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울증이 사라졌어요. 처음에는 우울증과 열 번 싸워 한 번 이기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홉 번 정도는 이길 수 있을 만큼 성장했어요. 이 글은 제가 약이나 외부의 도움 없이 마음의 면역을 만들어 갔던 과정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 책을 다 읽었는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언젠가 아주 다급하게 무엇이라도 손에 꼭 붙잡고 싶을 때, 너무 절실하게 이 땅에 발을 딛고 싶을 때, 이 책의 한 문장이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마취 없이 수술받을 수 있으시겠어요?」중에서
냉정하게 말하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남은 생’은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에요. 다음 자살 기도까지 기껏해야 1년? 3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지도 알 수 없죠. 당신은 지금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며 지금 손에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세요. 그게 아직도 그렇게 중요해 보이나요?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생활인이 아니라 여행자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살아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해요」중에서
그것은 아주 작은 조각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또렷이 빛을 내고 있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정말 자신을 뼛속까지 혐오했다면 스스로를 죽이는 데 망설이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었겠죠. 혐오스러운 벌레를 죽일 때 슬프게 울지는 않잖아요. 항상 자신을 벌레나 쓰레기에 비유하면서 미워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마음도 한편에 분명히 존재했던 거예요.
---「몰랐겠지만, 우린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어요」중에서
그래서 저는 ‘다이소에 가서 물건 3가지 사 오기’라는 미션을 걸고 외출을 시작했어요. 우울증이 심할 때는 호기심도 없고 아무 의욕도 없잖아요. 그런데 물건 3가지를 사는 게 미션이니 어쩔 수 없이 진열대를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한눈에 봐도 푹신해 보이는 쿠션들, 스케치북의 하얀 종이, 알록달록한 머리 끈들, 당근이 달려 있는 볼펜, 난생 처음 보는 아이들 장난감…. 오랜 우울증으로 감각이 무뎌져 있던 제게는 이곳이야말로 신천지였어요. 그날 제가 사 온 건 어쩌면 물건이 아니라 ‘호기심 3가지’인지도 모르겠어요.
---「밖에 나가 물건 3가지 사 오기〉 중에서
암각화를 보면서 전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시인처럼, 일하고, 먹고, 놀고, 만들고, 그리고 싶었죠. 손을 이용해 도구들을 만들고, 발을 이용해 대지 위를 뛰어다니고 싶었어요. 그렇게 충만한 하루를 보내고 밤이 찾아오면 다음날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기대하며 잠들고 싶었어요. 너무도 간절하게….
---「가까운 전시장, 공연장 방문하기」중에서
맨손으로 흙을 만지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푸른 생명들을 바라보는 건 즐겁고 뿌듯한 일이었어요. 배추 심던 날이 지금도 기억나요. 그날 마침 비가 억수같이 왔는데, 이미 수업 준비가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해야 했어요. 엄청난 비를 맞아 가며 배추를 심어야 했지만 작업이 끝난 후 사람들의 얼굴엔 뿌듯함이 그득했죠. 그 풍경 사이엔 온통 젖은 채로 웃고 있던 저도 있었어요.
---「몸으로 배우는 삶: ‘도시농부학교’와 ‘모두의 학교’」중에서
춤 테라피에서는 몸이 주인공이었어요. 몸에게 모든 주도권을 주고 알아서 활동하게 내버려 두었죠. 그러자 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이고 신나게 뛰놀면서 스스로를 표현했어요. 무한한 자유가 있다면 딱 그런 상태일 것 같아요. 그런 극한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 준 몸이 이젠 더 이상 밉지 않아요. 나는 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함께 살아가는 거였어요.
---「갇혔던 몸 해방시키기 : 춤 테라피」중에서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니 다시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하게 되었죠. 또 협동조합 측에서 계속 소모임을 조직하고 활동할 수 있게 여러 프로그램들을 제공해 준 덕분에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함께했던 멤버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이런 작은 규모의 공동체는 우울증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돼요.
우울증을 앓는 이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부서진 통나무처럼 바다 위를 혼자 표류하는 신세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이런 소모임에 참여하게 된 이후엔 저를 붙잡아 주는 사람들과 조직이 생겼죠. 이제 전 알 수 없는 곳으로 혼자 떠내려가지 않을 거예요.
---「작은 공동체에 참여하기」중에서
습관들을 하나씩 만들다 보면 일상이 조금씩 재건돼요. 그러다 보면 자기 효능감이 높아져 우울감을 적게 느끼게 되고, 우울증의 가장 무서운 증상 중 하나인 무기력에도 저항할 수 있게 되죠. 뭔가를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 하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싶어도 무기력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게 되는 거죠.
---「우울증을 쫓아내는 부적 ‘습관’」중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지 휴식이 아니에요. 단순히 번아웃된 상태라면 적당한 휴식으로 치유될 수 있겠지만 우울증은 상황이 달라요. 우울증 환자는 이미 부정적인 사고에 잠식당한 상태예요. 단순히 보기 싫은 사람들, 하기 싫은 일, 힘든 공부를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단계는 지난 거죠. 머리 안에 자리 잡은 우울증 공장은 내가 회사에 있든 집에 있든 상관없이 계속 돌아가면서 우울과 불안을 만들어 내거든요.
---「필요한 것은 일상이지 휴식이 아니에요」중에서
우울증 환자에겐 사람이 구명보트예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주위 사람들을 잘 지켜 나가야 해요. 주위 사람들이 우울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에게 상처 주는 말과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차라리 관계들을 모두 정리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많이 올라왔죠.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저의 구명보트라 생각하며 버텼어요. 우울증과 싸우며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해 나가는 것이 어렵긴 했지만,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게 우울증 치료를 위해서는 더 도움이 되더라고요.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는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랬죠.
---「결국 사람이 구명보트예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