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정가
17,000
판매가
15,300 (10% 할인)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무료 ?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44쪽 | 574g | 153*224*30mm
ISBN13 9788994054551
ISBN10 899405455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안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국은행에서 근무한 후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2004, KBS ‘화제의 책’ 선정), 『조선 엘리트 파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2012) 등이 있으며, 연구 논문은 『소외의식의 극복-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중심으로』, 번역문은 고트프리트 A. 뷔르거의 『레노레(Lenore』 등이 있다.

감성과 상상력을 일깨워 주는 문학과 예술, 인류가 살아오면서 축적해 온 문명?문화 및 정치?사회 발전에 관한 탐구, 그리고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통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해 주는 철학, 이들 인문학에의 진지한 접근과 관심을 기울일 때, 그 나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저자는 그간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이 분야 중심축에 있는 인물들을 심도 있고 흥미롭게 서술하여 고정 독자층을 꾸준히 넓혀 왔다. 이 책 역시 이 분야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쓴 것으로 교양의 폭과 깊이에 더하여 인문학적 사고의 지평을 넓혀 줄 것이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60년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삶이건만, 인간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외롭고 불안했던 소년기, 청년기의 긴 유형생활,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간헐적인 발작 증세, 도박과 낭비로 벼랑에 선 빚더미 삶, 그리고 끝없는 자기 질책과 자기 학대 속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고통과 비애를 다 맛보았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세계는 전원의 목가적인, 현실의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작품 속에서의 등장인물들은 어둡고 습기 찬 도시 뒷골목의 힘겨운 삶에 찌든 하층민들, 가난한 학생과 하급관리, 살인과 강간 등 온갖 범죄로 얼룩진 군상들이다. 우리는 이런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 분노와 비감을 느끼면서도, 때로는 동정과 연민을, 때로는 인물들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는 야릇한 카타르시스와 동질감마저 느끼게 된다. -17쪽

작품 『죄와 벌』은 심리학적·윤리학적 내지 철학적 요소를 가미한 걸작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구조를 낱낱이 해부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신을 향한 인간의 구원 문제로까지 확장한 대작으로 이 작품의 소재는 1865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두 여인 도끼 살해사건에서 착상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라스콜리니코프라는 한 젊은 대학 중퇴생은 분석하기 힘든 복잡한 동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와, 그 현장에 나타난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이 너무 부조리한 것에 분격하고 있었다. 그는 가난이라는 죄 때문에 부당하게 모멸당하는 선량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반면에 사회에서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기생충과도 같은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와 같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결국 그는 노파를 살해한 후 번민과 불안에 떨며 방황하다가 가족의 호구지책 때문에 매춘부가 된 가련한 소냐를 알게 된다. 그는 소냐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으면서도 순결한 영혼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결국 소냐의 발밑에 엎드려 그녀의 발에 입 맞추며 “나는 당신 앞에 엎드린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고통 앞에 엎드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서 살인범은 가엾은 매춘부가 읽어 주는 성경 구절을 듣는다. -51쪽

1875년 도스토옙스키가 『미성년』을 집필하고 있던 그해 8월 안나는 둘째아들 알료사를 낳았으나 아버지의 간질병을 유전 받아 세 살 때부터 자주 발작을 일으키더니 끝내는 죽고 말았다. 작품 『미성년』은 인간의 내적 심리문제를 다루었으나 소설로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즈음 그는 메쉬체르스키 후작으로부터 잡지 「그라즈다닌(시민)」의 편집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잡지 성격이 다소 반동적이어서 마음에 걸렸으나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이고, 이 잡지에 1873년 1월부터 1874년 4월까지 『작가일기』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시사평론을 썼다. 『작가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명성을 다시 얻게 해주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작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그의 필생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구상에 몰두하였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간질병은 거의 재발하지 않았으나 만성 폐질환은 점차 심해졌다. 그는 할 수 없이 요양원에 입원해야 했다. 요양원에서 그는 안나를 너무나 그리워했다. 그는 안나에게 두 사람간의 노골적인 성행위 꿈까지 적어 보내기도 하였으나 훗날 안나는 남편의 글을 정리하면서 이 부분은 지워 버렸다. -59쪽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중천에 뜬 해도 서산마루에 기울고, 달도 차면 이울어가는 법. 도스토옙스키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광채를 발하였지만, 그는 하루하루 운명의 신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지 못한 채 향후 20년간의 계획을 그 나름대로 구상하며 집필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과 육을 수없이 괴롭혔던 발작 증세도 과거보다 그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고, 그 강도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질화된 폐렴 증세도 완화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중환자가 일반적으로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병리학적 특이현상을 환자들은 잘 모르는 법이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채 밤늦도록 집필에 몰두하여 그의 심신에 무리가 가해짐으로써 병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현명한 안나는 이런 남편을 세심한 뒷바라지와 함께 무리하지 말도록 다독였으나 도스토옙스키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64쪽

