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홍의 필명이자 아호는 ‘살매-물처럼 살리라’이다. 평생을 견지한 신념이다. “물처럼 착하게 거침없이 살아간” 김태홍에게 물은 착하게 사는 순리의 세계인 동시에, 순리를 거스르는 모든 것에게는 거침없는 항거의 조류로 표상되었다([살매 서정시선] 후기). 한편으로 “물처럼 둥글게, 물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그였다(「살매」).
그의 말처럼 “늙었구나/비에 젖은 흘러간 옛 노래” 같은 김태홍 시의 흔적이 없다(「소낙비」). 잊지 말아야 할 시인이 잊혀졌다. 부산 · 경남 시단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시인이 사라졌다. 우리나라 학술 정보 문헌에 김태홍에 관한 논문이 한 편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간간이 단편적 소고이거나 회고록에 잔존한다. 그나마 김선학 교수의 책임 편집으로 [살매 김태홍 전집](국학자료원, 2013)이 상자되었다. 살아생전 김태홍의 부리부리한 눈, 눈망울이 억실억실하게 크고 열기가 있었던 것처럼 지켜볼 일이다.
--- pp.50-51 「실존 의식, 자유와 성찰 - 살매 김태홍의 시」중에서
산 첩첩 유폐된 방은 세계와 차단된 공간이다. “방문에 대못을 질러 놓고/외부와의 일체의 타협을 끊”어 놓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심오한 존재로 회귀하는 곳이 산 첩첩의 공간이다. “모든 것이 사멸하지만 죽음이 삶의 능숙한 동반자인 공간, 비통하게 찬양이 이루어지고 비탄을 영예롭게 기리는 공간, (할복하는) 공포가 황홀한 법열의 공간, (유폐되면 유폐될수록) 마치 가장 가깝고도 가장 진정한 현실로 다가가듯 모든 세계들이 뛰어내리는 (그야말로) 오르페우스적인 공간”에 그는 살고 있다(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역, 193쪽). 진정 “시인은 스스로 들을 수 없는 입으로 만드는 상처와 그것을 듣는 자를 침묵의 무게로 만드는 상처”를 지녔다.
--- p.80 「민족의식, 인간답게 사는 길 - 월초 정진업의 시」중에서
자기 변설(辨說)이 넘치고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는 시대 탓인가. 진리를 설파하려고 들이대는 시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아쉬운 점은 진리의 말씀인 듯하나, 체험의 근원을 알 길이 없다는 데에 있다. 자기 성찰의 잠언은 있으나, 깊이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진리 혹은 진리답잖은 것은 때와 정황에 벼리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거나 혹은 차꼬로 채워질 구속이기도 하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함은 나와 당신의 이해를 초월한 자리, 섣부른 선입견으로 규정된 말과 말을 버린 자리, 진리를 추구하는 숱한 방법과 도리가 열려 있어 누구나 갈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데에 있다.
황선하 시인만큼 시적 발화의 진중(珍重)함에 진중(鎭重)한 시인이 몇이나 있을까. 시적 발화를 진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결코 달뜨는 법 없이 조촐한 마음을 시로 한 땀 한 땀 옮겨 적었다. 진리의 성체인 종교가 신을 향한 경배(敬拜)라면, 시는 인간을 향한 경배이다.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어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을 향한 가없는 경배이다. 게다가 이들을 향한 시인의 마음 역시 호젓하고 단출하다. 조촐한 마음을 지닌 인간이란 어떠한가. 세상의 큰 진리를 깨우쳤다고 애써 부풀리기를 버렸기 때문에 아담하고, 엉터리 이념을 진리라고 떠벌리기를 버렸기 때문에 깨끗하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論語] 「衛靈公」)라고 하였다. 조촐한 인간을 향한 끝없는 경배에 온 힘을 다한 황선하 시인의 시를 읽는 작금의 상황이 더욱 남다르다 하겠다.
