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바라기를 한다. 삐죽삐죽 날이 선 빌딩 사이로 손바닥만 한 하늘 조각이 보인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대모산 능선 한 뼘쯤 위에 낮달이 떠 있다. 날빛을 잃은 낮달은 서녘 하늘에 외로운 섬처럼 떠 있기도 하고 동트기 전 여명에 흰무리처럼 떠 있기도 한다. 맑은 날은 빛을 잃고 외롭게 하늘에 떠 있을 테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낮달은 보고 싶을 때 아무나 볼 수 있는 달이 아니다. 시월 달개비 바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달이다. 그리하여 낮달은 그리움을 안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달이지 싶다.
초겨울 낮달은 얼음 조각처럼 시려(추워) 보인다. 하나둘씩 피어나는 그리운 얼굴 같은 조각달은 가슴에만 피어난다. 여덟아홉 살 때 보았던 낮달은 꽃상여가 떠나던 날 거푸 하늘에 떠 있었다. 외로운 시인의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태어난 낮달이라 했던가. 외로운 누군가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볼 수 없는 달이지 싶다. 늦은 봄이었다. 옆집에서 곡성이 터졌다.
“아이고! 아이고!”
울음소리가 한낮의 공기를 찢을 듯 팽팽했다. 며칠 뒤 하얀 소복을 한 그녀는 상두꾼이 맨 꽃상여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바닥을 쓸고 있는 흰 치맛자락에 피눈물이 얼룩졌다. 꽃 같은 아내와 막 돌 지난 아들 하나를 남겨 두고 옆집 오빠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어른들 뒤에 숨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꺽꺽 울었다. 서럽고 무서웠던 꽃상여. 아버지가 떠났을 때보다 여덟 살에 처음 보았던 그날의 꽃상여와 낮달이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한낮 불볕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지붕 위로 무명 저고리가 올라가고 무어라 외치고 생살을 찢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뒤뜰에서 놀던 소꿉을 팽개치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모기장을 쳐 놓은 요 위에 아버지가 반듯이 누워 계셨다. 울부짖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겨우 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한 사람 한 사람 돌려보다 내 얼굴에서 잠시 멈추더니 젖은 눈을 힘없이 감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으셨다. 그날도 하늘엔 외로운 섬처럼 낮달이 떠 있었다. 왜 사람이 숨을 거두는 날은 낮달이 뜰까. 어린 나를 슬프게 하였다. 그날 후 슬플 때 낮달은 눈물을 담아 놓는 그릇같이 보였다. 그리고 낮달은 마지막 가는 길을 늦추기 위해 머무는 섬, 아버지의 외로운 섬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기이하게 생긴 닭벼슬, 새 깃털, 용꼬리 장식을 단 꽃상여를 타고 햇볕이 강렬한 유월에 떠나셨다. 우리 가슴에 오뉴월 서리 멍울을 남기고 동네를 한 바퀴 휘돌아 떠나가셨다. 인간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독 속에서 삶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머리 좋은 내 아버지는 자신에게서 도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독한 도전적인 삶을 영위하셨던 것이다. 소년 시절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날품을 팔아가며 아버지는 중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빛을 잃고 하늘을 배회하는 외로운 섬 낮달처럼 한이 많은 삶을 사셨던 것이다.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내가 죽으면 저놈들 다 잡아갈 거라 하시며 문병 오는 사람들이 보기 싫어 돌아 누우셨다. 다른 집안은 넝쿨에 오이 열리듯 자손이 번성했다. 종손인 우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자손이 귀했다. 아버지는 내 남동생을 잃은 슬픔이 지병으로 깊어져 마흔을 겨우 넘기셨다. 술을 많이 드셨고, 슬픈 노래를 부르며 벗은 상의로 길바닥을 쓸며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였다고 한다. 돌 전 외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어린것을 외롭게 혼자 둘 수 없어 서둘러 뒤따라가셨던 것일까. 이승에 남겨 둔 외딸을 또 얼마나 아파하셨을까. 외로운 섬 낮달은 언제나 나를 서럽게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득하다. 잊으려고 애쓰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이던가. 그 원망의 빛이 사위어질 만큼 하늘에 외로운 섬 낮달이 떠 흘러간다.
“아버지, 당신의 하늘에도 낮달이 피나요?”
그리움이 하나둘 지워진 섬 낮달에 아버지는 계시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하염없이 아버지를 그리며 외로운 섬 낮에 핀 낮달을 하늘바라기 한다.
*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 10선에 선정
--- 「아버지의 섬 낮달」중에서
가을이 왔다. 설악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단풍이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소식이다. 옆으로 누워 있는 구룡산 능선이 촘촘한 빌딩 사이로 야윈 얼굴을 내민다. 폭염에 달아오른 빌딩도 찬 기운에 열이 내린 얼굴이다. 목에 머플러를 감고 한강둔치로 나간다. 산책 나온 사람들과 자전거가 부쩍 많아졌다. 청담동 토끼굴에서 잠실 선착장까지 유치원 아이처럼 나란 나란히 걷는다. 한강이 푸른 몸을 뒤척이며 흘러간다. 깊어가는 가을빛에 젖은 강물은 거꾸로 서 있는 산 그리매(그림자)와 출렁거린다. 생성과 조락, 채움과 비움, 풍요롭지만 쓸쓸한 계절. 가을이면 저려오곤 하는데 선명한 가을빛이 내 옷자락을 붙잡는다.
