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면 마땅히 해야 하는 사내 구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 나이에는 슬슬 결혼도 해야 했고, 집도 마련해야 했으며, 번듯한 직장도 있어야 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준이기도, 세상의 잣대이기도 했다. 과연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 것일까.
--- p.16
늘 그랬다. 무언가가 되지 못해 불안한 것보다 더 불안한 건 언제나 주변인들이었다.
--- p.26
교수님도 그랬고, 아버지도, 나를 둘러싼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나의 꿈과 희망을 절박하게 외쳐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함부로 말하기가 두려웠다. 언젠가부터 갈망하는 내가 되지 못할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 p.26
일진은 암묵적인 권력 체계여서 선생님들도 어느 정도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폭력 문제가 터져도 학생 개인을 문제 삼았지 조직 전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의 권력 현상을 그저 그 시절에 겪는 성장통 정도로 가볍게만 여겼다. 피지배자들의 순응과 복종, 그리고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 p.43
인간은 원래 자신을 환영해 주는 곳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 고통을 받으며 있는 것보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곳에서 사랑받기를 원한다. 세상에 인정만큼 경이로운 일이 또 있을까. 인정으로 인해 우리는 보통의 존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존재의 의미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 p.51
추방 중에서 가장 잔인한 건 관념적인 추방이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여전히 그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나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오히려 물리적인 추방이 덜 고통스럽다. 가령 망명자는 낯선 곳으로 추방되게 되면 그곳의 생리에 어울리는 새로운 삶과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자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이다. 오직 그것만이 살 길이다. 하지만 그건 한 집단이 내린 잔인한 처벌이기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따돌림을 당해 자살하는 사람은 있어도 퇴학을 당해 자살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 p.77
인간은 원래 지금의 위치보다 내려가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 사회의 어떤 영역이든 강등이나 좌천을 당한 이들의 낯빛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상석에 있을 때의 위풍당당한 기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다. 추락한 인간은 마치 쪼그라든 것처럼 위축되어 있기까지 하다.
--- p.99
“별거 없어. 한번 팰 때 진짜 죽기 직전까지 패는 거야. 이정도면 됐다 싶을 때 더 패는 거지. 그러면 맞는 놈들은 뼛속 깊이 내 존재를 기억하게 돼. 이제 내 모습만 봐도, 아니 내 이름만 들어도 오줌 지리게 되는 거지. 그러면 아까 그 새끼처럼 복종하게 돼 있어.”
--- p.103
“나아가야 할 길? 그게 뭔데?”
“다 깨부수는 거지.”
“어떤 걸?”
“나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그 모든 것들.”
--- p.108
돌이켜보면, 그 행위들은 열여덟 살의 내가 본능적으로 피워올리는 처절한 구조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마음을 헤아려줄 친구가 필요했다.
--- p.113
때로 삶은 거미줄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다. 온전히 나의 의지와 자유로 나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믿었던 세상이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삶은 일종의 덫이다. 거미줄이 몸에 엉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 발버둥 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손에 잡히는 건 거미줄밖에 없다. 발버둥칠수록 거미줄은 더욱더 옥죄여온다. 거미줄에는 이제 먹음직스러운 희생양이 무기력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다.
--- p.118
“시? 그건 다 인생 패배자들의 자기 변명과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거다. 인생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움을 논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으니 아름다운 척 각색하는 것뿐이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견뎌낼 수 없으니까. 내 너도 그렇게 될까 심히 걱정이다, 걱정이야.”
--- p.160
때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거짓은 훌륭한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 p.166
하지만 제 아무리 견고한 거짓의 성도 조그마한 진실의 조각만으로도 아주 쉽게 무너져버린다. 마치 철판에 생긴 녹처럼 모든 걸 부식시켜 버린다.
--- p.166
하지만 그건 반성이 아닌 분노의 눈물이었다.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엉뚱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자신하고 있는 담임 선생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초라하게 앉아 기계적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엄마. 나는 그 모습에 분통이 터졌다. 제기랄! 여전히 나는 그대로인데! 고민들은 여전히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데!
--- p.172
나는 물건을 빼앗기는 약자였고, 얻어맞기나 하는 패배자였으며, 성적도 밑바닥인 꼴통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찌질이었다.
--- p.173
이미 학생들도 학교를 초월한 어른들의 가치가 물들어 있었거든.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나 할까. 부모님이 어떤 직업이고 얼만큼의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을 세습하고 부를 상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무언가를 성취한 거나 다름없었거든.
--- p.179
“일진은 동물적인 감각이 뛰어난 애들이야. 가만히 생각해봐. 관석이가 모든 애들을 괴롭히지 않아. 건드리지 않는 애들이 대부분이야. 관석이는 이미 겁 먹어 있는 애들만 골라 괴롭히고 있어. 결투를 해서 굴복시킨 다음 괴롭히는 게 아니야.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애들에게만 다가가는 거지.”