--- pp.87-88「조촐한 사람을 향한 경배 - 백청 황선하의 시」중에서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삼류 시인’, ‘넝마주의’, ‘거지’, ‘바보’, ‘창동 허새비’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가난하다. 우리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무엇이 있는가 보고 다시금 올라와야 한다.” 그러던 그가 다시금 올라오기에 힘겨워하다가, 결국 2005년 12월 14일, 그의 나이 64세에 영면하였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기연아(寄淵兒)」라는 글을 따오면서 말했다.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며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고 허위를 풍자하며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시집 [창동 허새비의 꿈]의 「책머리에」)
“살아 있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로 살았던” 삶의 치열성, 문학적 위대함으로 승화된 그의 문학이 고흐의 노오란 해바라기 종이꽃 그림처럼 사위어 가도 2000년 실천문학사에서 발간한 그의 시집 제목처럼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 pp.142-143 「대항 담론, 모순과 부조리 - 이선관의 시」중에서
이 글을 맺음에 있어, 크리튼(kriton)의 말을 떠올린다. “자네가 보다시피 대중의 의견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네. 한번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되면 최소의 화가 아니라, 최대의 화를 입게 된다 말야.” 신상철은 우리나라 수필계의 거목이다. 경남 문단의 큰 바위 얼굴로서 귀감인 동시에 내 개인적으로는 스승이다. 언뜻 신상철 문학의 그림자를 말한다고 해서(이것이 ‘최대의 화’라고 한다면) 그 빛을 이야기하지 않은 법이 결코 없다는 것을 밝혀 둔다. 플라톤이 말하듯 진리는 그 몸이고 빛은 그 그림자이다.
신상철의 생애, 마지막 일곱 번째 수필집 [생활 속의 이 생각 저 생각]에 수록된 「생명의 촛불」의 한 구절이다.
힘이 빠르고 숨이 차츰 가빠지게 되는 날 나는 차츰 죽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유의 로고스에서 반환을 완성’할 때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 빠져 깊이 잠들고 말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들을 놓아둔 채 내 주변에 따르던 이들의 곡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듣지 못한 채로 말이다.
일흔 살을 눈앞에 두고 쓴 글이다. 유치환의 시 「序列 - 주검의 노래」과 「나는」을 인용 시로 끌어와서 죽음에 관한 소회를 밝혔다. 유치환 「서열」에서의 시적 발화, “微塵 聲量으로/환원하는 산악이며/穹蒼도 悲戀도 衣裝도/한 오라기 焦慮턴/사유의 로고스에서/놓여나는 返還을 완성하고”에 눈길을 두어 되새겼다. 아주 작은 티끌 같은 소리로 본디의 상태에 다시 돌아가는 산악과 같이, 맑고 푸른 하늘도 애절한 그리움도 옷차림도 한 오라기 애를 태우며 생각했던 사유의 로고스, 그 이성의 자유로부터도 놓여져, 왔던 길을 되돌아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일체 함묵(緘默)에의 무종(無終) 서열” 이른바 허무마저 극에 달해 늘어서는 죽음이라는 것. 병고에 따른 죽음을 예감해서일까. 칠순을 넘기면서 낸 마지막 수필집, 그 이후 4-5년에 걸친 투병 생활을 감내하며, 한 생애의 갈피를 접었다.
--- pp.170-171「경남 문학의 선구적 표징 - 유천 신상철의 문학」중에서
[신작품] 동인의 시적 제재가 자연에 대체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확연하다. 조약돌, 해변의 소라, 눈, 동백꽃, 갈대, 호수, 달밤, 나무, 숲길, 낙조, 바다, 꽃, 오월, 가을, 낙엽, 별 등 여럿이다. 자연 대상의 단순한 묘사 혹은 감정이입에 머물러 있어 학생 문예다운 습작품도 눈에 띈다. 한국전쟁기 피난지 부산의 척박한 처지에 내던져진 이들이 줄기차게 자연을 빌어 시를 쓴 까닭은 무엇인가? 이를 치기 어린 감상성, 자연의 모방으로서 시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치부(置簿)해서는 안 된다. 앞선 연구자들이 적시한 바와 같이, 주된 정조가 서정성에 있다고 하나, 작품의 성향을 재단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신작품] 동인작의 서정의 지향점을 천착(穿鑿)하는 노력이 따라야 하겠다.
--- p.176 「한국전쟁기 부산, 순정한 시의 정신 - [新作品] 제1집에서 제5집까지를 중심으로」중에서
괴테가 에커먼과의 대화에서 자기의 작품 중에 문학적 영향을 입은 흔적을 캐 보려는 시도에 대해 “살찐 인간에게 그가 지금까지 섭취한 영양의 근원인 소, 돼지, 양 등의 수를 물어보라”고 반문한 것과 같다. 다만 블록(Haskell M. Block)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문학이 발생하는 통로가 상호 영향과 교감이라는 차원에서 되짚어 보자는 것을 밝혀 둔다.
