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음악은 서로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경제는 ‘아폴론’, 음악은 ‘디오니소스’의 영역에 머무른 것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하지만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음악 등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 다만 경제는 다른 요인과 더불어 예술을 포함한 상부구조에 개입하거나, 중간 단계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음악 등 예술은 생산양식상의 근본 모순을 봉쇄하면서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까닭이다. 최초의 ‘자유 음악가’ 베토벤이 모차르트처럼 굶어 죽지 않은 건 1차 산업혁명에 따라 부르주아계급이 대거 양산된 덕분이다. 음악을 향유하고 소비하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던 축음기와 라디오는 2차 산업혁명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결과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이례적’ 호황이 197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면 기성세대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던 펑크록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들어가는 말」중에서
결과적으로 대분기 이후 산업화에 따른 공업화가 진전되었던 1880년에는 전 세계 지역별 공산품 생산능력 중 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20% 정도로 축소된다. 대신 영국과 유럽대륙 그리고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미국을 합친 비중이 60%를 상회한다. 이 추세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까지 이어진다. 대분기의 결과는 지역 간 1인당 GDP의 격차 확대였다. 앞서 소개한 ‘메디슨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820년 3대 1을 기록했던 지역 간 격차는 1870년 5대 1로 벌어졌고, 이후 1950년 15대 1, 1998년 19대 1로 그 간격이 더욱 커졌다. 영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움트기 시작한다는 경제적 토대의 변화는 정치, 사회, 법률, 예술 등 상부구조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 책에서 경제사와 함께 주목할 음악 역시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로크음악이라는 중세의 잔재를 벗고, 우리가 현재접하는 ‘고전주의 음악’의 원형이 제시된 건 이 변화의 결과다.
---「1장 산업자본주의, 부르주아와 ‘베토벤들’을 낳다」중에서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이중혁명을 거친 서구 사회는 그 이전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당시 사회의 주인공은 기존의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계층이었다.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 주도권을 대토지 소유자였던 귀족이 아닌 도시의 공장주와 대상인, 금융·법률 전문가 같은 부르주아계층이 확보한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겪은 당대인들은 국가는 왕국과 따로 존재하고, 백성들은 지배자와 독립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음악 문화의 헤게모니도 귀족에서 시민사회, 곧 부르주아계층으로 넘어갔다. “음악은 시민계급의 독점적 소유물”이 되었다. 음악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소수 귀족의 후원 대신 다수의 도시 중산층인 부르주아계층으로부터 ‘선택’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공공연주회나 출판 등 음악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일반 청중들은 귀족계급에 비해 음악적 소양이 떨어졌고, 무도회 같은 목적이 아닌 음악 자체만을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성공하려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투쟁’이 필요했다. 그 결과 표현 강도를 끊임없이 높이는 19세기의 과장된 양식이 탄생했다.
---「2장 세계를 통합한 부르주아, 낭만을 노래하다」중에서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와 더불어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민족은 한 사회 내부에서 먼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생성돼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건 민족주의가 낳은 일종의 신화다. 이런 민족의 고유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신화는 다른 민족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고, 곧 ‘국제적’이라는 전제 아래 민족주의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서구의 기준으로는 주권과 영토를 지닌 근대적 주권 국가의 탄생을 알린 1648년 베스트팔렌 국제조약 이후 민족주의가 등장했고, 이는 국제정치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민족의 본질에는 혈연·언어·풍습 등 문화적 공통성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반의 동질성이 전제되는데, 이는 곧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사회적 생산력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구성원을 동질화·단일화할 효과적 수단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어서다. 민족주의는 당시 고전음악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그때까지의 음악 선진국 외의 다른 지역에서 국민음악파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3장 자본주의에 드리운 유령, 불황」중에서
스윙재즈는 1950년대 로큰롤과 비밥 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 재즈만이 아니라 대중음악계 전체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1935~1945년 사이에 100만 장 이상 판매한 음반 중 절반은 스윙재즈 음반이었다. 1930년대 팔린 앨범 중 85%가 스윙재즈 음반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 담배부터 여성 의류까지 거의 모든 상품의 마케팅 수단이 되면서 ‘유사 이래 가장 대규모의 음악 비즈니스’로 손꼽혔다. … 다만 스윙재즈가 돈이 되자 베니 굿맨 같은 백인 뮤지션들이 등장해 업계를 장악한다. 그러나 스윙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막을 내린다. 여러 이유가 있다. 빅밴드는 큰 조직으로 움직이다 보니 애초 비용이 많이 들었다. 여기에 밴드 대신 가수와 노래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대중음악산업이 발전하면서 빅밴드가 설 공간이 좁아졌다. 라디오는 빅밴드의 실황 연주 대신 음반 음악을 전파에 실었다. 이에 더해 스윙재즈는 구닥다리 음악으로 여겨졌다. 재즈씬에서도 새로운 변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훗날 ‘비밥 혁명’이 시작됐다.
