 정보 이론에 의하면, 인간과 기계의 정보전달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것은 부호화된 정보였다. 소음은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잡음이었고, 부호의 해독 과정에서 가급적 최대로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4’ 33”]는 소음이 정보보다 중요할 수 있음을, 아니 소음이 곧 정보임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케이지의 음악에서 소음은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비결정론적인 예술적 환경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는데, 이것은 예술가가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세계관을 비틀어 버린 사례였다.
행위 음악이나 전자음악이 아닌 다른 형식의 예술 작업을 모색하던 백남준은 1961년 11월에 쾰른의 라디오 방송국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사용하는 전자기기에 매료되었다. 그는 전자기기들이 무한한 피드백으로 결합되어 시청자들의 목소리를 방송국에서도 들을 수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무한한 ‘피드백’의 은유적인 연결들이 이렇게 발생한 구체적인 효과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라디오 방송에 주목하면서 그는 예술적 매체로서 TV에 눈을 돌렸다. 당시 TV는 전자공학이 낳은 최첨단 기술로 보통 ‘전자 TV’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후 백남준은 몇 달에 걸쳐 TV 회로, 전자공학, 물리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으며, 괴츠의 논문을 꼼꼼하게 읽었고, 자신의 개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의 회고에 의하면 이 무렵에 그는 자유, 다양성, 시각적 쾌락, 인지적 관심이 지배적인 새로운 예술장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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