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오래된 미래를 품다》 (상당산성권)
금속과 문화가 융합한 최초의 사례는 고려시대에 꽃피운 불교 유물입니다. 국립청주박물관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려시대 사찰 사뇌사(思惱寺) 출토 유물은 청주가 왜 금속의 고장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1993년 10월 용화사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무심천 변, 제방 확장 공사를 하던 중 고려시대의 금속공예품 수백 점이 발견됩니다. 의식구, 공양구, 장엄구, 생활용구 등 378점의 유물은 모두, 직지를 찍을 당시(1377년)의 고려시대 청동 유물이었습니다.
_p26 [제1부 폐허에서 감성으로, 역사에서 일상으로]
상당산성을 향해 난 길은 여럿입니다. 그중 상봉재를 거쳐 상당산성에 오르는 코스가 가장 오래된 길입니다. 명암타워에서 상당산성 도로를 따라 걷다가 로드파크부터 시작되는 상봉재 옛길로 접어드는 길입니다. 다만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기가 불편하다면, 명암저수지에서 출발해 풍주사를 거쳐 상봉재에 오르는 것도 좋습니다. 상당산성 도로를 새로 내면서 상봉재 옛길이 많이 사라졌지만, 애기바위부터는 옛길이 남아 있고 암각선정비와 옹달샘, 서낭당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_p41 [제2부 이야기 길, 상당산성 길]
공남문(남문) 앞에 조성된 드넓은 잔디밭은 소풍 나온 시민들의 쉼터이자 역사공원입니다. 소나무 숲이 만들어주는 그늘은 시원하고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공남문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곳곳에 세워진 비석들은 상당산성의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공남문 광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시비입니다. 세상천지를 떠돌며 살았던 매월당의 발길은 예의 상당산성에도 닿았고 여기서 느낀 감회를 시로 남겼습니다. 매월당 김시습은 누구일까요?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_p79 [제3부 상당산성의 문화 발원지, 공남문 광장]
둘레 4.2킬로미터의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 때, 그 들머리로 삼는 곳이 바로, 상당산성의 정문인 공남문입니다. 공남문은 [대조영], [태왕사신기], [카인과 아벨] 등 많은 드라마가 촬영된 명소입니다. 공남문은 상당산성의 세 개문 중에서 유일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입니다. 조선시대 왕이 피신하는 행궁에는 모든 문을 홍예문으로 세웠습니다. 행궁이 아니라 지방 전선 사령부였던 상당산성에는 공남문 한 곳에만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_p97 [제4부 다 함께 돌자 산성 한 바퀴]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옮겨 오자 청주읍성은 큰 변화를 겪습니다. 우선 청주목 관아 옆으로 그보다 큰 병영이 들어서고, 정삼품 청주목사보다 한 등급 높은 종이품의 충청병사가 부임합니다. 병영을 옮겨 오고 3년 뒤인 1654년에는 옥천에 있던 중영(中營)마저 청주로 옮깁니다. 이로써 청주는 행정과 사법은 물론, 군사의 기능을 아우르는 내륙의 중추도시가 됩니다. _p122 [제5부 청주읍성 종소리, 상당산성에서도 들리네]
상당산성은 1716년 석성으로 개축된 이래 꼭 한 번 함락됩니다. 외세의 침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서였습니다. 바로 18세기 최대의 반란 사건인 ‘이인좌의 난’ 때입니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의 군사들은 청주성과 상당산성을 함락합니다. 뒤이어 영남의 정희량과 호남의 박필현 등도 잇따라 거병합니다. 전국에서 거병한 군사를 모두 합치면 이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반란이었습니다.
_p151 [제6부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하네]
한옥마을은 이미 1999년, 상당산성 사적 공원화 사업 기본 계획에 따라 산성 밖으로 옮기기로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있습니다. 2005년 수립된 상당산성 정비 계획도 한옥마을 이전을 전제로 수립되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한옥마을 주민들도 마을 이전을 포함한 대안을 찾자는 데 합의하고 있어, 조만간 수립되는 산성복원 종합 계획에는 현명한 방법이 담길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_p170 [제7부 어떤 것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산책은 새로운 걷기의 형식입니다. 산책은 질주에 대한 반성이자, 걷기에 대한 환기입니다. 산책하는 사람의 걸음은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는 사람이나 들에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살금살금 걷는 도둑이나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사람의 걸음과도 확연히 다릅니다. 모양과 속도뿐만 아니라 목적마저 다릅니다. 산책은 무엇을 하기 위한 걸음이 아니라 걸음 자체가 목적입니다. 빠르게 걸어야 할 이유도, 남모르게 걸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산책자는 관찰자이기에 낯익은 일상에서 비범한 통찰을 얻는 것도 이 순간입니다.
