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는 이번 퀘스트를 마치고 나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당분간 푹 쉬고 싶었다.
“다 잊어버리고 지난번처럼 어디 남해안 같은 곳에 가서 쉬다 오는 거야. 한 일주일 정도…….”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꿀맛 같은 휴가를 원했다.
“음, 근데 남해안이 바가지요금은 심하지 않더라도 비쌌는데. 멀어서 교통비도 많이 나오고.” 휴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뇌가 이어졌다.
“그냥 〈로열 로드〉 내에서 휴가를 보낼까. 요즘에는 그러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 그것도 꽤 괜찮겠군. 바닷가에서 낚시를 해서 꽁치나 구워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일주일은 좀 너무 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서 레벨이나 스탯이 뒤처진 걸 복구하려면 한… 사흘 정도?”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막의 대제왕 그리고 중앙 대륙을 휘젓고 다닐 정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무력도 엄청나다. 그러나 원래의 몸과 시간대로 돌아가게 되면 레벨도 400대에, 헤르메스 길드에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바드레이를 만나면 또 당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흘도 길어. 으음, 일요일 하루 정도는 푹 쉬어 줘야… 아냐.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서 저녁에 모라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따뜻한 햇볕이나 받으면서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3분 후 결심했다.
“열심히 사냥하고, 보상 좋은 퀘스트로 뭐가 있나 알아봐야지. 전쟁의 시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앞으론 더 열심히 살아야 돼!”
--- pp.45~46
“혜, 혜연아, 너 술 못 마시는 거 아니었니?”
“술요? 없어서 못 먹죠. 마시려면 비싸고 돈 아깝잖아요.”
연속 세 잔의 폭탄주가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안주도 먹으면서 마셔.”
“술맛 떨어져서 안 돼요.”
엄격하게 술을 마시는 이혜연이었다.
(……)
“그럼요. 어릴 때는 조금 놀았거든요.”
“하하, 껌 좀 씹고 다녔어?”
“아니요. 친구들이랑 면도날 씹을 때 많이 마시고 다녔죠.”
이혜연은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져서 말수가 많아졌다.
“어릴 때는 원래 철이 없고 그렇잖아요. 밤새도록 마시고 패싸움하고, 지나가는 애들 삥도 뜯고 욕도 하고.”
“위험하게 놀았구나. 무슨 사고 같은 건 안 일어났고?”
“별다른 건 없어요. 친구 중에 1명이 오토바이 타다가 식물인간 된 정도? 아, 참! 걔 얼마 전에 깨어났다고 연락도 왔는데 공부하느라 바빠서 못 갔어요. 전화라도 해 봐야 되는데.”
“…….”
“그렇게 놀다가 오빠한테 걸렸어요.”
“오빠가 화 많이 냈겠구나?”
“네. 처음으로 다리가 부러져 봤어요. 그때 3달간 꼼짝없이 방바닥에만 누워 있으면서 생각했죠. 다음에 걸리면 진짜 사지가 다 부러지겠구나. 오빠한테 안 걸릴 자신은 없고… 그래서 그 후로 어쩔 수 없이 정신 차리게 됐어요.”
탈선하는 청소년이던 이혜연을 바로잡은 건 오빠의 과감한 폭력이었다.
--- pp.128~129
위드가 말살의 검을 들고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들모레 요새의 내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돌로 된 바닥이 울리면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군사 요새인 만큼 통로를 넓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꽉 찬 느낌을 주었다. 사실상 그냥 공중으로 뛰어서 오면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남들 싸움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괜히 멋있어 보이지 않겠는가. 은은한 겉멋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남자의 자존심!
“어엇.”
전쟁터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위드를 보며 경악했다. 엄청난 체구에, 전투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각진 근육으로 위압감이 넘치는 몸매, 가공할 화력을 뿜어내는 말살의 검. 지옥의 문이 열리고 먹구름이 몰려와서 날이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환한 머리!
“저 대머리 거인은 뭐지?”
“…….”
사막의 대제로서 머리가 벗겨진 채로 활약을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만 머리카락을 만들지 않았다. 우람한 육체에 잘생긴 얼굴,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없어서 오히려 더 야성미가 넘쳐흘렀다. 진정한, 나쁘고 못되고 사악하고 고집 강한 남성다운 느낌이랄까!