서구 지성사에서 니체만큼 많이 회자되는 철학자가 누가 있을까? 얼마나 많은 철학도와 지식인들이 니체와 씨름하여 왔는가? 왜 우리는 니체를 읽고 당혹해하면서도, 니체에 대한 매력을 버리지 못하고 니체를 또 읽는가? 지성에 목마른 얼마나 많은 독서가들이 니체의 언어 마술에 최면당하였는가? 니체에 대한 어떠한 분석과 평가도, 어떠한 수식어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번득이는 예지와 통찰력, 탁월한 언어 감각과 간결한 표현 기교, 지적 오만과 철저한 자기 폭로, 그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절규와 독설로 “신은 죽었다!”는 폭탄선언을 하며, 기존의 낡은 가치 체계에 온몸으로 맞선 이 사람은 시대를 앞서 간 ‘초인’이었으며, 내일의 지표를 제시한 현인이요, 광기의 천재였다. -71쪽

백작 부인은 이처럼 어린 니체를 성적인 노리갯감으로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남장을 하고서 니체의 기숙사 방에까지 잠행해 들어와 음행을 벌이기도 하였다. 백작 부인의 바람기는 니체 한 사람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여타 젊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유혹하여 성적 유희 대상으로 삼았다. 마침내 남편인 백작은 부인의 천방지축 바람기를 잠재울 수 없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녀는 뉘우치지 않고 숱한 애정행각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연주회에서 돈 많은 유대계 로스차일드를 만남으로써 사랑의 궤도를 수정하였으며, 마치 조경사가 큰 나무 주변의 잡목과 잔가지를 치듯이 애송이 니체마저 차버렸다. -80쪽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사상에 매료되어 그를 자기 영혼의 반려자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철학을 알게 되었고 철학을 삶의 예술로 승화시켜야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체념과 자기부정의 미학을 배웠지만, 자기 긍정과 ‘힘에의 의지’로 절망을 뛰어넘어 삶을 긍정하고자 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슈만처럼 숨 쉬고 쇼펜하우어와 같이 사고하며, 플라톤처럼 쓰려고 애써 왔다.”고 말하면서 쇼펜하우어를 정복하는 것보다 뛰어넘는 것이 용이하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는 매일 아침 쇼펜하우어를 뿌리치고 나왔다가는 황혼녘이면 다시 그를 찾아 들어가는 격이었으며, 그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가 자기보다 순수하고 이해심이 많았으며, 천재의 광기마저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니체의 대학 시절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일생을 두고서도 그는 쇼펜하우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88쪽

어떻든 니체와 바그너와의 관계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바그너는 새로운 가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고 정부지원과 일반 모금을 위해서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다. 극장 기공식에는 1872년 5월 니체를 비롯한 바그너 신봉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착공 4년 만인 1876년 7월 바이로이트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었다. 축하공연으로 바그너가 창작한 『니벨룽겐 반지』가 상연되었으나 니체는 바그너의 지나친 쇼맨십과 과거와 달리 거들먹거리는 속물적 태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극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곳에서 니체가 본 바그너는 종교와 도덕 등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삶에 충실하였던 이전의 바그너가 아니라 종교적 구원에 감명을 받아 예술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노음악가의 추한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대로 지속되었으며, 바그너는 종교로 귀의하는 내용의 작품 [파르시팔]을 작곡하여 니체에 증정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종교로부터 이탈하는 의미의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1부를 저술하여 바그너에 증정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코지마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도 사실상 정리하였다. -94쪽

루 살로메와의 이별의 아픔을 딛고 니체는 1883년 11월 제네바로 도피, 그곳에서 그가 말한 대로 ‘최악의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나 할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생애 최고의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집필에 몰두하여, 1885년 2월 제4부까지 완성하였다. 이 책은 니체의 사상을 집대성한 저작으로서 오늘날 니체의 모든 저술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고 있듯이 이 책은 만인을 위한 책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이 각자를, 또한 만인을 위한 책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그리고 본연의 자아(의식 이전의 자아)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결코 이 책을 읽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만인을 위한 책인 동시에 자칫하면 어느 누구도 위하지 않는 책이 되기 쉽다. 따라서 니체는 이 책을 한낱 심심풀이로 읽을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입장에서 피와 땀으로 숙독하기를 권하고 있다. -109쪽

마르크스는 1830년 트리어 시 김나지움(인문학교)에 입학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진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학식이 풍부하고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비텐바흐 교장선생 역시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저런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가끔 뜻있는 동료들과 함께 진보적인 서적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재학 시절 수석은 하지 못했지만, 창의력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만큼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학적증명서에는 그의 논문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넘쳐 있으며,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수학에 탁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37쪽