나는 색색으로 물든 마른 잎 구르는 가을을 좋아한다. 회색 겨울은 우울하게 한다. 가을이라기엔 늦고 겨울이라기에는 빠른, 가을 위에 겨울이 포개지는 달 11월을 좋아한다. 부풀어 오른 태양의 낮보다는, 하루해가 저무는 해질녘에 마음이 편하다. 늦가을의 유현(幽玄)함이 마음을 정(靜)하게 하는 것, 내가 이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다. 가을빛에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야위어 간다. 바람 소리도 활활 타던 단풍도 야위어 떨어지고, 하늘의 태양마저 야위어 간다. 저 혼자 쓸쓸해지는 그리운 것들은 다 가을빛에 야위어 떨어진다. 가을은 단풍도 좋지만 애잔하게 야위어 빛을 잃는 가을꽃도 마음을 아리게 한다. 아득해지는 가을빛 따라 억새꽃은 은발을 풀어헤치고 산등성이에서 강가에서 서러운 몸짓으로 바람을 흔들어 댄다. 떠나온 고향이 그리워 먼산바라기 하듯, 해맑은 코스모스의 야위어 가는 섬섬한 자태가 또 눈물겹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난 그리운 얼굴들이 새벽 안개처럼 일렁거리는 것도 이때쯤이다. 오래전 20대에 떠난 그 친구는 박명(薄命)을 예감한 듯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애틋한 몸짓으로 그리움을 앓는 코스모스, 은발을 풀고 몸으로 외로움을 손짓하는 억새꽃. 가을은 그리운 것들을 더 그리웁게 하는 계절이다. 그날도 늦가을이었다. 하얗게 눈가루가 휘날리던 날, 공사장에 세 번째 바뀐 책임자가 왔다.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반년이 지났다. 초파일 이틀 후 내 생일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쩔쩔매며 뒤에 숨겼던 손을 쑥 내밀었다. 흰 종이에 싼 빨간 장미꽃 다섯 송이였다. 빨간 장미꽃은 순수한 사랑, 사랑의 고백이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차를 향해 나는 부챗살 손바닥을 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가 웃었다. 가슴에 피어나는 사랑초…. 불확실한 내일을 모른 채 돌아섰다. 언제이던가, 가을이면 생각나는 그리움이다.
그리고 정신없이 휘둘리며 살아야 하는 현대 생활에 그리움을 그리웁게 하는 가을은 축복이 아닐런가. 추수가 끝난 빈 들녘의 고요. 곱게 물든 단풍으로 활활 타는 먼 숲속. 막 씻어 놓은 배춧잎처럼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가을 하늘, 이 선선한 산하는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쉬어 가라는 신의 선물이 아닌가. 생명 있는 것은 제각각의 무늬로 성숙해지고 여물어 가는 무한 강산. 우리는 가을에서 쇠락을 배우고 다시 기다림의 지혜를 체현한다.
끝이 없는 상념을 거두고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걷는다. 삶에도 사계절은 있다. 내 삶의 사계절은 어디쯤에 와 있을까. 서 있는 자리를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미래의 내 모습을 알려면 현재의 내 모습을 보라고 했던가. 열심히 밥 먹고, 열심히 친구 만나고, 건강하게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을. 성심을 다해 정성스럽게 살면 지금 앉은 자리가 내일의 내 자리가 아닌가.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선사하시어
그들이 농익도록 재촉하시고…
마리아 릴케는 위대한 남국의 날을 이틀만 더 달라고 기도했다. 릴케처럼 빌어 본다. 나에게도 그 남국의 날들을 이틀만 더 선사하시어 농익도록 머물게 해 달라고…. 저무는 강물 위로 선홍빛이 낭자하다. 하늘을 덧덮은 발간 노을이 스러지자 먹물 번지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온다. 이 가을 물거품처럼 야위어진 내 몸, 어둠과 한 몸이 된다. 아무것도 없다.
* 강남신문 2019년 3월 12일 문학면에 게재
--- 「아무것도 없다」중에서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간 ‘1만 시간 노력’을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의미다. 한평생 사노라면 몇 번이나 기회가 올까. 1만 시간에야 미칠 수 있을까만, 말없이 제 길을 가는 하늘 구름이 부러웠다. 푸르른 하늘길을 가는 구름과 같이 내 길을 걷고 싶었다.
“저 안숙입니다.”
“안 숙…?”
“이름이 외자입니다.”
“본명이세요?”
“네.”
“아, 이름이 예쁘네요!”
