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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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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652쪽 | 926g | 153*224*33mm
ISBN13 9791156122807
ISBN10 115612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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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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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인민들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식량난이었다. 김일성의 고백에 따르면, 전국 100만 농가 중 36퍼센트가 수확기를 5∼6개월 앞두고 식량이 바닥나는 상황을 맞았다. 1955년경 북한 주재 중국대사도 “2월에 이미 인민들의 식량이 떨어졌다”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 p.39

결핵이 만연한 데다, 오염된 우물을 사용하는 주민들 사이에 이질이 퍼져 있었다. 기생충 감염은 북한 주민 80퍼센트 이상이 겪고 있던 일반적 질병이었다.
--- p.40

수매를 강요당한 농민 300여 명이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1955년 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아사자는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했다. 걸인과 유랑자가 급증한 데다 절도와 강도 행각이 줄을 이었다.
--- p.45

개인숭배 비판과 평화공존론이 북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이 획기적 노선은 1955년경부터 북한에 부과돼,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 구축에 필요한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재정립을 모색하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 p.56

북한 지도부는 소련의 문화적 영향력을 제한하기에 앞서, 1955년 중반부터 더 근본적인 조치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소련과 소련대사관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소련계 한인들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 p.64

1955년 4월경 최용건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직된 “반탐오 반낭비 투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간부들의 경제 비리 적발에 주력한 반탐오 반낭비 투쟁의 주요 표적은 바로 소련계 한인 간부들이었다. 직권을 남용해 소련과 중국에서 들여오는 물자를 착복하고, 밀수입한 귀중품들을 비싼 값으로 암시장에 내다 파는 이들 대부분이 소련계 한인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 p.74

김일성이 “숙청의 돌격대”로 내세운 권력의 실세들 중에는 고려인인 박창옥 · 박영빈 · 박정애와 함께 박금철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네 명은 모두 “박朴” 씨 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른바 “사박가”로 불렸다.
--- p.80

사상문화 전선 고려인 간부들이 비판받은 다음 날인 1955년 12월 28일, “전국선전선동일꾼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 참가한 김일성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바로 이 연설에서 자주성을 의미하는 “주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했다.
--- p.94

1956년 1월 18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 상무위원회는 주체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여겨진 박창옥 · 박영빈 · 기석복 · 정률 · 전동혁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의 결정서 〈문학 · 예술 분야에서 반동적 부르죠아 사상과의 투쟁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는 남로당계 작가 들을 지원한 그들에게 “간첩분자”가 아닌 “반동적 부르죠아 분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 p.95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원들 중에도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에 깊이 공명한 이가 있었다. 그는 1955년 7월 20일 소련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에 취임한 이상조였다.
--- p.119

이상조에게 김일성 개인숭배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독재를 공고화하며, 인민들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은 만악의 근원이었다. 북한에서도 개인숭배는 청산되어야 했다. 감히 떠올리지 말아야 할 불경한 생각을 품은 그는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는 절친한 선배 동지 최용건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 p.120

이론적 소양이 부족했던 김일성은 동료들의 공로를 가로채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상조는 《김일성선집》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 선집에 수록된 논문과 보고문 중 과연 몇 편이 김일성 동지가 직접 집필한 것이겠는가 · ” 그는 그 글들을 김일성 명의가 아닌, 조선 노동당 명의의 보고집으로 출판했어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 p.131

이상조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만이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영예를 독식하고 있는 반면, 자신이 관여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역사를 비롯한 여타 조선 민족의 숭고한 항일투쟁사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 p.149

소련계 한인 당 중앙위원이 10명에 지나지 않은 반면, 연안 출신 당 중앙위원은 19명에 달했다. …… 김일성 개인숭배에 반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비친 연안 출신 인사들 중에도 당 중앙위원에 발탁된 이들이 있었다. 서휘 · 윤공흠 · 고봉기가 중앙위원에, 이상조가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 p.153

이상조는 “김일성 동지의 동의 없이 어떻게 위대한 수령, 천재적 영장, 전설적 영웅 따위의 극존칭이 생겨났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아첨꾼들을 당 지도부에 등용하고 그들의 아첨을 조장한 일차적 책임이 지도자 본인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 p.180

김일성 · 박정애 · 박금철 · 박영빈 · 김두봉 · 최용건으로 구성된 6인의 정치위원들 가운데 전문가 출신 관료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경제 문제에 관한 한 모두가 문외한이었다. 따라서 경제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김일성의 제안이 “집체적” 검토와 토론 없이 그대로 채택되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그렇게 채택된 결정은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 p.201