마르크스는 대학 교수가 된다 하다라도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 많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진로를 저널리즘 쪽으로 바꾸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1842년 초 쾰른에서는 시민적 반정부주의자들의 대변지로 「라인 신문」이 창간되었다. 발행인들은 1842년 10월 당시 24세의 젊은 마르크스를 편집장으로 위촉하였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고난에 찬 현실참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서 라인 지방의 정치·사회 난맥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이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행동이 헤겔 철학에서는 고려되지 않았던 특정 계급의 이익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가 가난에 찌든 모젤 강 주변의 농민들과 날품팔이 일꾼들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등 정부의 농업정책을 맹비난하였는데, 이는 프로이센 정부의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 신문에서 마르크스의 맹활약으로 그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인 신문」에 대한 당국의 간섭과 검열강도가 높아져 마침내 이 신문은 폐간당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그는 편집장 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로서는 그가 공적인 사회활동에서 첫 번째 당하는 시련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수많은 시련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146쪽

엥겔스는 영국의 경제학자와 철학자, 자연과학자들의 저작들을 섭렵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을 터득하게 되었다. 1843년 말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독·불 연보」에 두 편의 논문 「국민경제학 비판 개요」와 「영국의 현실」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에게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두 편의 논문은 그의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서막이었으며, 마르크스와 평생 동지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1842년 10월 초 처음으로 잠시 만난 적은 있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가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던 듯했으나 위 논문을 통하여 수차례의 서신 교환 끝에 만남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마침내 1844년 8월 24일 오후 파리의 라 레장스 카페에서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실상의 첫 대면이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두 손을 덥석 잡고 곧바로 마르크스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이 새도록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때마침 마르크스 부인은 태어난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딸 예니를 데리고 고향 트리어의 친정집을 방문 중이었다. 두 사람은 몇 날 며칠 동안 평소 자신이 생각해 왔던 현실의 모든 문제를 기탄없이 털어놓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즉 프롤레타리아의 필연적인 자기해방을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은 이론적으로 무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 그들과 함께 고난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149쪽

밀리는 집세와 조악한 식생활, 불결한 위생상태로 인한 가족들의 건강악화, 그리고 짓누르는 런던의 안개는 마르크스 가족을 더욱 압박하였다. 이 처참한 상황을 보다 못해 엥겔스는 마침내 어려운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번민하던 끝에 그토록 싫어했던 맨체스터에 있는 부친의 방적공장 사업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 가족은 엥겔스의 도움으로 기아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고, 마르크스도 지지부진했던 연구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엥겔스는 갈수록 불어나는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대주주로 있는 ‘에어멘 앤드 엥겔스’ 방적공장에서 매일 열 시간 이상 경리장부와 씨름하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부정기적인 보수를 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 점차 신뢰를 회복하여 늘어나는 회사 이익금에서 상당액을 분배받았다. 1861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엥겔스는 회사 경영의 전권을 이어받았다. 이에 따라 엥겔스는 자신이 술회한 것처럼 ‘하찮고 성가신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161쪽

1880년 5월 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랑스 노동자당의 강령을 기초하였으며, 이에 앞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위한 질문서’를 완성하였다. 이 질문서는 “남아, 또는 여아 구분 없이 고용되는 아이들의 최저 연령은 몇 살인가? 16세 이하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은 하루 몇 시간이나 일하는가? 시간외 노동을 하는 경우 특별 수당은 지급되는가?” 등 총 99개 항목이었다. 이 질문서는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착취관계를 세분화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한 역사상 최초의 분석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 혁명’ 에 깊은 관심을 갖고 1882년 1월 러시아어로 된 『공산당 선언』 서문을 썼으며, 여기에서 러시아 혁명이 미래 서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176쪽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과정에서 인류가 많은 피를 흘렸지만, 마르크스 사상은 자본주의 경제의 많은 문제점들을 비판,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안일한 독주를 견제하였으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보완, 발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북유럽 제국의 사회민주주의 복지 경제시스템은 그 좋은 예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문제점 중 핵심은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착취와 인간 소외문제였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론은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열악한 노동 환경?1세기인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더 나아진 것도 없지만?에서 제기된 것으로서, 이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누진 과세제도나 시간외 수당 등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여건에서 제기된 것으로서, 이는 오늘날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는 선진국 특히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8년 9월에 폭발한 세계 대공황과 2012년 미국 심장부 월가에서 발생한 대규모 ‘점령시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빈익빈 부익부, 승자독식이 횡행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4쪽

베토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말고는 선대에는 음악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베토벤의 가계 혈통은 원래 플랑드르(Flandre: 한때 북해에 연해 있는 벨기에 및 네덜란드 남부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소국가였음) 출신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성격이 격정적인 면이 있어 베토벤도 알게 모르게 이 지역 사람들의 뜨거운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의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어렸을 때에 고향의 교회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성년이 되어 교회 베이스 가수로 활동하였으며, 1773년에 본의 궁정 교회 악단원으로 발탁되어 49세 때에는 궁정 악사들이 선망하는 궁정 악장 지위에까지 올랐다. -193쪽

베토벤의 어머니는 이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사별한 후 베토벤의 아버지와 재혼한 평범한 여자로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178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베토벤은 네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다가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에덴으로부터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법을 배웠으며, 그 뒤 테너가수 겸 피아노, 오보에에 능한 파이퍼에게서 피아노 연주법을, 궁정 악사인 로반티니로부터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법을 익혔다. 베토벤이 여덟 살이 되어 피아노 연주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자 그의 아버지는 성급하게 베토벤 독주회를 마련하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초청장에다 베토벤의 나이를 두 살이나 낮추어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연주회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신동이라는 찬사를 듣지는 못하였다. -194쪽

