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확산되고 불확실성이 증폭할수록 사람들은 빠르게 지쳐갔습니다. 그리고 육체body의 건강 못지않게 마음mind과 영혼spirit을 돌봐야 하는 시점에 닿았습니다. 불안, 공포, 슬픔, 후회, 상실, 우울, 원망, 분노, 혐오 등의 온갖 부정적 감정이 무시로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요. 그즈음이 되니 저의 고민도 새롭게 변모했습니다. 영화가 오락이 아닌 하나의 이정표로 기능해야 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온기를, 사유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질문을, 재미가 절실한 사람에게는 웃음을, 일침을 요하는 사람에게는 죽비를 건네기 위해 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영화가 적재적소에서 소통의 도구가 되도록 애썼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평균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11개월을 버틴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기록’과 ‘증언’이라는 자신의 ‘소명’에 남은 생 전부를 바쳤습니다. 생존 이후 그를 살게 한 원동력은 바로 저 숱한 질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올곧고 치열하게 해내야 한다는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기억은 고통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살아남은 자를 평생 괴롭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도합니다. 〈기억의 고통〉, 〈수레바퀴-절벽을 향하여〉 등의 시 제목에서 아픔의 실체는 ‘기억’ 그 자체요, 평생 그 기억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프리모 레비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집을 편역한 이산하 시인이 “질문 그 자체가 하나의 성찰”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의심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했던 프리모 레비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야만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할 투쟁이자 결의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고요.
프롬이 강조하는 것은 ‘체험’과 ‘기쁨’입니다. 그는 능동성을 존재적 실존 양식의 가장 본질적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능동성은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 상태, 즉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이라고 정의하지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태는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언어로는 완전히 재현될 수 없다면서요. 이것을 사랑에 적용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한 체험은 서로를 존재로서 사랑하는 증거 방식이란 뜻이 됩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수없이 내뱉는다 해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공동의 체험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가 된다는 게 프롬의 설명입니다. 말이란 게 원래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죠. 중학생 시절 두 명의 이츠키가 훗날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함께했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능동성의 충족과 더불어 체험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것들을 ‘기억’할 때 과거의 시간을 ‘여기, 지금’으로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히로코와 이츠키(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죽은 이츠키를 기억할 때 그 시간이 생생히 느껴졌던 것은 과거가 ‘지금, 여기’로 소환되어 ‘초시간적’인 체험을 제공한 덕입니다.
--- 「1부. 준비하지 못한 이별을 위로하다」 중에서
유니크한 그녀.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독특하게 만들었을까요. 가사도우미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제 직업은 가사도우미예요!”라고 당당하게 말해서? 젊은 나이에 머리가 백발로 변해가서? 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사랑하는 것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사랑해서입니다. 조건이 붙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잘 곳이 없고 약 살 돈이 없어도 마음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 한솔. 미소에겐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위해서 다 버린 대가로 그녀는 특별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그녀지만 스스로 더 가난해지는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역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가난을 미화하여 충만이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확신에 차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그렇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문영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해서 가난하다기보다 가난을 바라보는 가난한 시선 때문에 더 가난해졌다.”라고요.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미소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충만을 우리는 방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행자의 여정이 푸세의 여행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푸세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지만 분명한 건 어떤 여행이든 여행은 그 자체로 나를 만나게 하고 내 인생을 마주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김영하 역시 여행할 때야말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 느낌,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그는 그 이유를 여행이 의미하는 ‘일상의 부재’가 ‘현재에 집중’시키는 특성이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소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는 이에 좀 더 명징한 분석이 있습니다. 대양 위에 떠 있는 선박의 비유를 통해 여행의 의미를 되짚고 있지요. (…) 작가 김훈은 ‘관계’에 주목합니다. 나의 위치는 바깥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동서남북 절대적 방위를 아는 것만으로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침반 바늘의 중심점은 관념적 위치일 뿐 나의 현실적 위치가 아니므로 어느 쪽을 향해 몇 도의 각도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오로지 관계에 의한 상대적인 위치로 알 수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너의 존재와 위치를 모르면 나 자신의 위치를 식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점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다는 인식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넓게 말해서 우리는 여행의 목적을 ‘자기 자신에 집중하여 자아를 탐색하는, 그리하여 본래의 나 자신을 되찾거나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맞는 이야기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목적 달성은 나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달렸다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이것은 전면적인 전환이지요. 김훈은 바로 그 점을 갈파한 것입니다.
