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였기에 하는 일마다 새로운 개척이었고 이루는 일마다 새로운 성취였다. 1977년 개발재정 조달을 위해 도입한 부가가치세를 입안하는 실무책임자였고, 1982년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위해 추진했던 금융실명제의 담당과장이었다. 1997년 큰 상처와 좌절을 남긴 아시아 외환위기와 싸울 때는 차관이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맞서 세계 7위 수출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때는 장관이었다. 격랑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는 받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 「머리말」 중에서
재무부의 시안대로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토론과 설득이 필요했다. 실무자들은 낮에는 설득작업에 매달리고 밤에야 제대로 일을 했다. 주말도 없었고 밤샘이 일쑤였다. 영국에서는 100여 명이 했다는 일을 우리는 불과 5명이 했으니 실로 엄청나게 무거운 업무량이었다. 증원 요구를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힘들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정말로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 「01 최선 최종의 조세, 부가가치세」 중에서
8% 단일관세율이 시행된 1993년부터 고가 소비재의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면 모피의류는 1993년 124%, 1994년 167%, 1995년 129%, 1996년 105% 늘어났고, 승용차는 1994년 161%, 1995년 119%, 1996년 66% 늘어났다. 다음 해 1994년부터 경상수지는 적자기조에 들어갔고 반도체를 제외하면 적자규모는 1994년 145억 달러, 1995년 262억 달러, 1996년 382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흑자관리를 위한 8% 단일관세율은 엄청난 적자기조 유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 「04 8% 단일관세율의 함정」 중에서
1982년 금융실명제를 처음 추진할 때나 그 후에도 금융실명제는 법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원래부터 실명을 쓰고 있는 99% 정도의 사람들까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게 하고 법으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현찰거래나 외환거래에 대한 자금세탁방지법으로 충분하다. 관행은 관행으로 고쳐야 하고 금융단협정으로 충분하다. 더구나 신용사회가 되면 신용의 축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명을 사용한다. 긴급명령까지 왜 필요했을까.
--- 「06 실명(失明)으로 끝나다」 중에서
고평가 환율의 함정에 빠진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경상수지는 경제의 종합건강지수이고, 환율은 나라경제를 지키는 주권이다. 위기국면에서 평가절하와 외화유출은 양날의 칼이지만 경상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절하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 환율은 수출, 수입, 임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재무관으로 근무할 때 일본 엔화환율을 배로 절상시킨 플라자합의를 보고 환율관리는 주권행사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 「16 도전과 응전」 중에서
11월 28일 금요일 오후 3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임창열 장관은 미쓰츠카 일본 대장성 장관을 만나러 일본에 출장 중이었다. 나의 업무일지에 다음과 같이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는데 우리 사정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우리 정부가 모르고 있다. 오늘 중으로 협상 타결해라. 내주 월요일까지 완료해야 미국 돈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오늘 중으로 해보겠습니다. 걱정 안 끼쳐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17 강요당한 변화」중에서
위기의 역사는 되풀이되어왔다. 과거 우리는 국제수지 적자 누적에 의해 1965년, 1971년, 1975년, 1982년, 1997년 다섯 번의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냉전체제의 산물인 한?미?일 특수관계, 월남전 특수, 중동건설 특수라는 외생변수에 의존하여 고통스러운 위기를 당하지 않고 수습할 수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행운의 외생변수는 없었고 IMF 구제금융이라는 외세에 의해 혹독한 비용을 치르고 넘었다. 2008년은 다시 외세에 의한 혹독한 비용을 치러서도 안 되고 오직 스스로의 힘에 의해 위기를 극복하는 길만 남았다.
--- 「23 한국경제와 글로벌 금융위기」 중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종합대응전략은 먼저 1997년 환란의 교훈을 토대로 수비, 전환, 공격의 단계로 나누었다. 단계에 따라 대증요법과 구조대책을 추진하고, 단기적인 긴급위기감내대책, 구조적인 경제역량 확대전략을 순차적으로 추진하는 종합적인 위기대응전략을 구상했다. […] 대응기조에서 1) 살아남는 자가 강자다, 2) 달러가 가장 중요하다, 3) 위기 때 순위가 바뀐다는 상황인식을 전제로, 1) 수비, 전환, 공격의 3단계에 따라, 2) 선제적(Preemptive), 결정적(Decisive), 그리고 충분한(Sufficient)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을 전략기조로 삼았다. […] 전략목표는 위기감내와 성장역량 확대로 하고, 1) 경상수지 흑자, 2) 경기침체 예방, 3) 경제역량 확대, 4) 외부역량 확대를 4대 전략으로 하였다.
--- 「24 Get up and go!」 중에서
우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패기로 감내하고 기회로 만드는 전략을 추진하여 일곱 가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빠른 성장회복, 7위 수출대국, 1위 R&D 투자국, 자본수출국 전환, 아시아 최고 신용등급, 룰 메이커 국가, 원조국 전환 등이 7대 성과다. 수출 7위 대국에 오르고, 신용등급에서 일본을 제치고,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수원국에서 원조국으로 탈바꿈한 것은 위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였다.
--- 「28 7위 수출대국에 서다」 중에서
2009년 들어 한국이 가장 빨리 경기를 회복하고 경상수지가 흑자로 반전하자 우리를 비아냥거리던 외국 언론들은 태도를 바꾸어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대통령경제특별보좌관 겸 국가경쟁력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던 2009년 7월 22일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처음으로 “서울 관료에게 경의를” 보낸다고도 했다. OECD는 한국의 재정금융정책을 OECD 국가 중 최고로 평가했고, 1997년 우리를 가르쳤던 IMF는 우리의 재정금융정책을 “교과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 「36 깨어서 일하고 결과로 말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