그의 고백은 점점 핵심적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 북조선에 만연한 개인숭배는 도무지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쥔 채,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혼자 결정을 내립니다. ……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 중 누구도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노동당이 집체적 지도원칙을 고수해왔다는 그들의 주장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 p.206

약 50일간에 걸친 북한 대표단의 해외 순방은 비판적 인사들의 세력 규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서휘 · 윤공흠 · 이필규 · 고봉기 · 이상조가 주축을 이룬 소장그룹의 문제의식에 공감한 최창익은 그들의 리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연안 출신 인사들의 결속과 의기투합보다 더 눈부신 진전은 그들과 소련계 한인들 간 연대였다.
--- p.225

주소 대사 이상조가 소련 측에 전달한 조선노동당의 당면 과제들에도 그 세 가지 문제가 모두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인민 생활 개선, 김일성 개인숭배 청산, 당내 민주주의와 집체적 지도원칙 확립, 당 지도부와 내각의 아첨 분자들 제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조선 민족해방운동사 재검토 등의 과제를 제기했다.
--- p.231

김일성과 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인 7월 20일에 방문 …… 박창옥은 그의 의중조차 떠보지 않은 채, 다짜고짜 비판세력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김두봉 · 최창익 · 서휘 · 고봉기 · 이필규 · 윤공흠 · 김승화와 자신이 곧 개최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지도부 비판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반기를 든 비판세력이 내세운 기치는 개인숭배 청산과 인민들의 생활난 해결이었다.
--- p.268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이래 처음으로 도전에 직면한 김일성은 비판세력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지 여부가 당내 권력투쟁의 향방을 가를 결정적 변수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 그는 고려인 남일과 박정애를 동원해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필사적 외교를 펼쳤다.
--- p.274

당 지도부가 전원회의 개최 일정을 비밀에 부친 점도 그들의 계획에 큰 타격을 입혔다 …… 계획대로라면 1956년 8월 2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비판세력의 계획과 전략에 혼선을 일으킬 의도로 갑자기 전원회의 소집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당혹스럽게도 그들이 다시 소집을 공지한 시점은 전원회의 개최 하루 전 날이었다.
--- p.276

페트로프와 필라토프가 보인 대북정책상의 혼선은 1956년 8월 2일 김일성에게 전달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문을 통해 말끔히 정리되었다. 이 문건은 조선노동당의 사업 과정에서 드러난 과오를 비판하되, 김일성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비판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곧 그것은 김일성의 실각을 바라지 않은 소련 공산당의 우회적 입장 표명에 다름아니었다.
--- p.282

이상조는 최창익이 노동당을, 김일성이 내각을, 최용건이 군을 지도하는 형태의 집단지도체제가 실현되길 바란다는 비판세력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수상직 유임에 기초한 비판세력의 이 권력 분산안은 그들의 원래 복안이라기보다, 일종의 양보안이자 타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도 갑자기 대외정책을 변경한 소련이 김일성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굳혔음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97

중국의 반대 탓에 이상조의 서한 발송은 무산되었다. 중국은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조언을 무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서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 남짓 지난 1956년 중반경, 북중 관계는 “혈맹”이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양국 사이에 싸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 p.299

결국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에 걸쳐 개최된 당 중앙 상무위원회 특별회의는 비판세력에 그대로 어떠한 소득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소련의 지지를 상실한 데다 수적 열세 속에서 당 지도부를 대적해야 했던 비판세력 인사들의 참패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 p.309

박의완은 당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털어놓은 뒤 간절하게 도움을 호소했다.“ 조선노동당 내 진보적 세력에게 출로를 터주어야 합니다. 김일성 동지는 당 지도부의 결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진보적 세력에 재갈을 물릴 방법만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소련공산당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p.313

1956년 8월 30일 오전, 여느 때와 달리 평양 일대에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될 내각 회의실로부터 서평양에 이르는 대로가 봉쇄되 었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20여 리 지점에 위치한 간리間里에도 긴장감이 흐르긴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집결한 두 개의 보병사단은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즉각 출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p.316

최창익의 개입과 함께 장내 소동은 절정에 달했다. “반당분자는 토론을 중단하라!” “반당 종파분자를 끌어내려라!” “최창익과 윤공흠을 처벌하라!” 따위의 고성이 난무했다.
--- p.323

