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위탁 가정에서 야반도주했다. 당시 나는 물에 젖은 종이와도 같아서 조금의 비난만 들어도 금세 찢어질 것 같았다. 위탁 가족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잠든 밤에 떠나기로 했다. 그 집에서 10년쯤 생활한 짐은 큰 가방 하나와 보따리 두 개가 전부였다. 끼익, 소리 나는 문을 숨을 참고 열었다. 발끝으로 계단을 조용히 걸어 나가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내달렸다. 심장이 아프게 쿵쾅거렸다. 나의 청소년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pp.9~10
아빠의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우리 둘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 가정에 맡겨졌다. ‘위탁 가정’이라고 했다. 만 18세가 되어 자립할 때까지 보호받을 집이었다.
가족과 평생 함께 사는 입양과 달리 보호가 종료되면 떠나야 하는 가정과 식구들. 잠시 빌려 쓰는 가족.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언제든 쫓겨나거나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 p.25, 33
그럴 때, 찰나의 순간에 슬픔이 밀려오고는 한다. 결핍과 외로움이 마음에 번진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을 때. 진심 어린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걸 실감할 때. 잔소리를 듣다가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하고 토라져 보고 싶지만, 역시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그래도 괜찮다. 누구나 그렇듯, 앞으로도 결핍을 발견하는 날들이 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때 가면 또 생각해내면 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 p.48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진 내게 세상은 모르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법, 의견을 조율하는 법, 사과하는 법 등 사람을 대하는 모든 방법이 내가 모르는 창고에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을 사는 법이 들어 있는 창고의 열쇠를 어디 가야 찾을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pp.57~58
상처가 나면 아픈 게 당연하다. 상처 위에 딱지가 생기고 아물어가는 과정 동안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 그러나 이겨내라는 말, 극복하라는 말은 내가 상처 입은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도록 했다. 그건 극복이 아니었다. 제대로 아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 뿐.
--- p.106
내가 왜 그랬을까. 나를 왜 지키지 못했을까.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이마저도 틀린 생각이었다. 내가 피해자가 된 이유는 밤에 돌아다녀서가 아니고, 때때로 집을 나가서도 아니고, 사람을 쉽게 믿어서가 아니고, 보호해줄 부모님이 없는 여학생이어서도 아니다. 민소매,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할지라도 범죄 피해자가 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아프고 힘들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내게 아파할 자격이 없는 줄 알았다.
누군가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면, 당사자가 전하는 이야기가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아에다가 왕따, 학대, 성폭행 피해자다. 수없이 밟히고 깨어진 삶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기록할 것이다. 나처럼 고통받는 아이들이 자신의 삶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 pp.108~112
“우리는 자기 자신한테 제일 잔인한 것 같아.” 타인이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은 내 모습을 스스로 단정 지어 지워버리는 것은 나 자신을 조금씩 잃는 행동이다. 세상에 만 명이 있다면 만 명이 좋아하는 모습이 각기 다르며, 어쨌거나 타인의 기대에 맞춰야 할 필요도 없다.
--- pp.123~124
‘에이, 작곡과를 나온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노래를 만들어’ 같은 생각이 속삭일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 스스로 못 할 거라 믿는다면, 나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못 한다는 것을 증명해낼 것이다. 반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역시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낼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에너지는 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 에너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쪽으로 쓰며 살아가고 싶다. 이런 믿음을 선택한 삶이 녹아 있는 노래를 만들고, 세상 앞에서 부르고 싶다.
--- p.159
어린 시절에 큰 사건을 겪은 뒤로 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유튜브 활동을 할 때도 예명을 사용했다. 초반에는 얼굴도 올리지 않고, 노래 영상만 올렸다. 인생을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을 겪고 나면, 아픔도 크지만 사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단단해진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은 변함없이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노래한 영상을 올렸다. 지레 걱정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플도, 비난도 없었다. 오히려 응원이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유튜브 채널 이름을 ‘선아라’에서 ‘모유진’으로 바꿨다. 30초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작업이지만, 내게는 선언과도같다. 이제는 숨어 살지 않을 거다. 내 이름과 내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거다. 그렇게 발매한 곡이 〈ithin Me〉이다. 〈싱투게더〉를 통해 발표한 이 노래에는 성폭행 피해자로서 살아온 이야기를 담았다. 교통사고를 겪은 피해자에게 그 사실을 숨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 사실을 감추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 이 노래는 내 안에 새겨진 자국조차 사랑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깨어진 꿈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여볼 것이다. 여기저기 금이 가 있더라도 내 그릇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에, 이제는 수많은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나를 지키는 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pp.161~163
자립준비청년 친구들은 위탁 가정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놀러 가고 싶은 마음. 무엇도 바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배운다. 그리고 조금씩 꿈꾸는 법을 잊어버린다. 먼저 자립한 선배들의 끔찍한 생활,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망가져 가는 언니, 누나들, 자립정착금을 사기당한 형들, 도박이나 불법적인 일에 휘말려 위기에 놓인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불안함이 밀려온다. 나이를 한 살 먹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축하받을 일이 아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으로 내몰리게 되는 두려운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다. 퇴소가 가까워져 올수록 아이들은 생각한다. ‘다음은 내 차례다.’
--- p.188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다. 실제로 상처와 가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의 이후 삶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삶의 방향은 주위에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는지에 따라 극명하게 나뉘었다고 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언젠가 받은 사랑과 도움을 이제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에게 찾아온 ‘한 사람’처럼 나도 그들에게 한 사람이 되어줄 것이다.
--- pp.204~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