---「4장 ‘야만’의 시대, 그 속에서 울려 퍼진 재즈와 모더니즘음악」중에서
지갑이 두둑해진 이들은 자연스럽게 광범위한 소비 대중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내구 소비재와 여행, 보건 등 소득이 늘수록 소비가 늘어나는 품목들의 매출이 급성장했다. 많은 미국인은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11장 제목처럼 “쉐보레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둘러”봤다. 100가구당 차량 등록 대수는 1930년 89.2대에서 1950년 112.9대, 1970년 171.0대로 뛰어올랐다. 1970년대에는 차량을 두 대 이상 보유한 가구가 흔해졌다는 뜻이다. … 이는 투자의 증가를 유도하고, 다시 소비의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를 냈다. 미국만이 아니라 서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슈퍼마켓이 확산되면서 식품을 저장할 냉장고 보급률은 1970년대에 80%를 웃돌았다. 선진국 시장만 놓고 보면 ‘고도 대중소비 단계’가 열린 셈이다. 이런 고도 대중소비 문화의 중심에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로큰롤이 자리하고 있다.
---「5장 호황에 들뜬 세계, 로큰롤에 홀리다」중에서
흔히 ‘명작’(마스터피스)이라는 호칭은 시대를 선도한 작품에 붙는다. 새롭고도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새 사조를 개척한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기에 명작이 많다는 것은 당시 뮤지션들이 왕성한 창작 욕구를 바탕으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음악 장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대중음악은 철저히 자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많이 팔릴 만한 작품에 돈이 몰리고, 이를 바탕으로 뮤지션들은 앨범을 제작한다. 흔히 경기가 좋을 때 새로운 장르가 개척되곤 한다. 자본 수익률이 높은 덕분에 음반사들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작품에도 투자할 여력이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적 시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전후 세계 자본주의의 호황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중후반에 록과 하드록(Hard Rock), 헤비메탈(Heavy Metal), 프로그레시브록(Progressive Rock), 포크록(Fork Rock)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록 장르 대부분이 개척되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비틀스가 있다.
---「5장 호황에 들뜬 세계, 로큰롤에 홀리다」중에서
다만 힙합이 대중문화계에서 영토를 넓혀갈수록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되었다. 미 의회는 랩음악의 위험성 조사에 착수했다. 1980년대 정치권의 압박으로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의 자체 검열제도가 도입되고, 이에 힙합 앨범 중 열의 아홉은 검은 고딕체의 “PARENTAL ADVISORY/EXPLICIT CONTENT”(부모의 주의 요망/노골적 내용)라는 딱지를 달게 된다. 정치·경제적 분노가 한데 녹아든 ‘소리의 폭동’이었던 힙합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변화는 힙합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힙합씬의 ‘행동주의’ 흐름은 퇴색하고, 대신 ‘갱스터 랩’이 주류로 올라섰다. 라임은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돈, 자동차 등을 자랑하는 자기과시 위주로 변질되었다. 물론 갱스터 랩 시대에도 투팍이나 쿨리오 같은 뮤지션이 소외된 흑인 사회의 모습을 여전히 랩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힙합씬에서 정치적 의사 표명을 통해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점차 사라지고, 분노는 절망으로 퇴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장 장기침체의 시대, 펑크와 디스코를 소환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