특히 김춘수의 경우, 릴케의 정신과 창작 태도(특히 ‘나’를 버려야 진정한 ‘나’를 찾는 길,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가 영성을 지니는 내면의 풍경)를 알아차림으로써 사물시의 독자성을 열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예사롭게 지나칠 일이 결코 아니다. 더 나아가 꼼꼼하기 짝이 없는 그가 여하간의 술회와 자신의 글에도 등장하지 않고 누락시킨 그의 역시집 [동경]은 에스깔비의 이른바 “창조적 배반”을 떠올릴 만큼, 시적 언어는 물론 새로운 리얼리티로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들여 쓰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릴케의 삶의 태도와 죽음의 관점을 자신의 작품에 재현하는 모방풍(parodish) 역시 김춘수의 초기 시를 읽어 내는 주요한 실마리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212 「1951년 마산, 김춘수와 R. M. 릴케와의 내면적 거리 - 김춘수 · 김수돈 찬역, [릴케 시초 - 憧憬]을 주목하며」중에서
이념의 적만 가득하고, 허구적인 논쟁에 나라가 좀이 슬고 있다. 역사는 이념의 적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환멸 속에 무너지는 것이라는 엄정한 진리를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숱한 사람들이 정치라는 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뿐 아니라,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는 국가의 총체적 위기이다.
유토피아적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이 끝없는 불확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 참되고 열심히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이, 혹은 그러한 진리가 통하는 세계이어야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세계의 파멸은 정치제도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비열함 속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보들레르). 정치제도의 환멸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새로운 비전을 열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 의식이라도 있게 마련이지만, 사람이 삶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암울한 순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에 가까운 것이 되는 것이어서 참으로 두렵다. 마산 3.15 의거시가 암울한 순간에 촉발되었듯이,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정의로움을 떨칠 수 있는 시가 실존할 수 있기 바란다.
--- p.256 「마산 3.15 의거시의 정신사」중에서
그의 시적 편력을 살펴보면서 그에게 있어 시는 첫 시집 「뜰 자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흐르는 고임” “속의 삶”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다. 그의 시는 강박적 현실로부터의 낯설게 하기이며, 그의 삶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으로부터 유배되어 자아의 유폐였다가, 깊숙한 물의 어둠에서 땅의 뿌리에서, 상승의 물관부를 어렵사리 찾아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까닭에 고인 듯하지만, 끝없이 흐르고 있는 시, 흐르고 있는 듯하지만 고인 듯한, 삶의 질곡을 넘어서 정남식이 펼칠 시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지극히 고전적인 말씀을 끌어온다고 하겠지만 정한모 시인은 시인이란 “절망을 확인하고 희망을 마련하기 위해서, 심령의 기갈(飢渴)을 채우기 위해서, 기계와 동물 사이에서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자기의 존재와 내부 세계를 확인하고 이를 전개시키기” 위한 존재라 하였다. 자기 구원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확인케 하는 시와 위대한 희망을 버리는 삶, 한갓된 이름마저 버리는 영(零)의 사막에서 찬란한 별빛에 잠들 때일 것이라 믿는다.
--- p.271 「흐르는 고임 속의 삶, 숙명적인 시 - 정남식의 시」중에서
오지(奧地)에서 찾은 오지(吾地)이다. 말하자면 일상의 ‘나’에 침잠하여 ‘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마음의 오지에서, 진정한 ‘나’를 찾은 환의 공간이 허공과 허방이다. 게다가 꽃가루, 혹은 꽃잎들의 손금으로 표상된 ‘나’의 존재가 허공에 새겨지더라도, 그 내면적 생의 파동만으로도 가슴 벅찰 것이라는 정이경 시인의 삶의 태도와 세계관. 허명을 버리고 느리게 걸으며 눈과 귀를 열어 내면의 파동만으로 가슴 벅찬 그 순일(純一) · 순정(純正)한 시의 길. 이는 목숨을 잃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정언명법(定言命法)의 도덕률을 견지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이자 자신의 묘비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에 대해 더 자주 더 오래 생각할수록 늘 새롭고 끊임없이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채워 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
--- p.289 「순정(純正)한 시의 길이 아름다운 까닭 - 정이경의 시」중에서