윤공흠은 북한체제의 발족 이래 공개적으로 당 지도부를 비판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를 비롯한 비판세력의 반발은 충분히 예측된 일이었음에도 당 지도부에 큰 당혹감을 안겼다.
--- p.324

1956년 8월 31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이틀째 회의가 열렸다. 전날 회의를 총결하는 성격을 띤 이 회의는 〈최창익 · 윤공흠 · 서휘 · 이필규 ·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행위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 결정서는 비판세력의 “종파 행위를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반당적 책동”으로 규정하며 그들에게 가혹한 책벌을 내렸다. 최창익은 당 중앙위원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서 제명되고 내각 부수상에서 해임되었다. 당 중앙위원과 내각 부수상 · 기계공업상에 재임 중인 박창옥도 세 직위를 모두 박탈당했다. 전원회의 도중 사라진 윤공흠 · 서휘 · 이필규에게 부과된 책벌은 더 가혹했다. 당 중앙위원에서 제명되고 내각 상업상에서 해임된 윤공흠, 당 중앙위원에서 제명되고 직업총동맹 위원장에서 해임된 서휘,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제명되고 내각 건재공업국장에서 해임된 이필규 모두 정치적 사형선고라 할 수 있는 출당 처분을 받았다.
--- p.334

이상조는 연안 종파로 지목된 자신과 동지들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김일성 동지와 아첨분자들을 비판한 행위는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였을 뿐, 결코 당내 수령이나 내각 수상직을 탐내 일으킨 행동이 아니었다. ……” 그는 모든 당원은 이유와 근거가 있는 한 어떠한 직위의 간부도 비판할 수 있다는 당 규약을 거론하며, 당 지도부를 비판한 동지들의 행위가 합법적이었다고 역설했다.
--- p.336

비판세력의 도전이 실패한 결정적 원인은 소련의 태도 변화에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어야만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 그러나 동유럽 사태의 심각성에 위기의식을 느낀 소련이 그를 지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자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 p.337

그들의 기대는 비판과 자아비판으로 대표되는 공산당원들 간의 전통적 투쟁 방식이 김일성에게도 통용되리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안계 인사들이 선을 지키려 한 투쟁의 규칙이나 윤리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 p.338

9월 3일, 외무성 부상 이동건은 서휘 · 윤공흠 · 이필규 · 김강이 안둥현 방면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중국 측에 통보하며 공식적으로 송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그들이 일반적 월경자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상, 강제 송환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 p.346

9월 19일, 최용건과 중소 공동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 미코얀과 펑더화이는 …… 비판적 입장을 표출한 당 중앙위원들을 탄압하기보다, 민주적 방식으로 대했어야 옳았다는 일침이었다. 그들은 다시 전원회의를 소집해 8월 전원회의의 그릇된 결정을 취소하고, 다섯 명의 당 중앙위원들이 받은 책벌을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 p.369

9월 20일 저녁에 조선노동당 중앙 상무위원회 …… 김일성은 일시적 분노에 사로잡혀 신중한 고려 없이, 최창익 일파에게 과중한 책벌을 부과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형제당 대표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8월 전원회의 결정을 재심사해, 책벌을 받은 동지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제안했다.
--- p.371

중소 공동 대표단의 참석 아래 개최된 9월 전원회의는 비판세력 인사들에게 부과한 책벌을 철회했으나,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는 기존의 입장마저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책벌 철회도 부분적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 p.380

“얼마 전까지 동지가 소유한 자동차만 보더라도 ZIS-110, 방탄 ZIS, ZIM, 뽀베다(победа, 승리), 최고급 미제 승용차와 윌리스 등이 있지 않았습니까 · 수상의 봉급 규정이 있다 해도, 사실상 그것이 무제한 공급제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 동지의 출생지인 만경대에 거대한 양옥을 지어 동지의 가족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지 모친의 묘를 왕릉처럼 만들고, 도로니 무엇이니 조성해가며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습니까 · 그럴 돈으로 학교나 공장을 짓자는 인민들의 여론에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 p.394

“민족해방투쟁에 참가한 조선 혁명가들 중 김일성 동지보다 우수한 이들도 많았다. 다만 김일성 동지가 널리 알려진 까닭은 조선과 인접한 곳에서 그의 투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빨치산 부대의 지도를 당의 지도가 아닌, 김일성 동지 한 개인의 역할로 바라보는 태도도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김일성 빨치산 부대의 활동은 사실상 1940년경에 중단되고 말았다.”
--- p.398

