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먼저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냄새, 벨리코어Vellichor(중고 서적을 다루는 서점 특유의 애틋한 분위기-옮긴이)였다. 헌책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풍기는 아련한 그리움의 정서. 각각의 책들이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것마냥 희미하게 불만족이 어린 냄새다. 이어서 알록달록한 서가들, 뭔지 모를 신문 기사들이 높이 쌓아 올려진 탁자들, 비뚤비뚤한 가구들, 아무렇게나 놓인 문구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서점과 알록달록하다는 말이 어울릴까 싶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고서점은 예외 없이 컬러풀했다.
--- p.16
나는 첫해를 거의 제임스의 지도하에 보냈는데,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 시대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 책에서 그를 화석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수 있겠지만, 그가 끝없는 애정으로 보수해 낸 것들이 서점에 흔적을 새겨 넣었으며, 이 흔적이 다시 그라는 사람을 형성해 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회색빛 늑대처럼 겅중겅중 다니며, 매장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았다. 누구도 떠안고 싶어 하지 않는 수습 직원을 지도하는 일이 그의 손에 맡겨진 연유였다. 몇 년 동안 살펴본 바로는, 제임스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매장의 폐기물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것들이 도착하는 장소는 차치하더라도 누가 치우고 가져 가는지, 그래서 그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그냥’ 사라질 뿐이었다.
--- p.26~27
책 수집가라면 반드시 이 두 기치 아래에 있게 되므로, 현명한 책 판매인은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식별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드라큘라에게 관심 영역 바깥의 책들을 거듭 권하면, 이들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자신들의 기호를 더 잘 이해하는 다른 서점으로 옮겨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스마우그에게 한정적으로 엄선한 책만 보여주면 금세 싫증을 낼 것이다(더 나쁜 일은, 아예 지갑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수집가의 기대와 욕구를 관리하는 일이 희귀 서적 비즈니스의 핵심이다. 또한 남들보다 조금 덜 사회적이고 제각각 내면의 햇볕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상호 이익을 위해 공생하는 특별한 방식이기도 하다.
--- p.40~41
제본업자들의 쇠락이 가져온 가장 불유쾌한 결과는 필요할 때 믿고 맡길 만한 업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믿고 맡긴다는 것은 금액에 합당한 결과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믿고 맡기지 못하게 되면서 제본업자들과 밀고 당기는 흥정을 벌이다 보면 그들이 난데없이 자발적 난독증에 걸리는 희한한 현상을 보게 되기도 한다. 8개월을 꼬박 기다린 끝에 되돌아온 책에서 화려한 금박 글씨로 ‘Great Expactions(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의 오기-옮긴이)’ 또는 ‘Little Dorito(역시 찰스 디킨스의 『리틀 도리트 Little Dorrit』의 오기-옮긴이)’라고 새겨진 제목을 발견하게 되는 식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학습하게 되는 순간이다.
--- p.81
소서런은 이 책을 팔 수 없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1911년에 값을 많이 내려서라도 새로운 구매자를 찾아보려고 책을 뉴욕으로 실어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책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세관에서 수수료가 부과되었고 소서런은 그 돈을 내지 않기로 했다(이미 있는 돈을 죄다 보석으로 뒤덮인 책에 쏟아부은 상태였으므로). 책은 다시 대양을 건너는 항해 끝에 런던으로 되돌아왔고, 경매를 통해 ‘비참한 가격’에 가브리엘 웰스라는 미국인에게 팔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이 원래 실어 가기로 한 배편을 놓치고 대신에 첫 항해에 나서는 호화 여객선에 맡겨지는 일이 생긴다. 이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에 실린 책은 지금도 바다 밑에 있다.