베토벤은 여섯 살 때 학교에 들어갔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특히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 그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린 베토벤은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마냥 하위 그룹에서 맴돌았다. 학식이 풍부한 네페는 이런 베토벤에게 음악 외에도 많은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쾰른 궁정 오르가니스트 차석연주자로 추천하는 등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그 무렵(12세 때) 베토벤은 본 대학 의학도이며 음악 애호가인 18세의 베겔러와도 알게 되었다. 그는 베토벤을 자기가 가정교사로 있는 명문 집안 브로이닝가의 피아노 레슨 교사로 추천하였다. 브로이닝가에는 미망인이 된 부인과 네 명의 아이가 있었다. 미망인은 베토벤을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고 아이들도 베토벤을 친형처럼 잘 따랐다. 특히 그녀의 차남 스테판은 베토벤보다 두 살 아래로서 베토벤을 더욱 좋아했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베토벤이 죽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195쪽

1789년 5월 베토벤은 본 대학 청강생으로 등록하여 철학과 문학 공부를 하였다. 그는 본 대학 슈나이더 교수로부터 프랑스 혁명 사상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강의를 통해서 볼테르, 루소 등 프랑스 계몽사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의 인본주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이때 익힌 프랑스 혁명사상은 그의 인생관, 특히 작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베토벤이 독일 극작가 실러의 작품을 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틈틈이 실러의 『군도』와 『돈카를로스』 등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그의 시 『환희의 송가』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고 언젠가는 이 작품을 곡으로 만들어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꿈은 30년이 지난 뒤인 1823년에 완성된 [교향곡 9번(합창)]으로 실현되었다. -198쪽

1803년 여름 베토벤은 [교향곡 제3번(영웅)]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하였다. 이 곡은 당초에는 프랑스 국민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혁명가 나폴레옹을 찬미하려는 의도에서 작곡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토벤이 분개하여 그 곡 사본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즉 베토벤은 나폴레옹이라는 인간도 결국 자신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민중을 기만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 속물에 불과하다고 개탄하였다. 베토벤은 그 곡의 첫 장을 다시 쓰고 ‘신포니아 에로이카’로 명명하였다. 당초에 그는 음악을 통해서 위대한 혁명가를 영웅으로 미화해서 자신을 나폴레옹과 동일시하려는 생각이었다는 후문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209쪽

베토벤은 청각 상실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틈틈이 소품을 작곡하면서 [교향곡 제9번]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 곡은 이미 오래 전인 1798년 고향 본 시절부터 착상, 스케치해 온 것으로 1822년 10월 런던 필하모니 소사이어티로부터 교향곡 청탁을 받고 완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마침내 베토벤은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지피듯이 사력을 다하여 [교향곡 제9번]의 완성에 전념하였다. 그 작업은 가혹한 운명과의 악전고투였다. 청각 상실, 복부수종과 그칠 줄 모르는 두통 등 갖가지 합병증이 나타나는 가운데 각종 처방과 진통제를 써가며 피와 눈물로 이 작품을 쓰고 지우고 다듬어 갔다. 이 곡은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1759-1805)의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통칭 ‘환희의 송가’)라는 시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1824년에야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착상에서 완성까지 무려 30년 가까운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베토벤은 마치 이 곡을 위해서 운명과의 투쟁과 타협을, 절망과 체념을, 삶에의 부정과 긍정을, 그리고 투혼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주 시간 1시간 11분에 걸친 전 4악장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작곡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응축시킨 한 편의 드라마이며, ‘고난을 통해 환희에 이른(Durch Leiden zur Freude)’ 인간 승리의 대 서사시이다. -216쪽

따뜻한 봄기운이 점차 완연해지면서 의사와 주변 친지들은 봄날에 만물이 소생하듯 베토벤도 회생할 거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나 환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한때 그의 경쟁자였던 훔멜이 그의 제자와 함께 찾아 주었고, 빈에 체류한 이래 우정을 나누어 온 츠메스칼이 반신불수의 불편한 몸으로 고맙게 방문하여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후원자들, 그 가운데서도 리히노프스키가 다시 찾아 주었으며, 특히 그 동안 베토벤을 만나기 두려워했던 슈베르트까지 찾아와 그의 꺼져가는 영혼에 위로의 손길을 보냈다. 베토벤은 특히 슈베르트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그를 접견하기도 하였다. 과거에 먼발치에 서만 바라보았던 베토벤의 지금의 모습은 슈베르트에게는 너무도 측은해 보였다. 슈베르트를 보는 순간 환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문병객들이 떠난 후 베토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다오. 이제 희극은 끝났네!” -226쪽