“당원은 정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는 한, 어떤 당원이든 비판할 수 있다.” “당원은 당 중앙위원회를 포함한 모든 당 기관에 어떤 문제나 청원을 둘러싼 심의를 요구할 수 있다.”
--- p.400

1956년 중 · 후반부터 폴란드와 헝가리에 연이어 위기가 발생하자, 소련과 중국의 관심은 온통 동유럽 지역에 쏠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북한 문제는 두 대국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소련과 중국의 북한 내정 간섭을 가로막은 다른 요인은 소련이 헝가리 사태의 와중에 발표한 “10월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내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소련의 성명을 담고 있었다.
--- p.423

8월 전원회의와 헝가리 사태 이후 …… 최창익 · 박창옥을 비롯한 비판세력 인사들도 제한적이나마 자유로운 활동을 영위하고 있었다. 체제 비판에 가담한 지식인들은 제지를 당했으나, 인신 구속과 같은 물리적 처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내정 간섭이 조선노동당 지도부의 비판세력 탄압에 제동을 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의 공간이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 ‘평양의 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미지수였다. 1956년 말부터 1957년 초 · 중반까지 이어진 ‘평양의 봄’은 “폭풍 전야의 고요”에 비유될 법한 시기였다.
--- p.438

사회주의진영 내 주도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던 소련과 중국은 결국 형제국의 지지를 쟁취하려는 일념 아래, 북한의 비판세력 탄압을 묵인하는 단계를 넘어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 p.452

1958년 3월 5일, 김일성의 의도대로 8월 전원회의 사건 가담자들을 겨냥한 전당적 “반종파투쟁”의 성격을 띤 조선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가 개최되었다. …… 종파주의자들을 겨냥한 두 번째 의제가 논의될 때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연안 출신 인사들은 “반당 · 반혁명 연안 종파”로 매도되었다. 최창익과 박창옥뿐만 아니라 김두봉과 박의완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비판이 이루어졌다.
--- p.454

강도 높은 심문 앞에 무너져내린 그는 국가 전복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털어놓으라는 협박에도 굴복했다. 1958년 11월경, 그의 자백에 따라 박창옥 · 박의완 · 고봉기 · 양계 등이 체포되었다. 비판세력에 가담한 이들 대다수가 체포된 뒤 비밀 재판이 열렸다. 주도자로 간주된 최창익과 박창옥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 박창옥은 1958년 말 재판을 받자마자 총살형에 처해졌다.
--- p.460

반소적 의미와 민족주의적 의미를 동시에 함축한 “주체”의 이념도 다시 강조되었다. 1955년경 최초로 제기된 뒤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 테제는 1959년 말부터 비공개 보고와 강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선전되기 시작했다.
--- p.461

1958년 3월 초 김두봉과 박의완을 공개적으로 매장한 조선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는 8월 전원회의가 막을 내리고 1년 넘게 지속된 모호한 정치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반당 종파 사건”의 얼개와 성격도 이미 당 지도부의 구미에 맞게 짜 맞추어진 상태였다. 최창익이 이끈 종파 집단이 획책했다는 이 반혁명사건의 명칭은 “8월 종파사건”으로 정해졌다.
--- p.522

비판세력이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폭동을 염두에 두었다는 자료도 있었다. 그러나 “군사 폭동작전 계획서”라 불린 그 문건은 군사 폭동을 일으킬 목적이 아니라, 폭동과 같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효과적 진압 대책을 마련하고자 작성한 것이었다.
--- p.528

비판세력을 겨냥한 반격이 시작된 1957년 7월부터 약 1년이 지난 1958년 7월까지, 종파 집단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3,912명의 노동당원이 당적을 박탈당했다. 비판세력 지지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던 평양시와 개성시의 경우, 고위 당 간부들 상당수가 해임되었다.
--- p.534

김달현 탄압사건은 노동당의 영향권 밖에 있는 모든 정치 조직 들을 무력화할 대숙청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1958년 9~10월경 조선노동당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한 조직들 중, 회원 수가 적고 “아무런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는 비프롤레타리아 정당 · 단체들”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 p.549

1958년 10월 1일에 개최된 제2기 최고인민회의 제4차 회의는 1년 남짓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원봉을 해임한 데 이어, 그의 대의원 자격마저 박탈해버렸다. 그가 반국가적 · 반혁명적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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