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손 살인 사건이 한창 이슈인데요, 특별히 최성진에게 관심을 두신 이유가 있을까요?”
“청소년 범죄가 날이 갈수록 지능적이고 잔혹해지고 있다는 점,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의 경우, 아시는 바와 같이 성인에 비해 처벌이 가볍기 때문에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입니다. 저는 프로파일러로서 이런 법적인 부분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지만, 소년범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법이 막지 못하는 청소년 범죄를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범의 경우 성인이 된 후 재범률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이런 연구가 전체 범죄율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고요.”
“경정님이 생각하시는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이 갖는 의미는 뭘까요?”
“쉽게 말하면, 프로파일러는 통역사죠.”
“통역사요?”
“흔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나,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소시오패스의 경우,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덕적 기준으로 움직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대부분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 p.17
도윤은 슬쩍 자존심이 상했다. 이 아이는 나를 뭐라고 여기는 걸까? 고백을 받았다고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도윤은 이쯤에서 화를 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태은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호의적인 제스처라고는 할 수 없는, 단순히 빠르게 걷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도윤에게는 마법 같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도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만큼 태은의 걸음도 빨라졌다. 도윤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인형처럼 속절없이 따라 걸었다. 왜 자신의 손목을 잡아끄는지 묻지 않았고, 태은 역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태은은 도윤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 p.47
“명문고 2학년이면, 전교 1등이 태은이죠? 그 자리, 도윤이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클리닉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궁금하네요. 들어오면서 봤는데, 클래스로 표시된 곳은 교실이라기보다 병원 같던데.”
해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우회적으로 물었다.
“잘 보셨어요. 여기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한 것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도록 뇌를 열어주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학원이 아니라 클리닉이라고 소개하죠.”
“한 달 치 약이에요.” 승리가 해수의 손에 종이가방을 쥐여주며 말했다.
“태은이가 먹는 거랑 같은 거예요.”
“어쩌라는 거죠?”
“이걸 도윤이한테 먹여보시고 한 달 후에 다시 뵙죠. 그 전에 3월 모의고사랑 중간고사가 있으니 신뢰를 쌓기엔 충분한 시간 같네요.”
“이 약이 안전하다는 걸 어떻게 믿죠?”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해수가 물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윤을 위해서 자신이 약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는 걸.
“아이들을 보고 믿어야죠. 이 약을 먹고 똑똑해진 저 아이들을요.”
--- p.78
“명문고등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어.”
“네…?”
해수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도윤이 다니는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그것도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니. 도윤이는 괜찮을까? 그 순간 이상하게도 태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30여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이용범. 해수는 망연한 눈길로 용범을 바라봤다. 그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용범이 얄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이 태은과 꼭 닮아 있었다.
--- p.89
김준우는 죗값을 치른 것뿐이야. 그러니까 당신들이 경찰이라면 누가 죽였는지만 보지 말고 왜 죽였는지 조사해봐.
무엇보다 범인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경찰이 자신의 메시지에 동조하길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사이코패스일까? 아니면 그저 복수의 화신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그의 말대로 김준우가 왜 죽어 마땅한 아이였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어쩌면 용범의 방송이 쓸모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 p.131
“와! 1등급이 세 개나 떴어.”
성적표를 확인한 도윤은 기적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다른 때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집중력이 훨씬 좋아졌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른 몰입감은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높은 성적을 안겨주었다. 비록 4등급도 하나 있었지만 1등급을 세 과목이나, 그것도 국어와 수학을 포함해 세 과목이나 받았다는 건 놀라운 성과였다. 도윤은 들뜬 마음으로 주머니 속 앰풀을 만지작거리며 서점으로 들어갔다. 성적을 더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문제집을 고르기 시작했다. 내리막길만 걷던 때에는 알 수 없었던 성취감이 그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 p.161
“친구들이 학원 다니면 나도 다니고, 친구들이 공부하면 나도 같이 하고, 성적을 걸고 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어.”
“도윤아.”
“난 엄마의 아바타가 아니야.”
“김도윤.”
“난 그냥 나이고 싶어. 엄마 아들 김도윤이 아니라.”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