서른일곱 해의 고난에 찬 짧은 삶, 그것도 마지막 10년간 그림 그리기에만 온몸을 불살랐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불치의 정신병으로 저주받은 운명과 사투를 벌이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연과 인간, 심지어 버려진 ‘들꽃’ 늙은 창녀까지 사랑하며 아픔이란 아픔, 고통이란 고통을 다 겪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 버린 그의 많은 자화상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수난과 고뇌를 읽을 수 있으며, 그의 빛나는 눈동자에서만이 보통사람과 다른 천재의 불꽃 같은 열정과 광기를 능히 엿볼 수 있다. 살아생전에 몇 점의 스케치와 한 점의 유화(단돈 4백 프랑의 헐값으로 판매)밖에 팔지 못했던 이 불운한 천재 화가는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다. 운명의 신은 이 가엾은 ‘성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과 어려운 과제를 안겨 주었다.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의 꿈을 접고, 미를 탐구하는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주변의 냉대와 몰이해, 그리고 끝없는 자기학대와 모멸감 속에서도 동생 테오의 눈물겨운 도움을 받으며 힘겹게 화폭을 채색해 나갔다. 그러나 앞날이 불투명한 이 고독한 작업은 너무도 험난하고 공허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절망에 굴복하기보다 차라리 적극적인 우수를 선택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색채의 아름다운 세계를 찾아 외로운 길을 걸어간 이 고결한 ‘성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 끝에 서른일곱 해의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인류에게 빛나는 유산을 남겨 놓은 채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갔다. 살아생전에 세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의 그림들이 사후 거의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233쪽

고흐는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성경 공부는 물론 삼촌이 소개해 준 코스타 박사를 통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으며, 코스타 박사 조카로부터는 수학과 역사, 지리학까지 배웠다. 공부에 지칠 때는 그림 감상과 스케치로 머리를 식혔는데, 이 순간이 그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때는 스케치에 몰두하여
시험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다시 공부에 전념하곤 하였다. 그러나 고흐는 성직자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15개월 동안의 피나는 공부에도 불구하고 1878년 10월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불합격하고 말았다. 고흐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고흐는 며칠 후 참담한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그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었던 존스 목사를 찾아가 향후 진로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였다. 고흐는 차선책으로 브뤼셀 근교의 전도사 양성학교에 입학하여 3개월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동료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데다가 이따금 분노가 섞인 말투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것은 물론 학교 당국으로부터도 경계 대상이 되고 말았다. -243쪽

고흐로서는 어쩌면 성직자의 꿈이 무산된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갈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방황했던 것이다. 이제 그의 나이도 벌써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남자로서는 자신의 진로를 이미 결정했어도 빠르지 않은 나이이기도 하다.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그의 고달픈 삶도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테오는 고흐 자신도 모르는 형의 그림에 대한 남다른 소질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겹도록 뒷바라지를 해온 것이다. 그리고 테오는 그것이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고흐는 이런 동생이 있기에 힘을 얻었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그림 그리는 데 불사르자!” 이것이 고흐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절실한 욕구요 결심이었다. 그는 이전에 테오에게 보낸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고 내 길을 가자.”고 한편지 구절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여, 앞으로의 삶을 하고 싶은 일에만 전념해야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246쪽

테오는 고흐에게 혈육 이전에 생명의 은인이며 영원한 후원자이다. 그는 불쌍한 형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고, 형을 위해서라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처럼 두터운 형제애가 또 어디 있겠는가? 화가로서 너무 낯설기만 하고 시골뜨기가 되어버린 고흐에게 테오는 파리 미술계의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수집해 주었다. 또한 파리 화랑가의 거물이 된 테오는 형에게 미래의 대 화가들을 접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고흐는 맨 먼저 코르몽의 화실에 나갔다. 코르몽은 1870년 [니벨룽겐의 혼인]이라는 그림으로 살롱전에서 상을 받은 후 명성이 치솟은 화가였다. 그는 이곳에서 키가 기형적으로 작고 기인인 화가 로트레크를 만났으며, 고흐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그가 죽을 때까지 깊은 우정을 간직한 베르나르(1868-1941. 프랑스 화가로 형태를 검은 윤곽선으로 분할해서 그리는 ‘클루아조니즘’의 창시자)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베르나르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인상파 화가들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였으나 식견이 높고 실험적인 그림을 그리며 이들 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었기 때문에 이들과 친교가 두터웠다. -260쪽

1883년 3월 어느 날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양은 날마다 노랗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으므로 태양과 밝은 색채를 그리워하는 화가들은 남프랑스로 이주하기를 권하였다. 4월이 되자 고흐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배꽃과 복숭아꽃을 정신없이 화폭에 담았다. [꽃이 피는 과수원]을 그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도 꽃이 핀 나무를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한번 그리고 싶다고 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꿈과 도전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고흐는 이런 밤하늘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낮에 읽지 못한 책을 밤늦도록 읽었다. 화가인 고흐는 그림 그리는 일 못지않게 독서에도 열중하였다. 그의 수백 통의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흐는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었으리라. -266쪽