--- pp.287~288
“이 정도면 내 죽음을 맞이하기에도 괜찮은 무대로군. 쓸쓸하지는 않겠어.”
위드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이 되겠군.”
위드는 땅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기왕 죽는 것, 유성의 낙하를 지켜보면서 멋지게 죽고 싶다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온통 붉게 물들고,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유성들이 긴 꼬리를 드러내며 지상을 향하여 떨어지고 있다. 이런 장관은 어디서도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위드의 머리 위에 축축하고 벌름거리는 무언가의 콧구멍이 닿았다.
푸흥!
조금은 참기 힘든 퀴퀴한 냄새.
“쌍봉아, 저리 가.”
푸흐흐흥!
“쌍봉아, 냄새 난다니까. 넌 어째서 그렇게 씻겨도 계속 냄새가……. 쌍봉이가 왜 여기 있지?”
위드가 벌떡 몸을 일으켜 보니 정말로 거짓말처럼 쌍봉낙타가 주둥이를 오물거리면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절망으로 가득하던 눈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 pp.352~353
도처에 일어나는 스켈레톤, 듀라한, 데스 나이트 등의 하급 언데드들. 그들은 부서져도 계속 일어나면서 광신도들의 이동을 가로막았다. 위드는 이제 체계화된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만 하더라도 전황에 맞춰서 급박하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을 한 면이 많았다.
“토리도.”
“왜 부르는가.”
“저기 너 먼저 가 봐.”
모툴스가 있는 지역은 신성불가침의 영역! 침입자들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모툴스를 지키는 보호병들은 매우 강해진다. 그런 곳에는 당연히 토리도부터 던져 봐야 하는 법! 전투력에 있어서는 막내이지만 뱀파이어 로드의 특성에 의해서 생명력은 가장 많았다.
“싫다.”
“왜?”
“위험해 보인다. 꼭 내가 가야 하는 것인가?”
“너의 선택권을 존중해 주지. 나한테 맞아 죽을래, 저기 가서 죽을래?”
“으음, 저기 가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 pp.424~425
“으음, 안 돼.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위드는 지금의 명성도 지키고 모험도 방송국에 계속 중계하기 위해서 퀘스트는 가능하면 성공시키고 싶었다. 천문학적인 광고 수입! 모험과 사냥으로 얻은 아이템을 팔아서 버는 돈도 있지만 방송국들이 안겨 주는 숫자 개수는 다른 출연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눈먼 돈이 따로 있겠는가. 위드도 부유하고 넉넉한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배고프던 과거는 이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최근 버는 돈이 많다 보니 호의호식, 사치가 몸에 배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야.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고, 지출도 많이 커져 버렸어.”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햄을 나눠 먹지도 않고 한 조각씩 통째로 먹으니 이제는 누가 봐도 중산층이었다. 머리를 감을 때에도 보일러를 틀어서 따뜻한 물을 쓰고 시장에서 제철 과일까지 사다 먹으니,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pp.505~506
“예상대로 하벤 제국에는 안되는군.”
유병준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로열 로드〉의 방송을 봤다. 인공지능의 스크린으로 모든 화면들을 볼 수가 있었지만, 방송국 해설자들이나 시청자들의 생각도 궁금했던 것이다.
― 북부가 계속 패배하고 있는데요, 하벤 제국군은 역시 무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 무신 바드레이와 그의 친위대는 전쟁에 아직 나서지도 않았는데요, 과연 하벤 제국이 중앙 대륙을 통일할 만했다고 보입니다.
―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도 이런 전력을 다 꺼내 놓지는 않았는데요. 하벤 제국의 역량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 이 가늠하기 어려운 위기, 과연 전쟁의 신 위드가 돌아오게 되면 극복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위드의 퀘스트도 곧 중요한 분기점에 다다르게 될 텐데, 하벤 제국과 북부군의 전쟁까지, 시청자들이 한눈팔 사이가 없이 계속 대형 사건이 벌어지게 되겠군요.
― 위드라면 모험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업적은 대부분 전쟁보다는 모험으로 일구어 낸 것입니다. 뭐, 불사의 군단과 싸우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퀘스트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중요한 시기에도 모험에 빠져 있다니, 국왕으로서의 정체성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 어쩌면 이미 자신의 왕국을 포기했을 수도 있죠. 지금 이 상황을 보면 현명한 판단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네요.
--- pp.618~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