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구산은 사람 기죽이게 높지도 않구, 삐죽삐죽 저를 드러내려구 애쓰지도 않구, 그저 소잔등마냥 밭이랑마냥 구불구불 편안하게 내리뻗은 산이여. 그 좌구산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와 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그게 바로 삼기천이여. 삼기천은 물길 따라 흘러내려 증평에서 보강천이랑 만나구 다시 미호천이랑 만나서 금강 줄기로 흘러내려가.
_p19 [제1부 길 따라 이야기 따라]
율리 삼거리를 예전엔 수살거리라 불렀다구 했지?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이면 수살제를 지내구 있어. ‘수살’은 동네 어귀에 서있는 돌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여. 수살막이, 살막이, 수살목이라구도 불러. 동네를 수호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 전염병이 유행할 땐 부정한 것이 못 들어오게 수살에 새끼줄을 쳐서 모시구, 또한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환자의 옷을 걸어놓기도 했어. 장내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수살제를 지내면서 한 해 동안 마을에 병도 없구, 화재나 홍수 피해도 입지 않구, 농사 풍년 들구, 마을 사람들 모두가 평안하게 잘 지내게 해달라구 빌구 있어. _p35 [제2부 굽이굽이 전설이 살아 있는 남차리]
신경행은 일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무난히 과거에 급제했구 벼슬길도 순탄했던 편이여. 벼슬살이를 하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구, 공신으로서 후한 대접도 받구 말이여. 죽은 뒤에도 예조판서에 증직되구 ‘충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어. 신경행은 ‘이로움을 얻었을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라’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었어. 이렇게 평생 소신을 지키면서 살어간 덕분에 벼슬도 오르구 좋은 일이 따렀던 게 아닐까? _p61 [제2부 굽이굽이 전설이 살아 있는 남차리]
김득신이 남긴 수백 편의 시 중에 밤티마을에 대해 쓴 시도 몇 수 전해지구 있어. 그중에 [밤티골(栗峽)]이란 시 하나만 소개해줄게. 김득신 묘소 옆에 ‘밤티골’ 시비가 세워져 있어. ‘산기슭 시냇가의 너럭바위 대(山畔溪頭石作臺)/올라 굽어보니 석양도 황홀해(登臨斜日兩眸開)/시흥에 겨워 자주 붓대를 잡고(詩因有興頻抽筆)/시름을 삭히고자 술잔을 거듭해(酒爲銷愁每把盃)/나그네 혼 꿈길로 서울을 찾고(客子夢魂京裡去)/벗의 서찰은 산촌까지 전해오네(故人書札峽中來)/봄이 오는 이즘 무단히 놀람은(無端警覺新春近)/잔설 속에 망울 트는 매화 때문(積雪初融欲綻梅)’ _p71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괜찮다. 날 봐라. 나도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견뎌왔다.” 어쩌면 이 영험한 미륵불은 가난하구 힘없는 사람들 편이 돼주기 위
해서 스스로 자기를 낮춘 건지도 몰러. 뭉개진 얼굴이며, 사람들이 오가는 번듯한 길을 피해 외진 곳에 서 있는 거며, 어쩌면 이 모든 걸 스스로 취한 건지도 몰러. 스스로를 낮추구 낮춰 사람들에게 등불이 돼주구, 사람들 눈물을 닦어주는 수건이 돼주려구 말이여. 세상엔 잘난 사람도 많지만 나처럼 못난 사람도 많으니 부디 힘내라구, 나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라구,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으라구……. _p79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김득신은 책을 읽은 횟수를 ‘독수기(讀數記)’에 적어놓았어. 독수기가 뭐냐면, 책을 읽구 나서 몇 번이나 읽었는지 그 수를 적으면서 간단히 책에 대해 쓰는 기록장이여. 그런데 만 번을 읽지 않은 책은 그 독수기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구 햐. 