열이면 일곱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얼굴보다 이름이 예쁘다는 표정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나누는 대화다. 공식이 되었다. 편안 安, 맑은 淑은 나의 이름이다. 가득 찰 滿, 맑을 淑, 滿淑은 또 하나의 내 이름이다. 나는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는 마음으로 항렬자 빼어날 秀를 붙여 나를 萬秀라 했다가 다시 滿淑이라 부르셨다고 한다. ‘가득 찬 맑음’, 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고 생각하셨을까? 출생 신고를 하며 할아버지께서 겨울 창공처럼 ‘맑고 고요히’ 살라는 바람으로 맑은 淑, 외자로 정하셨던 것이다.
나와 네 살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시던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귀했을까. 허나 돌 한 달을 남겨 놓고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잃고 세상을 다 잃은 듯 슬픔에 지쳐 헤매다가 삶의 끈을 놓으셨다. 아버지를 여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일한 선물은 滿淑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철들 무렵부터 서러움이 깊어져 아버지가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우개로 지우듯 철저히 잊고 살아온 것이다. 초중고, 대학까지 내 학적부에는 호적 이름 안숙이 아닌 안만숙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무렵, 내가 초등학교 입학 때는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란히 세워 놓고 아이들이 대답하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 적어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安滿淑 이름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상급학교 진학 때는 호적과에 부탁하여 이름을 滿淑으로 정정해 제출하곤 했다. 고향 면사무소에 집안 숙항들이 계셔서 뭐든지 수월했다. 또 군복무에 관계없는 여자라 호적과 다른 이름을 써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학 입학 원서를 낼 때는 고3 담임이 안숙으로 바꾸기를 적극 권하였다. 역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부르던 이름을 어찌 고치려나 싶었다. 아버지가 불러 주시던 이름에 왜 그리 연연했을까? 지금에야 돌아본다. 삶과 죽음이 어찌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일까만, 어떤 이유든 어린 자식을 두고 서둘러 이승을 떠난 것에 원망이 깊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헛헛할수록 더 잊으려고 애쓰며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安滿淑이라는 이름에는 이렇듯 기우는 해그림자처럼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부모님의 잔영을 붙잡고 싶은 사무침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60년대 후반 도민증 대신 주민증을 만들었다. 그때 역시 주민등록에 안만숙으로 고유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다. 법원에 안만숙으로 개명 신청을 한 적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여권을 준비하는 과정에 동직원이 호적 이름, 주민등록 이름이냐는 권유를 받고서야 안숙으로 일치시켰다. 안만숙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셈이었다. 관향이 순흥인 安씨 성은 북방 지방에 발생한 난을 위급에서 구한 업적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근세는 풍기, 순흥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종의 복위 사건에 연유되어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 후 조선조 5백여 년 거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을 만큼 지조를 지켰다는 것이다. 집안 어른들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지조가 강직한 가문이라며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다. 자부심 또한 대단하셨다. 역시 많은 성(姓) 중에서 반듯하고 정(正)해 보이는 安씨 성이 좋다. 창씨개명 시절 여자 이름에 그 흔하던 아들 子도 아니다. 외자 맑을 淑이라 지은 부모님의 혜안이 자랑스럽다. 만날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놀려먹는 선생님이 계시다.
“안숙은 숙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편안 安 아래는 어떤 자가 와도 다 평화롭습니다.”
말 펀치로 대응하며 웃을 때는 흐뭇했다. 내 이름이 기억하기 쉽고 예쁘다는 호의로 전해 와서다.
가을 위에 겨울이 포개지는 달 11월, 텔레비전에 수수한 얼굴의 82세 할머니가 출연했다. 동대문시장에서 평생을 미싱사로 살아온 분이다. 4년 동안 검정고시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 수능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전문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대학에 간다.” 당당히 포부를 밝혔다. 충격이었다. 전문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수능을 본다는 한마디는, 회한의 파고가 되어 폭풍처럼 나를 후려쳤다.
2015년 봄도 지나 불볕이 뜨거운 늦여름에 대학 졸업 50년도 지난 모교를 찾아갔다. 대학 학적부에 기록된 안만숙을 호적 이름 안숙으로 정정하였다. 안숙으로 정정된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들고 교정을 나섰다. 팔랑나비처럼 스쳐가는 학생들 얼굴에 팝콘처럼 부풀었던 지난날의 내 얼굴이 겹쳐진다. 푸른 하늘엔 내 길을 열어 주듯 하얀 구름이 흘러 흘러간다.
안만숙은 이제 초등학교와 중고등 학적부에만 남아 있다. 훗날 저세상에서 아버님, 어머님을 뵐 때 안만숙이 아닌 안숙이라 낯설어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이제야 아버지가 이해되는 것 같다. 돌잡이 외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그곳에 외롭게 혼자 둘 수 없어 서둘러 뒤따라가셨을지 모른다. 이승을 내려다보시며 남겨 둔 어린 딸을 또 얼마나 아파하셨을까.
--- 「본명이세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