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사회정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개인의 생리적 요소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고립된 개개인의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 함께 교류하고, 습득하고 배운 감정을 통해 관여한다. …… 감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인식과 판단을 내리게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한다.
--- 「1장 도덕감정」 중에서
인간은 무한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고, 자기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와 유대를 맺는 사회적 존재이다. 관계망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태도, 정보 그리고 감정이 교류되는 전선줄과도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타자는 타자, 나는 나이다. 나 아닌 타자와 ‘동일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감과 상상력은 이들을 연결시키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
--- 「2장 공감과 비판적 상상력」 중에서
아렌트는 모든 정신적 활동은 활동 자체에 대해 회고적으로 반추하는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판단은 사유나 의지와 달리 그에 조응하는 감각, 즉 취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판단은 우리의 감각 중 가장 주관적인 성격의 취향을 세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통 감각’으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판단은 일종의 균형을 잡는 활동, 즉 세계의 안정성을 가늠하는 정의의 저울 한 눈금에 현상을 고정시키는 활동이다(아렌트, 2022: 48).
--- 「3장 양심과 책임」 중에서
정의는 다양한 덕목들, 즉 인의예지이든 용기, 절제, 관용, 지혜이든, 이 중에서도 가장 정치화되고 제도화된 것으로 엄정함과 지속성을 요구한다. 정의는 여러 덕목 중 하나이지만 사랑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의가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의는 서로 따스한 온정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덕목이다.
--- 「4장 정의」 중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갖고 싶어 한다. 다양한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 혹은 인생의 길잡이로서, 어떤 목표의 성취에 대한 욕망과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자신의 중심축을 잡아주는 신념을 원한다. 신념을 가진 개인은 ‘줏대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기 때문이며 자기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매우 값진 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념 체계이고,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타자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하려 한다. …… 신념이라는 가치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데올로기는 독선과 아집에 빠진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 「6장 법, 생명통치, 이데올로기」 중에서
2018년 영국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외로움부 장관(Minister of Loneness)’이 임명되었다. 실업, 질병, 빈곤, 고독사와 범죄 등 병리 현상의 내면에는 사회적으로 고립화되는 개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그러나 그들에게만 ‘외로움 증상’이 엄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열정이 쇠퇴한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수단은 준비되어 있는데 목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사회”, …… 한국 사회에는 외로움부가 필요 없을까? 과거 한국은 가족, 친지, 지역 등 연고주의 결속이 강했던 사회였지만 지금은 개인화의 부정적 측면, 즉 개별화를 알리는 다양한 지표들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개별화란 개인이 서로 고립화되는 현상, 그래서 타자성을 상실하는 현상을 말한다. 개별화된 개인은 서로를 ‘관심과 배려’의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 「7장 개인화, 고립화 그리고 외로움」 중에서
우리가 우리 형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 우리가 다른 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리고 효용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쓸모없고 제 기능도 하지 못하는 빈곤층과 나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 인정하자. 책임을 지는 행위, 보살피는 행위, 도덕적인 행위에서 ‘합리적인’ 면은 없다. 도덕성을 뒷받침해줄 것은 도덕성 자체뿐이다. 내 책임이 아니라고 손을 털어버리기보다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게 훨씬 낫다. 무관심한 태도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공감하고 연대책임을 느끼는 태도, 도덕적인 태도가 더 바람직하다. 설령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지도 않고 기업들의 이윤을 높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바우만, 2013: 137).
--- 「9장 신뢰와 연대, 존중과 품위사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