_p209 [제9부 물길과 들길로 건너가는 상당산성 숲길]
청주성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삼남이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거사의 거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청주는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서원이 있는 노론 정치의 심장부였다. 청주를 얻는 것은 노론의 정신적 고향을 빼앗는 일이었다. 게다가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있는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청주를 점령하면 나라의 절반을 얻는 것과 같았다. 병영의 군사와 무기는 덤이었다. 여기에 청주의 전투성인 상당산성을 거둔다면 일은 거의 끝난 것이었다. _p255 [동암문 이야기]
곡절 많은 인생이라지만 우리 모자의 운명은 어찌 이리 혹독한지요. 바람 앞에 호롱불처럼 지켜온 아이인데 요절수라니, 원망과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어요. 발걸음을 돌려 나가시는 스님을 붙잡고 어찌해야 할지를 물었어요. “나는 상당산성 보국사 주지인 해원이라 하오. 저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내게 맡기십시오. 아들이 보고 싶으면 열흘에 한 번씩 서낭당 고개에서 기다렸다가 만나야 합니다. 다만 서낭당을 한 발짝이라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_p292 [상봉재 이야기]
《물길, 세종대왕 꿈을 담다》 (초정약수권)
임금 맞을 채비를 끝낸 초정은 다시 차분해졌다. 산울림처럼 퍼져 나가던 목수의 망치 소리도 관원의 말발굽 소리도 산자락 아래로 잦아들었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마을에 훈풍이 불어왔다. 경칩을 앞두고 얼었던 땅이 풀리고, 웅숭그레 어깨를 맞대고 있던 산자락에도 옅은 연둣빛 촉들이 어른댔다. 문득 조선의 중심이 된 초정의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게 드리워져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_p15 [제1부 세종대왕 산책길]
“내 병이 이미 위중하므로 정사에 힘쓸 도리가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와 같이 소홀하게 할 수는 없다. 근래에 와서 병이 더욱 심해졌다. 왕위에 30년 동안이나 있었으므로 부지런해야 할 정사에 게으름을 피운 지 오래되었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는데,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관례다.” _p37 [제1부 세종대왕 산책길]
오랜 침묵을 깨우듯 운보의 집을 찾았다. 행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 사이로 잘 다듬어진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운보의 체취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니 단아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고졸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갈한 마당에 서니 까마득한 어느 날 설핏 보았던 운보 선생이 떠오른다. 하얀 한복 차림으로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고 계셨던 할아버지. 무엇 때문에 갔는지 누구와 갔는지는 기억을 못 하지만 먼발치에서 보았던 운보 선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_p112 [제2부 운보 예술길]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소음 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 늙어갈수록 조용함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이지요.”
_p118 [제2부 운보 예술길]
세력을 모으는 중심지는 청주였다. 궁예에게 청주는 근거지와 같았다. 경주에서 도망 나와 세달사에서 승려의 삶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맺은 곳이 청주였다. 양길의 휘하에서 친구가 된 신훤 역시 청주 출신 호족이었다. 훗날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며 청주 사람 천호를 철원으로 이주시켜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을 정도로 청주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_p138 [제3부 김유신 리더길]
구라산성의 축성설화를 증거하듯 지금도 성안에는 양지 바른 곳에 10여 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쓸쓸한 성터에서 만나는 무덤은 설화와 버무려져 애잔하다. 무덤의 실체는 죽은 아홉 딸과의 연관성 여부를 떠나 구라산성을 떠받쳐주고 있다. 나란히 조성된 무덤을 보면 설화의 무게로 인해 아홉 딸들의 죽음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며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은 아홉 딸이 쌓은 구라산성 설화 속에서 천년 역사의 잠을 깨운다. _p153 [제3부 김유신 리더길]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탕! 탕! 다시 두 발의 총성이 들녘으로 퍼져 나갔다.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총성이 이어지면서 평화롭던 들녘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말을 탄 일본 헌병이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바닥은 붉은 피로 낭자해졌다. 일순 벌어진 기습이었다.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일본 헌병 두 명은 황급히 말고삐를 움켜잡고 뒷걸음쳐 도망쳤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짧은 정적이 흘렀다.
