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사랑하는 형님 햄릿 왕이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새록새록 뇌리에 맴돌기에 온 왕국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슬픔에 젖어 있는 게 합당한 처신이겠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 본성을 누르는 분별력을 되살려 형님을 충분히 애도하면서도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되새겨보았소. 그래서 한때 형수였으나 이제 미망인이 되어 왕실 자산 취득권이 부여된 이 나라 왕비인 이 여성을 전시와도 같은 이 나라 국력에 보탬이 되고자 이를테면 웃지만 웃는 게 아니고, 한 눈은 행복에 한 눈은 수심에 차고, 장례에 찬가를 혼례에 만가를 부르듯, 환희와 비탄을 똑같이 저울질하면서 짐의 아내로 맞이했소. 또한 짐의 혼사 문제에 경들의 현명한 고견을 깊이 새겨듣고 빠짐없이 반영하였소.
--- 「제1막 제1장」 중에서
햄릿: 하늘이여 땅이여, 기억이라도 안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받아먹을수록 더욱 갈구하게 되기라도 하듯 아버지에게 그토록 매달리셨는데, 그래 놓고 겨우 한 달 만에 - 아, 더는 생각을 말자, 연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 니오베처럼 눈물로 뺨을 적시며 가엾은 아버지 시신을 따라갈 때 신던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 하나님! 이성이 없다는 짐승이 차라리 그보다 오래 애도했으련만 -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 삼촌과 결혼하다니. 나랑 헤라클레스를 비교할 수 없는 것만큼 아버지 동생이라지만 조금도 안 닮는데. 한 달이 멀다 하고 가짜 눈물의 소금기로 붉어진 눈시울이 채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화촉을 올렸지. 무섭게도 빨리, 능란하게 근친상간의 잠자리로 들어서다니. 좋지 않은 일이고, 좋게 마무리될 리도 없어. 하지만 입도 뻥긋 못하는 내 신세라니,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 「제1막 제2장」 중에서
유령: 나는 자다가 난데없이 동생 손에 생명도, 왕관도, 아내도 한꺼번에 빼앗겼고, 내 죄가 만개했을 때 꺾인 터라 영성체도 못 받고, 고해성사도 못 하고, 종부성사도 못 받고 내 모든 결함을 머리에 인 채 심판대로 보내졌다. 아, 끔찍하고, 끔찍하다. 이보다 끔찍할 수는 없다! 네게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아직 남아 있다면 참지 마라. 덴마크 왕의 침상이 현란한 욕정의 잠자리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복수를 강행하려 하더라도, 네 마음을 더럽히거나 어머니를 단죄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양심의 가책에 찔리게 내버려 두어라.
--- 「제1막 제5장」 중에서
폴로니우스: 그래서 왕자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좀 더 세심하게 왕자를 살펴보지 못한 내 불찰이다. 난 왕자가 너를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다가 네 평판만 나빠질까 봐 그저 걱정되었을 뿐이었는데. 무턱대고 의심만 한 게 안타깝구나. 젊은이들은 종종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해서 문제고 우리 같은 노친네들은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이지. 어서 궁으로 갈 채비를 해라. 전하께 이를 반드시 알려야 한다. 왕자의 사랑 얘기를 꺼내 미움을 사는 편이 낫지, 괜히 비밀에 부쳤다가 나중에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지. 가자.
--- 「제2막 제1장」 중에서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잔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고통스레 맞아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온갖 문제에 맞서 그들을 끝장내는 게 더 고귀한 일인가? 죽는다는 것은 자는 것. 그뿐이야. 그리고 잠을 자면 나약한 인간이 감내해야 할 두통과 오만가지 충격도 다 끝나겠지. 그거야말로 바라던 건데.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것, 잠자면 꿈을 꿀지도 몰라. 아, 거기에 함정이 있구나.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죽음의 잠에 빠질 때 어떤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잠시 머뭇거리는 수밖에. 그게 바로 인생이란 재앙을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참아내는 이유겠지.
--- 「제3막 제1장」 중에서
햄릿: 여자들의 화장술에 관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신이 그대들에게 하나의 얼굴을 주셨는데 그대들은 자신을 또 다른 얼굴로 만들지. 살랑살랑 느릿느릿 걷고, 혀짧은 소리로 애교를 부리고, 신의 창조물에 별명을 붙이고, 끼를 부리면서도 몰랐다고 그러지. 흥, 더는 그런 데 빠져들지 않을 테요. 그 때문에 내가 미쳤으니. 선언컨대, 이 땅에 결혼은 이제 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야 -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 그대로 살게 되겠지만, 나머지는 독신으로 살게 될 것이다. 수도원으로 가시오.
--- 「제3막 제1장」 중에서
햄릿: 극 중에 내가 자네에게 말했던 아버지의 사망 당시 상황을 비슷하게 재현하는 장면이 있어. 그 장면에서 내 삼촌을 유심히 관찰해주게. 삼촌이 그걸 보고도 내색하지 않는다면 그 유령이 악령이었던 거고 내 의혹은 불칸의 대장간처럼 너저분한 망상에 불과했던 거지. 나도 뚫어지게 그를 쳐다볼 테니 잘 살펴보게. 그런 다음 서로 만나서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 죄가 있는 것 같은지 아닌지 함께 결론을 지어보세.
--- 「제3막 제2장」 중에서
햄릿: 이제야 때가 온 것 같군. 지금 기도하고 있으니, 그래, 지금 해치우겠어. (칼을 뽑는다) 그러면 저자는 천국으로 가고 있는데 나는 복수를 하는 거네. 음,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 악당이 내 아버지를 죽였고, 복수한다면서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바로 그 악당을 천국으로 보낸다고? 오, 그게 무슨 복수야, 천국행 서비스지. 저자는 아버지가 원기 왕성하여 아버지의 죄도 오월의 꽃들처럼 만개한 때를 골라 무참히 살해했지. 그러니 아버지가 어떤 죗값을 받게 될지 하늘 말고 누가 알겠어? 그저 우리 세상을 돌아보고 생각해보면 중죄겠구나! 짐작하지. 그런데 저자가 천국에 가기 알맞게 고해성사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는 이때 내가 복수를 하겠다고? 안 될 말이지! 거두어라, 칼아, 더 끔찍한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칼을 집어넣는다)
--- 「제3막 제3장」 중에서
햄릿: 영토 다툼처럼 흔한 사례도 나를 훈계하는구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저 연약하고 여린 왕자는 야심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아직 일어나지 않는 사건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죽을 수도 있고 확실치도 않은 것에 운명과 죽음, 위험을 모두 내걸었다. 고작 달걀 껍데기만 한 땅이나 차지하려고. 진정으로 위대하다는 게 뭔가? 대단한 명분 없이는 미동조차 안 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달린 한 지푸라기 하나로도 싸울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난 어떤가? 아버지가 살해되고 어머니가 욕보인 이곳에서 명분도 충분하고 피도 들끓지만 모두 잠재우고 있구나!
--- 「제4막 제4장」 중에서
햄릿: 아, 호레이쇼, 아무도 진실을 모른 채 내가 가고 나면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얼마나 떠돌겠는가. 자네 마음속에 내가 조금이라도 자리 잡고 있었다면 죽음의 달콤한 휴식을 잠시 미뤄두고 이 험난한 세계에 좀 더 머물며 고통스러운 가슴을 부여잡고 내 사연을 좀 전해주게.
--- 「제5막 제2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