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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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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553
ISBN10 115896655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폐허의 복원은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지요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어요
숭숭 뚫린 구멍에 석회 물을 부어 넣었더니
놀랍게도 사람 형상이 굳어 나왔다고 해요
허공도 사실은 누군가의 틀이었던 거죠

그래요, 나는 당신 꿈에 주입된 복제본이에요
하지만 그런 당신도 에디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요

화산폭발에 놓인 최후의 모습들을 보았어요
죽음이 간절해하는 것은 결국 삶이라는 것을
절박은 누군가의 형틀이겠지요

우리, 라는 자리에 석회 물을 흘려 넣고 싶었어요
껴안은 채 수천 년 묻혔다가 복원된 형상엔
영원도 묻어 있을까요

기억을 흘려 넣으니, 유적지의 휑한 바람벽조차
그 자리를 지키느라
그리 오래 견뎌왔다는 걸 알겠어요

숱한 감정이 찍혀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원형으로부터
점점 마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서 나를 깨어내고 있어요
--- 「누군가 나를 꿈꾸기를 멈춘다면」 전문

해킹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메일 및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망자가 된 어느 시인의 SNS 화면,
생전의 글귀가 검은 입술처럼 달싹인다

어쩌면 그에게는 죽음도 해킹에 해당될까
커서가 껌벅일 때마다 착시가 인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눈을
상상해 본다

창 하나를 지워도
검은 나비 같은 팝업창은 살아서

누군가 자꾸 호출되고 있다
--- 「커서」 전문

상자는 너에 대한 나의 두 마음
나의 두 마음이 너를 향한 확률

너는 살아서 빛나는 파란 눈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굳게 내리감은 눈꺼풀을 본다

손을 넣어 등을 만져볼 기척도 없이
흔들어 깨워볼 겨를도 없이 너는,

죽음을 쓰다듬는다
쓰다듬는다 죽음을

그 순간부터 나는 고양이,
그에 걸맞은 이별의 자세가 된다
--- 「슈뢰딩거의 이별」전문

생(生)을 소진해 가면서도 남은 힘을
시에 건넨다는 것은,
활자가 대신 살아낼 것이라는 확신이었을까

사라져 버리는 것들로 가득한 이곳에
한 권의 시집으로 남겨진 사람

세상은 비유와 상징이 무수히 접힌 신의 책이다
우리는 목차에서 다른 누구도 될 수 없고
다음 장이 넘겨지기도 전에
신은 갈피끈을 끼워 덮어버릴 수도 있으니

우리가 접면이 울도록
생을 살아내는 동안에도
결말이 이미 마침표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일

무한으로 가는 수많은 문장 중의 나를
고를 수 있다면,
그것이 사는 이유라면,
죽고 태어나는 건 주술 관계일 뿐이겠지

그리고 어느 날,
유성처럼 어둠 속으로 덧없이 사라져도
희미하게 남은 빛을 다해
이 생의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을지도

시집을 펼치자
문장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 「유고 시집」 전문

# 검정 돌
사각의 프레임이 집요하게 가해를 부추긴다. 다정하고 짓무른 반들거림 속에는 아무리 당겨도 끊어지지 않는 패가 있다. 혼자서는 에워쌀 수 없어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누구라도 겨눠야 한다. 그것이 너희였을 뿐,

# 흰 돌 1
기척이 복기 되고 있다. 어항 속 물고기의 눈처럼 덜컹거리는 동공이다. 이 시간이 지나갈까, 지우면 없는 일이 될까, 기억은 어쩌면 버려진 포석일지 몰라. 내게 둔 상처만큼 네가 숨을 트는 거라면, 나의 선택은 막다른 곳에서 진을 치는 것,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 흰 돌 2
만남은 우리를 번갈아 갈라내었다. 달그락대는 감정, 그것이 마지막 수가 되다니, 마치 드러낼 색을 기대하듯이, 너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물릴 수 없는 길이 드러났다.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완성된다고 끝없이 선들이 이어졌다. 판의 밖은 언제나 타인

# 흰 돌 3
두고 나서 깊어지는 후회처럼 검정은 나를 길들였다. 어떤 경계에 서 있느냐고 망설이고 있을 때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흰 돌 하나, 외따로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제의 검은색이 오늘의 흰색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도 무수한 돌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수면 위를 튀어 오르는 숭어처럼 나도 상처를 엎어보는 것이다.
--- 「돌을 나눠 가지고」 전문

한 권의 책 속엔
가로로 이등분된 두 개의 시공간이 달려 있다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

어린 신들은 피조물의 운명에 대해 턱을 괴고 골몰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마다의 세상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의 원칙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치로 만들 것, 모험과 고난이 가식과 허영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굽이굽이 위험에 빠지거나, 배신이 믿음을 쓰러뜨리거나, 미로가 출구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세계가 그들에게 열중했다 행복이 슬픔의 지면에 넘나들기도 하고 복수가 우스꽝스런 잔꾀에 빠지기도 했지만 생(生)은 결국 한 권의 책이어서 다 채우고 나면 주마등처럼 줄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모든 것이 감정에서 비롯되었으니 신들의 표정이 흡족했다

어린 신들의 세계가
우주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오후였다
--- 「세계의 발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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