“누가 현대 사회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제적 독립과 보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여성의 결혼 생활은 자신이 배우자를 위해, 아이를 위해, 가정을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과정입니다. 남성이 직업이냐 아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전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남성의 헌신과 희생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두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말로는 공동 책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지만, 여성의 권리가 자신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때면 남성은 성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려는 이중적이고도 모순적인 행위를 보인다고요. 앞서 얘기했듯 가정의 많은 역할이 국가의 적극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결국 남성 자신의 자성과 노력 없이는 난공불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요원하더라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난타전으로 치러진 이혼 소송 끝에 찰리가 목청껏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가 다시 하게 될 사랑과 결혼이 이전보다는 훨씬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 「2부. 무너진 일상을 돌아보다」 중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이를 두고 만남이 없고 지속성이 없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실종’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관계가 지속될 때만 형성되는데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잠깐 스치듯 끝나버리니 서로에 대한 배려, 인간다움 따위가 생겨날 리 없다는 것이지요. 불인인지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구경만 합니다.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를 생산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완벽한 타인의 일이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속성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자본주의 부작용이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채 비대면 원칙까지 맞닥뜨린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와 연결된 타인을 이해’하려는 인식과 실천이 더욱 필사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나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나 하나 살기도 벅찬 시대에 굳이 모르는 타인에게 왜 우리가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두고 이해까지 해가며 살아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언뜻 타당한 말처럼 들리지만, 신영복 선생님은 이는 타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성이란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은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4,300km에 이르는 길에서 황홀경에 빠트리는 산수가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그러나 목이 타들어 가는 사막에서라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자연이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두렵고도 막막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진 않다는 셰릴의 말은 자칫 유언이 될 뻔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완벽하게 가르치는 곳으로 사막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요. 그 이유를 솔닛은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사막은 “백지처럼 텅 빈 장소”이기 때문이라고요. 텅 비었기에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마음은 의식적으로 움직여 한 걸음 한 걸음이 영원의 시계추인 듯 고동치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고, 그 느낌이 ‘땅은 크고 나는 작다’는 사유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연 앞에 서야만 알게 되는 이런 겸손함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솔닛은 걷는다는 보편적 행위에 특수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그만큼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서라고 진단합니다. 대중교통의 발달과 생활 양식의 변화로 인간은 자연환경과 멀어졌습니다. 솔닛의 표현대로 자연환경은 분위기로서의 공간, 지형으로서의 공간, 볼거리로서의 공간, 경험으로서의 공간입니다. 수많은 의미를 지닌 공간과의 격리는 곧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자연을 다시 마주하며 우리가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관계 맺기’라는 것을 저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습니다.
-3부. 새로운 인생을 논하다」 중에서
참혹한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수많은 전쟁을 단순히 멀리 떨어진 곳, 즉 ‘지역성’의 일로 치부해버린다는 사실 말입니다. 기실 그것은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들의 고통이 과장됐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일’과는 상관 없다는 무관심과 냉소이지요. 오히려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엄청날 뿐만 아니라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고 손택은 말합니다. 이런 느낌이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결책은 단 하나,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행동과 실천이 무관심과 냉소를 극복할 방안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의료 인력과 구호품의 지원이 절실하다 해도 당장 달려가 봉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구호품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전달되는지의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스리랑카 반군 지도자를 취재할 때 마리가 질문했던 것처럼 어디선가 그것들을 탈취하는 세력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수백 명이 피켓을 들고 시위한다고 해서 정치인들의 생각이,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가 바뀔 리 만무합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현실을 수없이 경험했고 학습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세상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해서 손택은 말합니다.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라고요. 저는 이 말을 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금방 잊히고 사윌지라도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은 여전히 희망입니다. 연민이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라도 그것은 이해와 숙려, 나아가 이행을 위한 시작입니다.
상대의 결핍만이 보이고 자신의 결핍을 보지 못하는 이기주의는 곧 사랑의 적이라고 바디우는 지적합니다. ‘둘’에 대한 수긍 없이 사랑은 성립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바디우가 그토록 지극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유라고요. 시련이 출현할 때마다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 사랑은 모든 진리 구축의 과정이 그러하듯 위기의 순간에 진실하게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라고요. 하여 흔히 사랑을 정념의 소산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통념이야말로 가장 먼저 수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래도록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말이지요.
사랑에 대해 저는 많이 질문했습니다. 그동안 사랑이 너무 그리웠나 봅니다. 어쩌면 그냥 사람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라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맘껏 볼 수 없던 시절에 온전한 삶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힘겨운 시기가 지나갔으니 이제 사랑, 다시 잘할 수 있을까요? 모드와 에버렛을 봤고 바디우의 얘기도 들었으니 그러면 좋겠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든 분이 사랑에 대한 부단한 사유 속에서 삶의 가치를 높이고 마침내 영원한 사랑을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다시 사랑, 오직 사랑!
--- 「4부. 다시, 사랑을 키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