‘체통자구불능불호(體痛者口不能不乎)’(「鄧析子」)라 하였다. 몸이 아프면, 혹은 고통스러우면 으레 앓는 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알 길 없는 고통은 오롯이 제 몫이다. 더 나아가 시인의 시 창작에 있어 앓는 것에도 법이 있다. 아프거나 괴롭지 않은데, 짐짓 거짓으로 꾸미거나 보태어 엄살을 피우는 짓은 애당초 글렀다. 아프고 괴로웠던 이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듯이, 사람과 세상을 향한 이해의 지평을 열어 나가는 자리에 아픔의 시가 있다. 그것은 시인이라는 존재가 “저 광막한 양지쪽에 반짝거리는 파리의 소리 없는 소리처럼 나는 죽어 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김수영, 「파리와 더불어」)
--- pp.307-308 「아프니까, 시인이다 - 최재섭의 시조」중에서
“병이 같으면 서로 가엾게 여기며, 근심이 같으면 서로 구원한다(同病相憐同憂相救)”라고 하였다. 이는 “여울에 떨어진 물이 서로 어울려 다시 함께 흐르네(瀨河之水因復俱流)”와 같다.(趙曄, [吳越春秋] 「闔閭內傳」) 시는 본디 심정(心情)의 동화(同化)에서 비롯되었다. 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너의 뜻과 정에 맞닿아 있으므로 남을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를 언어로 부려 내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시란 정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詩者 根情 苗言 華聲 實義)”(「與元九書」)라고 설파한 까닭은 [시경(詩經)]의 현실주의 정신의 계승으로서, 시가 나아가야 할 길이 민생의 고통에 동심(同心) 동행(同行)하는 순일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
현 단계 욕망과 소비의 객체로 전락하여 비인간화로 치닫고, 인간의 천적은 인간이어서 본성이 뒤틀리고 단절의 소외감이 극대화될 때 인간의 진정성에 관해 소박한 물음을 제기한 시인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낯설지 않은지, ‘나를 포함한 너’도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지, ‘나만의 기쁨’이라는 기쁨의 죽음을 거부하고 ‘나-너의 슬픔’이라는 동심 동행의 순일한 마음가짐으로 삶의 태도를 겸허하게 성찰하는 시인이 있다. 손연식의 시를 살펴보는 까닭이다.
--- pp.309-310 「동심(同心) 동행(同行)의 시학 - 손연식의 시」중에서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그 허망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죽음은 따뜻한 상처이고 후끈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신혜지 시의 정점이다. 따라서 빛바래고 사위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향한 정념이 그의 시의 거멀못이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들을 향해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을 시로 옮겨 적었는데, 결코 어둡지 않아 명랑한 희망의 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호쾌한 멋으로 그득하다는 점이 빼어나다. 희망은 신혜지 시의 사상이며 삶의 원천이다. 희망의 면류관으로 세상 사람의 절망을 끌어안는 시인으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 p.346 「따뜻한 상처, 후끈거리는 사람, 사랑의 시 - 신혜지의 시」중에서
1924년 에베레스트 3차 등반 중 실종된 조지 맬러리가 등반을 앞둔 미국 강연회장에서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에 꼭 오르려 하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고 답했다. 수필가 백남오에게 “당신은 왜 지리산에 꼭 오르려 하느냐?”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영혼과 같은 문학이 있기 때문에.” 고독과 자유와 구원으로서 지리산 문학이 지닌 영원성은 실로 위대하다.
만약 만물의 근원인 지리산, 그 정령(精靈)의 순수한 세계에서 하산하여 속세의 욕망과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앞세우는 헛된 정념의 너울을 좇아 살아가게 될 때, 그의 문학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유보(留保)된 결론이다. 마음의 본체와 같은 지리산의 영묘(靈妙)한 기(氣)가 “욕(欲)에 잠겨져서 천리(天理)가 어두워지고, 기운도 또한 막히어서 인륜(人倫)이 폐하여지고, 천지 만물의 생(生)을 이루지 못할”(조광조, [靜庵集]) 터이기 때문이다.
--- pp.360-361 「고독, 자유, 구원으로서 지리산 문학 - 백남오의 수필」중에서
진부자 수필가는 “만약 글을 잘 쓰는 것이 꿈이고, 그 또한 신분 상승이라면 그 끝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라고 한다(「신분 상승」). 그러나 본인은 작가가 나아갈 길이 ‘신분 상승’이 결코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한다. 인간의 사회적인 위치와 서열적 계급의식이야말로 얼마나 헛되고 터무니없는 일인가. 오히려 본인은 진부자 수필가의 오늘을 인간 승리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라는 제호(題號)처럼 그녀는 세월을 무망(無望)한 강물처럼 흘려보내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세월을 헤아리는 강물 그 자체가 되었다. 낙조청강(落照淸江), 해 질 무렵 맑은 강이 진부자 수필가의 본바탕을 가장 잘 나타낸 진경(眞境)이다.
--- p.376 「고백과 모티프의 수필 미학 - 진부자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