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사고에 불행 중 다행 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열변을 쏟아냈다.
“저는 이번 사고로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사람의 목숨만 앗아간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미래까지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빼앗긴 건 그 사람 혼자가 아닙니다. 제 미래에도 이제 더는 그가 없으니까요. 당신들은 피해자 유족의 미래까지 빼앗은 겁니다. 그 사실을 알기나 합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 p.67
“죽은 사람을 하차시키려고 하면 원래 현실로 돌아온다고 말했을 텐데.”
아연실색한 내 등 뒤로 어느새 유키호가 나타나 서 있었다.
“다들 똑같아. 내가 말한 규칙에 의심을 품고 열차에서 내리게 하면 살까 싶어서 죽은 사람을 데리고 내리거든. 안타깝지만, 그건 안 돼.”
“….”
“다시 한번 말할게. 죽은 사람과 만날 순 있어도 그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아. 그걸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때 이 열차에 올라타.” 그녀는 위압적으로 말을 내뱉으며 팔짱을 꽉 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유령 열차의 차체가 나날이 투명해지고 있어. 아마도 머지않아 하늘로 올라가겠지. 이제 기회가 얼마 없다는 뜻이야. 안녕.”
--- p.77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단 하나뿐이야.”
“….”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 구로랑 신나게 놀고, 돈가스 덮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난 네가 평생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할머니가 돼서도. 평생, 영원히.”
--- p.88
나는 옛날부터 동네의 작은 공무점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경멸했다. 공사장 인부였던 아버지는 사시사철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일했다. 학부모 참관 수업에 올 때도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학교 근처 하수구를 청소하거나 수리를 하려고 학교 교정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학교 친구들이 아버지를 흘끔거리는 게 싫어서 모르는 사람인 척한 적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도쿄의 유명 사립대학에 입학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절히 바라던 꿈을 이뤄 평균 연봉이 1,200만 엔이나 되는 종합상사에도 무사히 취직했다. 하지만,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다.
--- pp.113~114
아버지 장례식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조문객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잠든 아버지 앞에 줄지어 서서 “고마웠습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 나는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속으로 내내 비웃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시선 끄트머리에서 웃자란 풀이 바람에 몸을 떨었다. 어릴 때 이 공터에서 아버지와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대로 페달을 밟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가 줄곧 따라왔었다. 비가 내리던 날도. 출근했다가 녹초가 돼서 돌아온 날에도. 나는 아버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죄해야 한다.
--- pp.147~148
“당신이 우산을 씌워줬던 날, 나는 죽을 생각이었어요.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부모님은 이혼했고, 같이 사는 아빠는 바빠서 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어요. 지금 거즈로 가렸지만, 내 오른뺨에는 커다란 반점이 있어요. 키도 작아서 늘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왔고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던 그날, 당신이 그런 내게 우산을 씌워줬어요. 그 때 당신이 준 도넛의 맛을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날의 나에게 계속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서…. 그 도넛 상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살렸어요.”
--- p.243
매스컴 관계자가 연일 집 앞에 진을 치고 인터폰을 눌렀다. 쉴 새 없이 집 전화가 울렸으며 장난 전화는 한밤중까지 계속 이어졌다. 가장 충격이었던 건 이웃들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돌아간 틈을 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을 때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며 사고 당시 집 밖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친절하게 대해줬던 사람들이 어딘가 쌀쌀맞았다. 쓰레기장 옆에서 보란 듯이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 p.269
사고가 나고 나서 밤에 깨지 않고 깊이 잠든 날이 하루도 없다. 몸무게도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졌다. 오늘 아침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흰머리가 늘고 창백하게 야윈 얼굴은 윤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내 얼굴이라고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괜찮아. 내가 항상 옆에 있잖아.”
안쪽 방에서 진료를 마친 노부부가 로비로 돌아왔다. “걱정할 것 없대도, 참.”
“여보, 고마워요.”
남편이 표정이 어두운 아내의 팔을 꽉 잡고 부축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어깨를 빌려주던 그 사람은 이제 없다.
--- pp.281~282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열차를 운전했던 남편분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물론 사모님이 책임지실 일도 없습니다. (중략) 피해자 설명회 날, 제가 본 당신은 제 옆에 주저앉아 있던 며느리와 다름없는 제 아이의 약혼녀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이번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제가 본 당신 눈동자에는 울다 지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애수가 서려 있었습니다.
--- p.292
열차의 흔들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회전하던 바퀴가 ‘니시유이가하마 역’이라 쓰인 표지판 앞에 딱 맞게 멈춰 섰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떼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유, 하고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찰나, 찰카닥 소리와 함께 기관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남편이 나왔다.
당황한 나를 보며 남편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려.”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했다.
“내려. 부탁할게.”
“….”
“미안해. 미사코. 정말 미안하지만… 살아 있어줘.”
남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더니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편의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엉겁결에 열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 pp.3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