--- p.180
“그 누구도 우리의 삶에 해결사가 될 수 없어. 오직 자신만이 해결사가 될 수 있을 뿐이야.”
--- p.181
“선생님도, 부모님도, 친구도 결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어. 해결책은 반드시 스스로 찾아야 해.”
--- p.182
“하지만 저항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긴 할까.”
“저항 의지를 갖는 그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거야.”
--- p.182
“과거는 애써 지우려고 해도, 도망치려 해도 집요한 추격자처럼 따라와서 발목을 잡고 마는 거지.”
--- p.210
“넌 화가가 되고 나는 시인이 되는 거야.”
--- p.246
“네가 왼손잡이였어?”
“응. 근데 오른손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어. 모두들 오른손을 쓰며 살고 있으니까.”
--- p.247
비워낸다는 것은 본능에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나 자신과 이별해야 할 차례다.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태어나는 것이다.
--- p.254
“나는 이 세상엔 우연이란 없다고 생각해. 모든 일엔 이유가 있지. 우연이란 그저 겁쟁이들과 멍청이들이 인간과 세계가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인과율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만들어낸 나약한 개념일 뿐이야.”
--- p.266
“그들보다 더 멋진 비극을 만들기 위해서.”
--- p.267
“유구한 전통과 자명한 진리. 이 건학이념이야말로 거대한 괴물과 다를 바 없어. 레지스탕스는 이제 이 괴물을 부정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울 거야.”
--- p.289
“우리는 오늘, 학교의 압제에 항거하기로 결의했다. 오늘날의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란 말인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독재자의 모습뿐이다. 그는 우리에게 순종적인 태도와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하며 우리를 자유도 낭만도 없는 황혼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이고 무엇을 위한 진리란 말인가. 그것은 독재자의 전리품이지 우리 시대를 위한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 퍼질 뿐이다.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서막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 p.301
그 어떤 수혜자들도 우리에게 동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범죄자가 누군인지 알고 싶어할 뿐이었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사건이 터지면 학생들이 혁명의 열기에 열광하고, 독사가 두 손 두 발 들며 정책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불안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는 경찰까지 도착했다.
--- p.316
기분이 이상했다. 조용하게 나붙은 대자보가 오히려 요란한 의적 활동보다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 p.320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한 것은 그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제 친구들이자 후배니까요. 그들도 앞으로 학교에 펼쳐질 올바른 변화를 지켜볼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가 옳지 않았다는 것도 깨닫겠지요. 대신 그들의 실수를 눈감아 주신다면, 제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징계를 받겠습니다.”
--- p.323
“도대체 무엇을 위한 혁명이고, 투쟁이었을까.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고, 나는 이렇게 나약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야….”
--- p.326
“네가 되고 싶다는 모험가이자 시인이 어떻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거든. 그게 어떤 직업처럼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취업의 문을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자칭 시인이자 모험가라고 떠들어댄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뭐 시집을 내고 여행 좀 몇 번 하면 시인이나 모험가가 되는 걸까.”
--- p.350
“내게 시인이라는 건 어떤 목표가 아닌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야. 시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진짜 시인처럼 사는 거지. 어떤 이끌림을 따라 본능적으로 사는 거야… 그걸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 p.352
“세상은 학문이란 위만으로 소화시킬 수 없어. 지혜와 영감이라는 소화기관도 필요하지. 이것은 결코 학문의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야. 오직 날것 그대로의 세상에서만 배양할 수 있지. 책 속에서 선지자들은 어떻게 그러한 소화기관을 얻는지, 그것을 통해 어떤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지 얘기하고 있어. 나는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 낯선 세상으로 향할 거야. 새로운 것들을 직접 씹어 먹고 소화시켜서 세상을 자양분으로 삼는 거지.”
--- p.386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거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열차를 타고 가는 거지. 그리고 북유럽으로 넘어가 빙하와 밤하늘의 오로라도 볼 거야.”
--- p.387
“언제나 너는 내가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해내거든. 나라면 결코 생각도 실천도 하지 못할 그 무언가를….”
--- p.394
“더 이상 타인이 규정해 주는 대로, 나의 유한한 인생을 살진 않을 거야. 이제는 스스로 개척해 볼 거야. 부모님이 동의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변할 건 없어.”
--- p.394
카인의 말로는 추방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피하게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정의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세상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 p.409
그렇다면 나는 그저 아류에 불과한 것일까. 온전한 내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은 이런 모작(模作)에 불과한 내게 이제 그만하라고, 철 좀 들라고,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 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