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됩니다. 똑같지는 않아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나온 역사에서 우리가 교훈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가 부딪히는 문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선형적인 진보는 없습니다. 시대를 꿰뚫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라 보에시의 글이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찾아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비참한 노예가 되어, 머리 위에 굴레를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강한 힘으로 그들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오직 한 사람의 이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이므로 그들이 두려워해서는 안 될 사람이고, 그들 모두에게 무자비하고 잔인하여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를 서른 명의 폭군이 지배했던 것과 같이 전쟁에 의해 한 국가가 한 사람의 세력에 종속된다면, 국가가 복종하는 그 상황을 안타까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놀라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참으면서 더 나은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선하신 주님! 이것은 어떤 이상한 현상인가요? 이 비참함을 어떻게 부를까요? 이 끔찍한 악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순종할 뿐만 아니라 비굴해지고, 다스림이 아닌 횡포를 당해야 할까요? 이 비참한 이들은 재산도, 부모도, 자녀도,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그들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겪는 약탈과 방탕, 잔인함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군대나 야만족 무리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 헤라클레스도 삼손도 아닌 작고 나약한 단 한 사람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겁하다고 해야 할까요? 순종하는 이들을 미천하다고 하거나 겁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두 명, 세 명, 네 명이 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면, 그 상황은 놀랄 만한 일일지라도 그럭저럭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용기의 부족을 의심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 명, 천 명이 한 사람의 압제를 받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용기가 아니라 그에게 반항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태도는 겁쟁이가 아니라 굴종이나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자발적인 노예 상태의 첫 번째 원인은 습관입니다. 한때 굴레를 거부하며 안장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던 가장 용감한 말들도, 그 굴레를 가지고 놀다 언젠가는 스스로 멍에를 메고 갑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목을 빳빳이 세우며 나타납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것을 구하려는 순수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항상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는 그들의 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노예로 태어나고 그렇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이유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폭군 아래에서 사람들은 쉽게 비겁해지고 나약해집니다 자유를 잃으면 즉시 용기도 함께 사라집니다. 복종하는 사람들은 싸움에서 열정이나 싸울 의욕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기력하고 힘겹게 의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영예로운 죽음을 통해 승리를 얻고자 하는 자유의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모두를 위해, 각자를 위해 앞다투어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은 패배의 고통이나 승리의 이익을 동등하게 나눌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복종하는 사람들은 용기와 활력이 없으며 마음이 나약하여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폭군들은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마지막으로, 백 명도 아니고 천 명도 아닌 백 개의 국가, 천 개의 도시, 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노예처럼 하대하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게 비겁한 것일까요? 모든 악한 행위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 명이나 열 명이 한 명을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천 명, 백만 명, 천 개의 도시가 한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은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용기만으로 성채를 점령하거나 군대를 섬멸하고 왕국을 정복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거대한 악은 비겁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연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고 언어는 그것을 이름 지어줄 단어를 찾지 못합니다.
대체 어떤 악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태어난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그토록 변질시켜서, 본연의 모습을 잊게 하고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구마저 잃게 만드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일단 복종하기 시작하면 자유를 완전히 망각합니다. 자유를 되찾으려는 노력조차 하기 어려워지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그리고 기꺼이 얽매이고 맙니다. 이제 이들은 자유를 잃었다는 말 대신 오히려 노예 신분을 획득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강요와 권력에 무릎을 꿇었는지 모릅니다만, 그 뒤를 이은 후손들은 후회 없이 순종하고 선조들이 억지로 했던 일들을 흔쾌히 행합니다. 이것이 멍에 아래에서 태어나 노예로 길러진 사람들이 다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태어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라 보에시는 이 책에서 습관과 교육의 중요성, 그 영향을 이야기합니다. 폭군과 타협하고 복종을 대가로 권력과 돈을 움켜쥔 경우, 자신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식 속에 집어넣고 합리화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세대를 넘어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후손들은 부친이나 위 세대의 이러한 역사성과 의식을 받아들입니다. 이 책은 권력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라 보에시는 휼륭한 업적을 쌓아서 다수의 지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경우, 처음과는 달리 다수의 의지와 기대와는 다르게 폭군으로 변하는 자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국가가 계속 다수의 지지를 받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폭군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 집단의 네트워크는 권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이러한 권력 중심의 네트워크에서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폭군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군에 기대어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들은 무엇보다 권력자의 마음을 읽어내고자 노력합니다. 본인의 생각은 없어지고 폭군의 생각이 곧 본인의 생각이 됩니다. 이는 본인의 자유 의지의 상실, 즉 자발적 노예들입니다. 자유를 지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존재의 진정한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인간의 가장 높은 본성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 보에시는 자유는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이며, 인간 본성에 내재된 원초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삶은 비참하며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위한 열정을 되살리면서 현실 인식과 자각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근대를 알리는 르네상스가 천 년 전 그리스·로마 시대를 소환한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시대정신이 필요합니다. 그 시작은 이러한 현실을 만든 기성세대의 몫입니다.
오늘날 보이지 않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경제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정치적 노예 상태의 근간에는 경제적 욕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 억압 사슬은 세계화되어 있으며, 너무나 정교해져서 이를 찾아내서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제 자본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똑같지는 않아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나온 역사에서 우리가 교훈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가 부딪히는 문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선형적인 진보는 없습니다. 시대를 꿰뚫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라 보에시의 글이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찾아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