김득신이 쓴 독수기에 적혀 있는 걸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겨. _p87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책벌레 김득신의 책 읽기에 대한 얘기는 엄청 많어. 이번엔 혼례를 치르던 날 벌어진 얘기여. 사윗감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해볼 겸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어. 사위가 책을 병적으로 좋아하다 보니께 첫날밤까지 책만 끼구 밤새 읽다가, 딸 옷고름도 안 풀어줄까 봐 염려되기도 했을 겨. _p92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그러니께 김치랑 심기원은 바로 좌구산 쪽에서 운 개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겨. 목숨을 구한 건 이 두 사람뿐만이 아녀. 역모란 게 한두 명이 하는 게 아니라서, 감자 줄기에 감자알 딸려 나오듯이 줄줄이 목숨 줄이 붙어 있었지. 역모가 들통 나는 날엔 그 집안 삼족을 멸해 완전히 씨를 말렸으니, 그 개가 살린 목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겨. 그래서 김치는 그 뒤로 좌구산을 ‘거북 구(龜)’ 자 대신 ‘개 구(狗)’ 자를 써 ‘좌구산(坐狗山)’ 이라 부르라구 했다는 겨. 나라의 큰일을 성공할 수 있게 해준 명산이니 이름을 바꿔야 한다면서 말이여. _p144 [제4부 김치의 운명을 바꾼 좌구산]
죽리마을은 사방이 넓은 들판으로 뒤덮여 있어. 김득신은 해 질 녘에 어느 집 난간에 기대어 서쪽 들녘을 바라보다가 술에 취한 듯 풍경에 취했던 모양이여. 아마 하늘엔 고운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양,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었을 겨. 노을에 물든 저녁 들녘은 원앙금침을 깔어놓은 신방마냥 고요하면서도 아늑했겄지. 그 모습에 괜스레 누가 휘저어놓은 듯 맘이 일렁거렸을 테구. 흥취에 젖어 시 한 수를 읊구 나서, 김득신은 주막에 들어가 주모랑 객쩍은 농을 주구받으며 농주 한잔했을지도 몰러. _p168 [제5부 넓은 뜰을 품고 있는 죽리]
요즘은 산이란 산은 다 깎여 나가구, 길이란 길은 다 시멘트로 뒤집어씌우구, 생기느니 죄다 하늘을 찌르는 아파트에 고층건물이구, 도무지 옛 모습을 찾어보기 어렵잖어. 이렇게 얘깃거리 있는 길들이라도 옛 모습을 잃지 않게 잘 보존시키면 좋겄어. 옛길이 사라지면 옛날 사람들이 살던 얘기도 사라지구 마는 겨. 그러면 그 얘기에 담긴 우리의 얼도 혼도 사라지는 거구. 그럼 뭐만 남겄어? 껍데기만 남는 거지 뭐. 우리가 우리 거라구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겨. 쯧쯔쯔!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입맛이 다 쓰네. _p180 [제5부 넓은 뜰을 품고 있는 죽리]
솔모루 샘이 지금은 그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진 않지만, 샘 둘레에 높게 시멘트로 담을 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러면 샘가에 쪼그리구 앉어 옛 전설을 떠올리면서 얼굴이라도 비춰볼 수 있을 텐데 말이여. 속이 시커멓든 하얗든 샘물은 그 사람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주겄지. 그러면 샘물에 거울처럼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서, 옷매무새를 여미구 매만지듯이 흐트러진 맘을 가지런히 해 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여. _p207 [제6부 마애불과 미륵불이 지켜주는 남하리]
농한기에 베를 짜다 졸리면 바가지에 고드름을 따놓구 입에 하나씩 넣어가며 베를 짰어. 그런데 남편이나 살어 있으면 베틀을 돌리는 장단도 신바람이 나겄지만, 남편이 먼저 가버려 없으면 뭔 신명이 그리 나겄어. 남편이라도 있으면 동지섣달 엄동설한보다 매서운 시집살이라도 따뜻한 남편 품이 녹신녹신 녹여줄 텐데 말이여. 그러니 그저 나오느니 한 숨이요, 눈물이었을 겨. _p248 [제7부 굽이굽이 인생길, 노래로 넘어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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