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꿈은, 그것보다 더 야만적인 현실의 잠으로부터 나를 깨워준다.
--- p.5
나는 더 이상 나의 몸이 내게 달려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처럼, 단지 나는 나의 육체의 흔적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나의 몸은 내게서 분리되어 밤과 함께 기어들어 온 어둠 속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나의 마음과 정신은 나의 육체에도 공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이럴 때면 나는 내가 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 p.45
조금씩 진폐처럼 내 내부에 쌓여 전신 마취와도 같이 나를 마비시킨 권태는, 시작과 함께 완성된 그 권태는, 그날의 방공훈련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등장한 가상 적기처럼 기습적으로 내게로 온 것이다. 이미 그때 나는, 이 세계의 한 가지 중요한 원리로 그것이 권태의 무론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53
나는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맹목성 속에서만, 맹목적인 지향성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렁이에서 본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끝까지 추적해 들어갔을 때, 그 끝 즈음에서 발견하게 되는 맹목성이었다. 나는 소멸 중인 그것 속에서 맹목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의 일반적인 양식을 파악한 것이다.
--- p.148
나는 생각을 했다, 이 세계 자체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갖지 않고 존재할 뿐이다, 라고. 그것이 존재의 두려운 진실이었다.
--- p.148
무한대로 증식하는 권태. 그 무한한 권태만이 나의 삶을 부양하고 있다. 권태는 오랜 세월 동안, 바닷가의 바위에 필사적으로 부딪혀 그것을 침식시키는, 염분을 함유한 파도처럼 나를 조금씩 마모시켜 왔다.
--- p.179
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저주와 이미 죽은 가장 사악한 악당들의 경멸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증오를 받을 짓을 한 것이오. 어쩌면 나는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지도 모르오. 내 내부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도사리고 있던 악마가 내 존재의 약한 틈새로 뛰쳐나온 것이오. 내가 놀란 것은 나의 그 감추어져 있던 어두운 부분이 갑작스럽게 드러난 것에, 숨어 있던 악마가 끌고 나온 그 어둠을 목격했다는 데 있었소.
--- p.216
나는 눈을 감고, 하루의 종말의 시각에, 도대체 왜 또 이런 하루가, 기적과도 같은 하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지를, 또한 오늘 알지 못한 그 이유를 내일이 된다고 알게 될 리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끝내 잠이 들지 못하며, 몸을 뒤척인다.
--- p.232
나는 어떤 고상하지 못한 욕구에 내가 휩쓸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채로, 나를 그것에 맡겼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허리를 구부려 땅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쥐어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는 끽,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그것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어떤 것이었다.
--- p.221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라는 간수의 손에 의해 어제로부터 오늘로, 오늘로부터 내일로 끝없이 이감되고 있는 죄수일 뿐이다. 그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을 수 있는 방법이며, 동시에, 내가 그것과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가? 이것이 이 세계의 원리이고, 그 원리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계에는 없단 말인가? 아아, 삶의 끔찍함이여, 그 끔찍함마저 없다면 단 한 순간마저도 살아 있기 힘든, 끔찍한 삶이여.
--- p.221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자고 있었니? 왜 그렇게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대답을 하 지 않은 거야? 네가 없는 줄 알았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었구나.” 내가 눈을 비비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여자였다.
---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