예술에 대한 열정은 두 사람 다 같았으나 두 사람은 똑같이 다혈질이어서 종종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많았다. 고흐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고갱이 무심코 한 말에 대해서도 신경이 거슬렸다. 특히 고흐가 칭찬하는 선배 화가 밀레, 브르통에 대해서도 고갱은 일소에 부쳤으며, 그럴 때마다 고흐는 격한 어조로 반박하였다. 이러저러한 일로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하루가 멀게 다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은 생활비를 쓰는 데도 차이가 났다. 고흐가 규모 없이 있는 대로 쓰는 타입이라면 고갱은 짜임새 있게 알뜰하게 쓰는 습관이어서 두 사람의 마찰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심지어 고갱은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하여 홍등가를 찾을 때에도 소득과 지출을 고려하여 계획성 있게 꾸려나갔다. 그러다가도 그림을 그릴 때만은 서로가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고갱은 고맙게도 고흐의 발전하는 그림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가 공동생활 중에 그린 [책을 읽는 부인], [에텐 정원의 추억], [아를 정원의 무도장] 등 몇 몇 작품들은 고갱의 영향을 받은 느낌을 준다. 고흐와 고갱은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도 서로가 습관이 달랐다. 사색적이고 다정다감한 고흐는 할 이야기가 많다면서 밤늦도록 불을 끄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고갱은 집에 돌아오면 식사 후 일찍 곯아떨어졌다. 고흐가 오직 예술과 문학에 대해서 열을 올리는 반면, 고갱은 사회세태와 정치,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제를 내세웠다. 고갱은 아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뭇 여성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의 남성미 넘치는 외모도 외모려니와 넘치는 정력은 많은 여성들을 매료시켰으나, 고흐는 이 방면에서는 언제나 고갱의 그늘에 가려 뒷전이었다. -271쪽

테오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고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기력이 다하여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러고 나서 초점이 흐려진 두 눈으로 허공을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두 눈을 감았다. 그 시간은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이었다. 천재 화가의 비극적인 삶은 이렇게 끝났다. 그의 나이 불과 37세, 아직도 살아야 할 날이 많았지만 천재는 범인들의 일반적인 삶보다 훨씬 압축해서 치열하게 불꽃처럼 살다 갔다. 교회 목사는 자살이라는 이유로 장례 집전을 거부하였다. 사흘 뒤 조촐한 그의 장례식에는 피사로와 베르나르, 의사 가셰, 탕기 영감, 그리고 이웃몇몇 친지들이 참석하였다. 고흐의 관은 그가 평소 거닐던 오베르의 까마귀 나는 밀밭길 옆 공동묘지로 향하였다. 관에 던져진 조화 속에는 그가 즐겨 그리던 해바라기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고흐의 시신은 테오의 절제된 흐느낌 속에서 땅속에 묻히고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그렇게 끝이 났다. -283쪽

망설이던 끝에 로댕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조각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아버지 장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완전히 헛길로 들어섰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화가는 고사하고 ‘석공’이 되겠다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댕은 르콕 선생에게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가 조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르콕은 로댕에게 먼저 두상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진 로댕은 할 수 없이 아버지더러 모델이 되어 달라고 졸라댔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었으나 아들의 뜻이 워낙 완강한지라 결국 모델이 되어 주긴 했으나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하는 것이 따분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노릇이었다. 아들의 하는 일이 못마땅하거니와 앞으로도 지겨운 이 일을 몇 번이나 더해야 할지 몰라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포즈를 취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두상이 완성되었다. 로댕은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르콕 선생과 르콕의 친구인 국립미술학교 출신의 맹드롱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가 만든 두상을 선보였다. 맹드롱은 이 두상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르콕의 간곡한 부탁으로 로댕을 국립미술학교에 응시할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291쪽

로댕이 수도원에 들어간 해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인 1862년이었다. 로댕으로서는 규율이 엄격한 수도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모든 어려움을 감내해 나갔다. 로댕은 이따금 지난날의 갖가지 일들과 회한들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국립미술학교 낙방의 상처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로댕의 얼굴은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자상한 에마르 신부는 로댕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단테를 아느냐고 물었다. 에마르 신부는 고뇌에 찬 인간의 참모습을 그린 단테의 『신곡』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으며, 구스타프 도레의 동판화가 담긴 『신곡』을 보여 주었다. 로댕은 단테의 삶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도레의 섬세한 동판화에 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로댕은 『신곡』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스케치해 보았다. 이런 로댕을 유심히 관찰한 에마르 신부는 그에게 창고 하나를 작업실로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로댕은 성직자이면서도 예술에 대한 이해심이 깊고 인간미가 넘치는 에마르 신부가 무척 고마웠다. 로댕은 모든 잡념을 잊고 열심히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댕은 다시 조각에 전념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에마르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에마르 신부는 로댕이 수도원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온 터라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자한 에마르 신부는 수도원은 감옥이 아니기 때문에 수도원의 문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언제나 열려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신의 소명에 따라 인간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소질을 키워 간다면 그것이 바로 신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294쪽

