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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집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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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집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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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94g | 135*210*20mm
ISBN13 9791168150485
ISBN10 1168150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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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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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가지 위에 아슬아슬 바람집 한 채
저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주둥이 노란 생명들은 제 길을 떠났을까?

땅을 뚫고 올라오는
부끄러움과 설레임으로
시작합니다

배움을 즐거움으로 삼고자 하는 동기들의 바람이
바람집에 머물며

바람집사람들 대표 김미영
---「여는 글」중에서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끝자락에 선생님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지난 계절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였던 2020년에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직을 맡아 2년간 일을 하느라 해외에 사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올해, 자녀들을 만나러 간 일이 가장 큰 보람이었지요.

지난여름 석 달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지냈어요. 관광지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사람 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더블린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초록우체통과 노란색 2층 버스, 빨간 담쟁이와 푸른 하늘, 그리고 양털 같은 뭉게구름… 다섯 빛깔이 선명한 도시지요. 아침마다 앞마당에 새들이 찾아오니까 빵조각을 미리 던져놓습니다. 식솔을 거느린 열댓 마리가 즐거이 한 끼 식사를 하고 갑니다. 사람살이와 다를 게 없지요. 아, 그리고 감자 눈을 잘라서 다섯 군데 심어 놓고 떠나왔는데, 얼마 전 캐어 보니 제법 알이 굵었다고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날아왔습니다.

“나, 이제 가련다”를 속으로 읊조리며, 예이츠의 시로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섬도 건너보고요. 중세도시 ‘킬케니’도 다녀왔는데, 1300년대에 세워진 교회와 4~5백 년이 넘는 건물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하더군요, 느리고 오랜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현재 딸 가족이 사는 독일의 비스바덴은 첫 방문이었는데 마인츠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인근의 프랑크푸르트 시가지의 오래된 건물과 그 사이의 작은 카페 길을 걷고 걸었습니다. 시장, 학교, 가게도 들러보고요. 특히 라인강변의 민속품 ‘반짝세일’은 눈 호강과 함께 멋진 추억의 시간이었죠.

손자손녀와 눈빛 나누고, 함께 음식을 먹고… 피붙이와 부대끼며 사는 것이 으뜸의 행복이며 ‘살아있는 시’라는 것을 새삼 또 느꼈답니다. 항상 자녀 집을 방문하면 그 지역의 일상들을 작품으로 수렴하곤 했는데 그동안 발표했던 「워싱턴일기」 「볼티모어의 시간」 「더블린 안부」 「하와이 하와 유」 「텍사스 시편」처럼 연시조를 이어서 발표했듯이 이번에도 「비스바덴 일기」라는 큰 제목 아래 작은 제목을 붙여 세상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귀국 후 지난가을엔, 10년 가까이 제주를 다니면서 쓴 시조를 정리해서 『시와문화』에 특집을 엮었습니다. 저에게 제주는 남다릅니다.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는, 고故 백수 정완영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차례 제주 쪽과 서귀포행사에 다녀오곤 했지요.

이승은 선생님께서는 언제 등단하셨는지, 등단 시조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1979년 시월 개천절, 경복궁에서 개최한 민족시대회(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혀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과거시험 보듯이 근정전 품계석에 줄을 맞추고 앉아서, 집행부에서 나눠 준 종이에만 글을 써야 했지요. 시제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내려주셨습니다. 당시 대통령께서 시조 부흥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한가위」라는 제목이었는데 4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예선을 거쳐서 본선에 뽑힌 문청들이 모여들었는데 정부에서 지방 출신들에게는 차비와 도시락을 제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오승철 시인께서도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먼발치에서 상을 받는 하늘색 투피스의 저를 봤다는데… 22살의 아가씨 적 이야기네요. 요즘의 신춘문예나 문예지 투고처럼 오래오래 공을 들여서 보내는 작품이 아닌, 현장에서 정해준 시간 안에 써서 제출해야 하는 것이니, 제가 순발력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치러지는 백일장작품은 조금 덜 다듬어졌어도 날 것의 신선함과 순수함은 있지요.

70년대의 백일장이나 신춘의 작품들은 애국애족, 통일, 반공사상이 함축된 것이 주류였어요. 「한가위」 작품 역시 우리 민족의 은근함과 긍지, 내일의 꿈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지금은 원로이신 이상범 선생님께서 그때 사회를 보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요, 제 말을 들으면 후학 여러분들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라고 할 것 같습니다(웃음).

‘80년대 앤솔로지’시선집 2권을 내신 것으로 압니다. 저희들도 곁에 두고 공부하고 있는데 대선배님들의 문학 발자취를 듣고 싶습니다.