--- p.143~144
저주에 걸린 책, 크립티드의 출몰, 알게 모르게 비워지는 쓰레기통의 회오리 속에서 몇 달이 지나갔다. 월급이 얼마 들어왔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을 만큼 혼란의 연속이었다. 낯선 사람들, 어둠 속의 소음 속에서 나날들이 흘렀다. 오후에는 고서적 용어집을 정신없이 탐독하며 보냈다. ‘이 『폭풍의 언덕』 사본은 개가 물어뜯은 것이 분명하다’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를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갖가지 상황들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들을 익혀 나가면서, 온갖 일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 서점이 나에게 견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내게 어떤 비참한 상황이 생겨도 서점의 사방 벽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지지는 않으리라는 것, 그것만이 나의 위안이었다. 음, 늘 그렇듯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
--- p.146~147
시간의 흐름을 막을 방법은 없다. 책이 결국 필멸하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책을 금고에 넣어 단단히 잠그고 아무도 그 책을 감상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 책은 조금씩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서점은 책이 다음 주인에게 갈 때까지 살려 놓는 일을 한다. 이것은 온전히 서점의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예방 조치도 있다. 책을 불 가까이 두지 말 것, 책을 물웅덩이에 던지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책의 즐거움을 누리는 걸 잊지 않을 것.
--- p.180~181
버려진 책갈피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다니며 강의를 듣는 학생 그룹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강사들이 이들의 대화를 들었더라면 걱정을 좀 덜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고서적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은 허기가 있었다. 주어지는 기회도 거의 없고, 부와 특권에 대한 아무런 현실적인 전망도 없이 남들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합리성과는 좀 거리를 두고 그때그때 색다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제임스는 자주 소서런의 좌우명이 ‘여기서 일하기 위해 미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미치는 게 도움은 된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희귀 서적 판매에 발 담글 정도의 괴짜들은 앞으로도 늘 있을 것 같다.
--- p.250
우리는 모두 누구에게 책을 팔지를 선택하는 자신만의 선이 있으며, 그럴 때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가 속한 세상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희귀 서적 거래는 별개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불온한 책이 온당한 곳으로 가는지 신경 써서 확인할 때마다, 혹은 혐오주의자를 서점에서 배제할 때마다 옳은 방향으로 한 발씩 내딛고 있다고 믿는다.
--- p.296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돈으로는 환산되지 않는 목적을 가지고 서점 방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책을 냄새와 소리, 촉감으로 숭배하는 대상물로서 여기는 경향 때문이다. (…) 그 어느 때보다 북 투어가 성황이다. 대규모 그룹이 이 서점에서 저 서점으로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관광을 즐긴다. 진지한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신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서점의 문지방을 넘어 침묵 속으로 들어서서는, 내가 처음 소서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꼈던 것과 닮은 경외의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아무렴, 이해되고말고.
--- p.345~346
이것이 희귀 서적 판매인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책을 사들이고, 팔고, 오갈 데 없는 책들을 돌보는 것. 그러는 동안 책은 소녀에서 어머니로, 노파로 변해 간다. 세월이 흐르면 어떤 책들은 친숙한 얼굴이 되며, 심지어 해마다 재고를 파악할 때마다 만나는 오랜 친구가 된다. 금방 팔릴 거라 여겨 사들였던(착각이었다) 『황금 당나귀 The Golden Ass』(고대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전기 소설. 원본이 완전하게 보전된 유일한 라틴어 소설로 알려져 있다-옮긴이)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그 뒤쪽에는 무슨 까닭인지 마음이 약해진 순간에 스핀들맨에게서 산 쥐에 관한 책도 보인다. 어쩌면 처음부터 팔릴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도 산 책이었을 것이다. 그외에도 눈에 들어오는 각각의 책들은 구입 당시에는 좋은 (혹은 나쁜) 이유로 사들였던 책들이다.
--- p.357
책장을 따라가다 보면 저택, 던전, 지하 저장고, 철도역 등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이상한 달력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내가 산 기억이 없는 책이 꽂혀 있는 것 같아서 한번 살펴보려고 열쇠 꾸러미로 유리 책장을 열기 시작한다. 어느새 제임스가 다가와 그렇게 거칠게 열면 안 된다고 꾸짖는다. “부드럽게,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나도 분히 열 수 있지만 제임스에게 조언을 구한 지도 좀 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가 여전히 나를 오래전 서점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온 소년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가 돕고 싶어 하니 그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아이고, 누군가가 요란하고 짜증스럽게 서점 창문을 두드리는 걸 보니 바로 앞에 떡하니 써 놓은 개점 시각 표지판을 읽지 못한 게 분명하다.
--- p.357~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