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 너른 들녘에서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농부들의 김매는 일손이 한창이고, 한 달 후에 찾아올 해방의 기쁨을 누가 알랴마는 농부들의 농부가는 들녘에 그득하다. 내가 태어난 지 한 달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삼창은 8월의 폭염보다도 더 뜨겁게 울려 퍼지고, 이제 막 고봉으로 넘쳐나는 점심 한 그릇 뚝딱 해치운 아버지는 평상마루에 가부좌 틀고 앉아 3단으로 접혀 있는 쌈지를 풀고 찢어진 노트장에 봉초를 터질 듯이 싸서 침을 발라가며 단단히 말아 붙인다.
담배 한 모금 길게 빨아 ‘후-’연기 다슬기를 만들어 내뿜으니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앗따, 이놈의 날씨 되게도 찌네, 이봐! 물---” 길게 빼는 소리에 냉큼 가져온 물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켜고 논으로 향한다. 김매기도 해야 하고 태풍철이 다가오니 물꼬도 단단히 봐 두어야 한다.
부모님이 그 마을로 들어가게 된 것은 일제의 횡포 탓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꽃다운 열여섯이던 어머니는 정신대 등 일제의 공출이 무서워 열여섯이나 많은 이웃 동네 노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징용, 징집이 무서운 아버지는 결혼을 하면서 숟가락 둘, 젓가락 두 모, 밥그릇 두 개만을 가지고 지리산 자락 고향마을을 떠나 홀로된 어머니가 살고 있던 외가 근처인 멀리 객지인 이 마을로 들어섰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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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준공이 나면서 그동안 여기저기 널려 있던 채무를 담보대출로 변경하고서도 1억에 가까운 사채가 남고 말았다. 재수에 들어간 큰딸과 고2가 된 둘째 딸의 대학진학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 힘든 세월이 예고되었으나 10년만 버티기로 하였기에 생활비 등 모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하나가 더 늘어 돌아오는 가계수표를 돌려막는데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토록 고대하고 갈망하던 아파트에 이사하자마자 그러지 않아도 사채이자의 중압감 때문에 아파트 등기가 나오면 은행융자를 얻어 이자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려던 차에 갑자기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거액(18년의 공직생활로 받았던 퇴직금의 약 3배)이 빚으로 덤터기 씌워지고 나니 아득할 뿐이었다. 이사간지 두 달 만에 아내도 아이들도 정말 꿈에 부풀어 있는데 차마 집을 팔자고 하지도 못하고 어찌 버텨볼 생각을 하고 6개월을 견뎌낸 후 은행융자를 받아 일부사채를 정리해도 은행융자에 사채까지 남아 아파트를 처분해야 할지 망설이던 차,
그해 11월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쳐 은행이자율은 사채이자율까지 올라 월 2%가 넘는 은행사상 초유의 이자를 부과시켜 애초에 월 150여만 원으로 계산했던 이자가 동서 때문에 300여만 원으로 IMF로 500여만 원으로 3배 이상 껑충 뛰어 버린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파트를 팔기로 하여 부동산에 내놓았으나 팔리진 않고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진다. 사채는 더욱 늘어만 가고 절망스러운 날들은 계속되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아파트를 처분하기로 하고 매물로 내놓았지만 IMF 외환위기로 아파트 가격은 폭락한데다 그나마 거래도 없어 몇 개월이 흘러갔을 때 정말 운 나쁘게도 나를 철저히 나락으로 몰고 가는 악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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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자세를 취한다. 식탁의자에 앉아 있는 엄마의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춤이 시작된다. 고개를 숙이는 준비자세에서 음악소리에 맞춰 고개를 드는 데서부터 할애비인 나를 놀라게 한다. 표정이 잘 훈련된 배우의 느낌이다. 자연스러워 어색함이 전혀 없고 시선이 압도적이다. 손을 뻗는 동작이 절도 있고 발의 움직임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정해진 춤사위가 없는 탓이겠지만 발과 손이 따로 노는 나의 막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연꽃처럼 미소 띤 얼굴을 받쳐 든 손의 모습, 주먹 쥔 두 손을 물레방아 돌리듯 돌리는 모습, 절도 있는 손의 뻗침과 발의 움직임들,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춤과 함께 변하는 표정들, 기가 막히게 잘 훈련된 손녀의 춤사위다.
보름 전 고모와 할머니의 생일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에 부쩍 성장한 모습에 놀랍기만 하다. 영어발음이 좋다는 손녀가 중간중간 영어가사로 노래도 불러가며 세 곡의 춤을 마무리한다. 박수갈채가 요란하다. 평생 깔아 놓은 돗자리에서 노래 한 번 춤 한번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하였다. 정말 오늘의 이 기분은 흔히 말하는 10년은 젊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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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숙명적으로 태어나게 되고 그 숙명적인 것도 태어나면서 천차만별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부잣집에서, 가난한 집에서, 잘 생기거나 못생긴 모습으로, 건강하게 또는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일단 태어나면 그 순간 하나의 인격체로서 보호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운명을 가지고 숙명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익혀 개성과 인성을 갖추며 성장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행운만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사람의 모습이다.
사람이 태어나 100년을 살아 가는 것이 삶이라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참 사람의 모습일 것이나 누구나가 다 참사람의 모습인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소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범한 사람 있고,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 있는가 하면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있고 누리는 삶, 고달픈 삶이 있는가 하면 베푸는 삶, 파괴적 삶도 있을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성공한 삶과 실패한 삶이 있을 것이나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삶이란 스스로 만족해하며 잘 살았다고 느끼는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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