1883년이 스산하게 저물어가는 세밑 어느 날, 동료 조각가 부셰가 로댕을 찾아와 조각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에게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즈음 로댕은 [지옥의 문] 제작이 여의치 않아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지만, 절친한 부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부셰는 로댕에게 카미유 클로델이라는 앳된 숙녀를 소개하였다. 로댕이 본 그녀의 첫 인상은 조각을 하기에는 다소 왜소해 보였지만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무엇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 있었다. 특히 아담한 키에 우수가 짙게 배어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저 먼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댕은 그녀의 젖어 있는 두 눈에서 생명의 불꽃이 작열하는 그 무엇을 감지할 수 있었다. 로댕이 강연을 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진지하게 로댕을 응시하고 있었고, 로댕의 시선도 이따금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로댕이 느낀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는 아름답다 못해 관능적이었고, 강렬한 시선은 마주 보기에는 정말로 눈부셨다. -319쪽

어떤 의미에서 조각이라는 직업은 로댕과 같은 강인한 남자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의 대상이지만, 고립무원의 연약한 카미유에게는 버겁고 가혹한 시련이 뒤따랐다. 로댕이 아무리 변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 나약한 여인을 한껏 유린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물적인 성욕을 충족시키는 목적물에서 영감을 일깨워 주는 대상으로까지 말이다. 로댕의 에로틱한 작품 [영원한 봄]과 [영원한 우상], 그리고 [입맞춤] 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녀를 통해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당시 로댕은 카미유가 자리를 비울 때에는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었으며, 카미유는 사랑과 외경의 마음으로 로댕에게 영과 육을 다 바쳤다. 로댕의 억센 양팔과 거친 숨결에 가련한 카미유는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지만, 어쩌면 카미유 자신도 스스로 그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로댕은 신선한 이 요정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영감을 성취하였으며, 가엾은 카미유는 그것이 자신의 소명인 것처럼 착각하였을 것이다. -322쪽

키가 150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고 깡마른 피아프는 무대에 설 때마다 항상 검은 드레스만을 입고 절규하듯 온 몸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대부분 일상의 쉽고 간결한 언어로 사랑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체념, 삶과 죽음 등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고 있어 대중의 가슴에 쉽게, 그러면서도 진하게 파고들었다. 그러기에 힘겨운 삶에 찌든 대중은 그녀가 혼신의 힘으로 노래를 부를 때 함께 울고 웃으며 시름을 달랬다. 피아프의 비탄에 잠긴 이러한 노래 스타일은 출생부터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까지 그녀의 굴곡 많은 비극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애절한 노랫가락이 당시 프랑스 국민에게 그처럼 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폐해진 국민정서와 맞아떨어진 점도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도 이런 피아프를 두고 “노래의 무대에서 그녀는 천재다. 그녀 이전에 아무도 없었고, 그녀 이후에도 아무도 없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흉내 낼 수 없다…… 그녀는 4월의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벨벳의 파도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다. 노래하는 이는 더 이상 피아프가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우리를 감싸는 달빛이 노래하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신이 내린 ‘영혼의 목소리’, 아니 ‘천상의 목소리’ 바로 그 자체였다. 피아프에 의해서 더 새롭게 창조된 샹송이라는 노래 장르는 어느 새 프랑스인만이 즐기는 노래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음악 애호가들의 노래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45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루이 가시옹은 다시 거리의 곡예사로 나서야만 했고, 어린 피아프는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다가 열두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일터로 나갔다. 피아프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던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놀라울 정도로 노래를 잘 불러 아버지의 수입에 큰 도움을 주었고,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수입이 오히려 아버지 수입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그녀로 인해 많아진 수입은 가시옹의 술값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철이 들기 시작한 피아프는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해봐야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녀보다 세 살 아래의 배다른 동생(?) 시몬 베르토와 독자적인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노래는 주로 피아프가 부르고, 베르토는 노래가 끝난 후 빈 모자를 돌려 푼돈을 거둬들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그들의 수입은 짭짤했고,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아 피아프의 노래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피아프는 열일곱 살 때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상품배달원 푸티와 사랑에 빠져, 둘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녀의 푸티와의 동침이 남성과의 첫 경험은 아니었다. 얼마 후 피아프는 자기가 태어났던 트농 병원에서 세실이라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엄마로서의 기쁨도 잠시, 모성의 본능이 무르익기도 전에 피아프는 이국적 풍모의 군인을 새 애인으로 맞았다. 사랑에 눈먼 피아프는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세실을 남편 루이에게 보내버리고 이 젊고 잘생긴 군인과 단꿈에 젖었다. 후에 어린 세실이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모성적인 본능으로 목 놓아 울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훗날 그녀는 고통을 잊으려고 술에 취할 때마다 그날의 비극적인 순간을 되뇌이곤 했다. 피아프는 살기 위해서 환락의 거리 피갈에 나가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인생의 쓴맛 단맛이 조금씩 농축되면서 더욱 농익어 갔다. 피갈은 에로틱한 타락의 거리이지만, 그곳에는 가난한 자에게 위안을 주는 음악이 있고 무명가수에게는 기회와 희망이 물결치는
거리이기도 했다. 마침내 꿈같은 기회가 피아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349쪽