_p175 [제4부 한봉수 충효길]
초정약수공원을 빠져나오면 길은 다시 갈라진다. 증평 율리로 넘어가는 고개와 미원으로 넘어가는 이티재 그리고 청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각지점에 초수로 목욕하는 약수탕이 위치해 있다. 약수 중에서도 초수의 독특한 물로 유명한 초정약수원탕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인기 있다. 톡 쏘는 초수에 목욕한 후 시원하게 마시는 물맛의 비결에 다시 찾게 되는 곳이다. _p222 [제5부 마음으로 만나는 세종대왕 100리길]
《들길, 이야기 따라 걷다》 (증평권)
좌구산은 사람 기죽이게 높지도 않구, 삐죽삐죽 저를 드러내려구 애쓰지도 않구, 그저 소잔등마냥 밭이랑마냥 구불구불 편안하게 내리뻗은 산이여. 그 좌구산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와 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그게 바로 삼기천이여. 삼기천은 물길 따라 흘러내려 증평에서 보강천이랑 만나구 다시 미호천이랑 만나서 금강 줄기로 흘러내려가.
_p19 [제1부 길 따라 이야기 따라]
신경행은 일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무난히 과거에 급제했구 벼슬길도 순탄했던 편이여. 벼슬살이를 하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구, 공신으로서 후한 대접도 받구 말이여. 죽은 뒤에도 예조판서에 증직되구 ‘충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어. 신경행은 ‘이로움을 얻었을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라’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었어. 이렇게 평생 소신을 지키면서 살어간 덕분에 벼슬도 오르구 좋은 일이 따렀던 게 아닐까?
_p61 [제2부 굽이굽이 전설이 살아 있는 남차리]
김득신이 남긴 수백 편의 시 중에 밤티마을에 대해 쓴 시도 몇 수 전해지구 있어. 그중에 [밤티골(栗峽)]이란 시 하나만 소개해줄게. 김득신 묘소 옆에 ‘밤티골’ 시비가 세워져 있어. ‘산기슭 시냇가의 너럭바위 대(山畔溪頭石作臺)/올라 굽어보니 석양도 황홀해(登臨斜日兩眸開)/시흥에 겨워 자주 붓대를 잡고(詩因有興頻抽筆)/시름을 삭히고자 술잔을 거듭해(酒爲銷愁每把盃)/나그네 혼 꿈길로 서울을 찾고(客子夢魂京裡去)/벗의 서찰은 산촌까지 전해오네(故人書札峽中來)/봄이 오는 이즘 무단히 놀람은(無端警覺新春近)/잔설 속에 망울 트는 매화 때문(積雪初融欲綻梅)’
_p71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책벌레 김득신의 책 읽기에 대한 얘기는 엄청 많어. 이번엔 혼례를 치르던 날 벌어진 얘기여. 사윗감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해볼 겸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어. 사위가 책을 병적으로 좋아하다 보니께 첫날밤까지 책만 끼구 밤새 읽다가, 딸 옷고름도 안 풀어줄까 봐 염려되기도 했을 겨.
_p92 [제3부 최고의 책벌레 김득신을 낳은 율리]
죽리마을은 사방이 넓은 들판으로 뒤덮여 있어. 김득신은 해 질 녘에 어느 집 난간에 기대어 서쪽 들녘을 바라보다가 술에 취한 듯 풍경에 취했던 모양이여. 아마 하늘엔 고운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양,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었을 겨. 노을에 물든 저녁 들녘은 원앙금침을 깔어놓은 신방마냥 고요하면서도 아늑했겄지. 그 모습에 괜스레 누가 휘저어놓은 듯 맘이 일렁거렸을 테구. 흥취에 젖어 시 한 수를 읊구 나서, 김득신은 주막에 들어가 주모랑 객쩍은 농을 주구받으며 농주 한잔했을지도 몰러. _p168 [제5부 넓은 뜰을 품고 있는 죽리]
솔모루 샘이 지금은 그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진 않지만, 샘 둘레에 높게 시멘트로 담을 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러면 샘가에 쪼그리구 앉어 옛 전설을 떠올리면서 얼굴이라도 비춰볼 수 있을 텐데 말이여. 속이 시커멓든 하얗든 샘물은 그 사람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주겄지. 그러면 샘물에 거울처럼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서, 옷매무새를 여미구 매만지듯이 흐트러진 맘을 가지런히 해 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여.
_p207 [제6부 마애불과 미륵불이 지켜주는 남하리]
농한기에 베를 짜다 졸리면 바가지에 고드름을 따놓구 입에 하나씩 넣어가며 베를 짰어. 그런데 남편이나 살어 있으면 베틀을 돌리는 장단도 신바람이 나겄지만, 남편이 먼저 가버려 없으면 뭔 신명이 그리 나겄어. 남편이라도 있으면 동지섣달 엄동설한보다 매서운 시집살이라도 따뜻한 남편 품이 녹신녹신 녹여줄 텐데 말이여. 그러니 그저 나오느니 한 숨이요, 눈물이었을 겨. _p248 [제7부 굽이굽이 인생길, 노래로 넘어가세!]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