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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인쇄 사인본 ]
서수진 | 읻다 | 2024년 07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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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12쪽 | 262g | 130*200*14mm
ISBN13 9791193240274
ISBN10 119324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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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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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크리스마스가 보통 그러하듯 그해의 크리스마스 역시 무더웠다.
--- 첫 문장

한나와 경한은 나란히 서서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도은을 바라보았다. 도은이 깔깔 웃으며 후이한테 뭘 기대하냐고, 전날 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아직 잔다고, 올라가서 깨우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면서. 도은은 아보카도를 썰던 손을 멈추었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나와 경한의 얼굴에 머물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도은은 왜 대답하지 않는 걸까.
--- pp.19~20

미아는 베스를 생각했다. 치매에 걸리면 가장 먼저 외국어를 잊는다. 그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치매 환자들에게는 모국어만 남고 그들의 외국 이름은 주인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캐서린을 캐서린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에는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몇 번을 불러도 그녀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 p.44

그날 밤, 한나는 경한의 옆에서 잠들지 못하고 오래 뒤척였다. 그들이 깔고 자는 요는 얇아서 어떻게 누워도 몸이 배겼다. 경한은 부모가 한 달 정도만 머물 거라고 해서 제일 싼 요를 산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이 1년간 있을 거라고 했으면 두껍고 비싼 요를 샀을까? 아니다. 시부모와 그렇게 오래 같이 살 거라고 생각했으면 돈을 더 아꼈을 것이다. 돌침대에서도 잔다며 바닥에서 잤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정을 한다 해도 한나와 경한의 삶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 pp.68~69

호주에서 자란 소위 성공한 아시아인들은 명문대에 진학하고 전문직이 되어 역시 성공한 아시아인 친구와 함께 그들이 정복한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티 달링하버의 식당을 찾는다. 성인이 되어 이민 온 아시아인들은 언어 장벽을 극복하지 못해 같은 상황의 동포들과 어울리며 시티의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 등을 찾는다. 그들 중 누구도 헤비메탈이나 펑크 공연을 즐기러, 술집의 뒷마당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히피들과 어울리려 뉴타운을 찾지 않았다.
--- p.74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한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고, 그렇게 창대해지기를 바랐다.
--- p.93

미아는 에이든을 대신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호주에서는 사과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매니저의 시선이 미아를 떠난 후였다.
--- p.123

순간 하늘이 환하게 열리더라. 아, 이렇게 내가 죽고 드디어 천국에 가는구나 싶었어. 하지만 아니었지. 빛이 비치고, 모습을 드러낸 건 진리였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진리 말이야.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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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참 싫은 말인데 자주 하게 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정이 철저하게 다르고 비명을 참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데도, 스스로를 안심시키느라 혹은 뾰족하게 솟은 불행의 디테일들을 잘 눌러 익히 알던 세계에 편입시키느라 그렇게 말하고 마는 것 같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불행의 목록에 서수진의 디테일이 첨가되는 순간 이야기의 그물은 견고해지고, 친친 감긴 나는 이야기 끝에 도사린 피비린내를 감지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잘 닦여 반짝이던 이민 여성 4인방의 일상이 단 일주일 사이에 산산조각 나고 그들 각자가 외면해 온 진실이 피투성이로 드러날 때, 또 하나의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서수진밖에 없다는 사실.
- 박서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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