마르셀이 죽은 뒤 많은 남성들이 피아프에게 추파를 던졌다. 이들 대부분은 피아프에 접근하였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보다 껴안기 힘든 까칠하고 투정이 심한 어린애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어느 날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 사라지곤 했다. 그 중에 한 명이 위그 바샬이라는 사진기자였다. 그는 피아프를 이용하여 전속 사진기자로 행세하며 그녀에 관한 스냅사진을 많이 찍어 훗날 유명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많은 호사가와 주간지 기자들이 피아프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지고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밤낮으로 취재에 열을 올려 피아프의 심신을 괴롭혔다. 바샬은 이들과 공생하며 많은 득을 보았다. 가련한 피아프는 이처럼 많은 호사가들의 이용물이 되어 갔고, 그녀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게 점차 소진되어 가기 시작했다. -381쪽

1951년 이후 1963년 생의 마지막 해까지 피아프는 네 번의 자동차 사고로 인한 일곱 번의 크고 작은 수술과 그 후유증, 기관지염, 폐렴, 위궤양 수술 등 온갖 병마에 시달리며 자신의 몸을 제대로 지탱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피아프로서는 지금까지 용케 살아온 것만도 기적이었고 앞으로의 삶도 기적일 것 같았다. 그 기적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387쪽

흉노에 항복한 동료 이릉 장군을 옹호한 죄로 자신의 군주 한 무제로부터 죽음보다 더한 굴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으로서는 허망하게 목숨을 끊기에는 너무나 한이 많았다. 부친 사마담의 유언인 『사기』의 저술만 아니었다면, 사나이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참하게 잘린 성기 절단 부위가 썩지 않도록 ‘잠실’이라는 뜨겁고 어두컴컴한 독방에 갇힌 사마천은 아픈 상처를 부여안고 뜬 눈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다. 사나이의 자존심을 지켜 떳떳하게 그냥 죽을 것인가, 아니면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극한적인 한계상황에서 결국 사마천은 굴욕적인 삶을 선택하였다. 부친의 뜻을 받들어 『사기』를 완성하고 죽을 수 있다면 짓밟힌 사나이의 자존심을 그나마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자위하였다. -395쪽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것은 임소경에게 편지를 보낸 시기인 55세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기』를 완성한 후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고 하였으나 단 하나뿐인 딸을 출가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딸의 혼사를 마치고 60세 때쯤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정본은 명산에 깊이 비장하고 부본은 경사에 두었다가 후세에 성인 군자의 보살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사마천의 딸은 대사농이라는 직책을 가진 양창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운을 낳았는데 그의 벼슬이 중랑장에 올랐다. 사마천의 외손자인 그가 훗날 『사기』의 부본을 조정에 바침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409쪽

사마천은 주로 「사기열전」편을 통해 다양한 인간상을 제시하여 후세에 많은 교훈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는 역사에서 명멸한 다양한 인간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술하면서 그들의 행적 못지않게 내면에 흐르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아래의 각 인간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명성을 날린 명사들보다 대부분 실패와 좌절을 겪고 처절하게 죽어간 비극적인 인간들의 면모에 더욱 애착을 갖고 이를 밀도 있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점은 자신의 운명과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10쪽

사마천은 역사가로서 투철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역사에서 명멸한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뜻 깊은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윤리의식과 도덕관, 현실 순응 등 동양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 때로는 기존의 가치 질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는 군주로부터 부당한 수모를 당하였기에 이에 대한 원한감정을 저술로 승화시켰으며, 핍박받는 민중과 약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한을 되새겼다. 그는 권력의 언저리에 있었지만 호가호위하지 않았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었다. 그가 기술한 역사 인물들은 현실과 야합하여 행복을 향유하는 인물들보다 명분과 의리를 중히 여기는 현실의 패배자들에 더욱 애착을 갖고 그들의 험난한 삶을 밀도 있게 부각시켰으며, 그들과 함께 고뇌하고 괴로워했다. -441쪽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지상에 천재가 있었다. 천재라는 이름으로 더욱 고독하고 더욱 아프고 고달픈 일상을 보내면서 스스로 불행을 만들어 갔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창조해낸 예술과 문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분명한 가치로 우뚝 서 있다. 일생을 두고 세인들의 몰이해에 시달리면서도 편안한 의자를 거부하며 초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그들에게도 형벌처럼 앓아야 했던 인간적 고독이 있었으며, 바로 그런 자신과 무섭게 싸워 이긴 위대성이야말로 천재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 안승일은 천재는 반드시 혼자 만들어 지지 않고 조력자와 동행자가 있었음에 감사하고 있으며, 그들 광기와 인간적 약점을 이해하는 조력자도 지상의 천재를 태어나게 한 또 하나의 천재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인생이 나약하고 흔들리고 있다면 이 책을 탐독할 필요가 있다.”

신달자(시인·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5,3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