80년대는 시조 부흥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오류동인”과 “80년대 시조동인”이 결성되었지요. 오류는 10년을 끝으로 해산하였고, 80년대동인은 나중에 “열린시학동인”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의 발단은 이지엽 시인께서 열린시학의 전신인 ‘열린시조’를 창간하면서 박기섭, 이정환, 오승철, 정수자, 김연동, 오종문 시인 등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분기별로 편집회의를 했습니다. 지역을 돌아가면서 의기충전 했던 때입니다. 제가 대구에 내려가 살 때 열린시조 편집위원들이 내려왔는데 자연스러운 계기로 어울리게 되었지요. 등단이 79년, 가을이라서 사실상 활동 시기는 80년대였으니까요. 깍두기처럼(웃음) 저 역시 열린시조동인들과 시대의 역동기를 함께 건너왔습니다. 시조전문지를 창간하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는 분을 비롯하여 시조의 정체성을 이뤄낸 세대들입니다. 몇 해 전 젊은 날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몇몇 동인들이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자고 뜻을 모아 낸 시선집이 80년대 앤솔로지anthology입니다.

이제 보니 그 동인들이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직을 다 맡게 되었네요. 그중에 두 분은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으로 진출, 한국시조 발전의 기둥 역할을 해냈습니다. 각자 자신의 세계를 확고히 열어나가는, 색깔이 뚜렷한 동인들입니다. 저는 열외지만, 다들 열심히 후학을 길러내어 양적 질적으로 시조의 미래를 밝히신 분들입니다.

새롭게 동인지를 내게 되었습니다. 한국시조단에 ‘바람집 동인지’는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요?

‘동인지’라고 하니 70년대 〈네 사람의 얼굴〉, 80년대 〈오류〉 〈80년대 시조동인〉 〈오늘〉, 90년대 〈역류〉 〈반전〉, 2000년대 〈21세기동인〉 〈한결시조〉 〈정드리〉, 2010년대 〈객〉 동인 등이 떠오르네요.

사실 저는 동인 활동 없이 작품 활동을 해서 잘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 동인의 바람직한 방향은 ‘함께’가 중요한 거 같습니다. 마음 맞춰 가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동인이란 서로 힘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왜 동인활동을 하려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야지요. 서로 모여서 의견을 모아가는 게 필요하고, 또한 공통적인 이슈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각자 개성적인 시세계를 갖고 있어야 하지요.

스터디그룹의 차원으로 모임을 이끌어가다 보면 서로의 편차가 생길 수 있는데, 이해와 격려와 믿음으로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발상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재발견하고 글쓰기의 긴장감을 견지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요.

동인 활동을 하시는 분께 장점을 물었더니, 서로서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다는 거랍니다. 모두가 주자이지만 때로는 페이스메이커이기도 해서 서로의 자존감을 지켜준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력이 쌓이면 아름다운 해체도 바람직하지만, 평생 가는 동인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등단 이후 선집 2권을 비롯하여 11권의 시집을 내신 것으로 압니다. 가장 최근의 시조집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로 ‘문학나눔우수도서’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리며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아끼는 시편을 하나만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4년 『얼음동백』 이후, 6년 만에 우수도서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문학상 못지않게 뿌듯한 마음이지요. 이번 기회에 다시 시집을 펼쳐 듭니다. 그러나 편편이 애틋하면서도 부끄럽습니다. 지금 마음에 실금으로 지나가는 작품 「나비 따라」를 옮깁니다.

양옆의 나무들은 그림자 어룽지는데 그 사이 고사목은 그지없이 꼿꼿하다
무량한 여름 햇살만 빈자리를 채우다니

민들레꽃 빼어 닮은 저 환한 노랑나비 물기 마른 가지 둘레 나붓이 날아든다
왜 이리 낯이 익는지 눈시울이 싸한지

어쩌면 홀로이나 두 번 다시 혼자 아닌 음 유월 스무이튿날 이리 먼 길 찾아와서
날갯짓 하염없도록 그늘 다 거두실 줄

딸의 딸을 품에 안고 나비를 따라가니 딸의 딸에 딸이라고 알아나 보는 듯이
서너 번 빙그르 돌며 눈높이를 맞추며

딸이 하와이에 살고 있을 때 찾아가서 쓴 작품이네요. 외손녀 낳을 때였어요. 하필 그 기간 중에 어머니 기일이 있었답니다. 하와이의 꽃나무들은 키가 크고 꽃 빛이 화려해요. 뒤뜰 너머 플루메리아 나무 중 고사목이 하나 있었어요. 기일에 아기를 안고 나갔는데요. 양옆의 나무들은 꽃과 잎으로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그 나무는 당연히 그림자가 없었지요... 그때 나비 한 마리가 그 마른 가지 주위만 날고 있는 걸 봤습니다. 어머니가 우리 곁에 찾아오신 걸 느꼈지요. 지금도 그 나비의 날갯짓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다룬 유종인 시인의 해설을 소개합니다.

삶과 죽음의 넘나듦과 거기에 따른 시인의 감회는 새삼스러운 듯 환한 풍경 속에서 오롯이 자연물로 환생하는 듯이 변신이거나 화신으로서의 나비의 존재를 시적 현현顯現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늘진 행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노랑나비”를 통해서도 “눈시울이 싸한” 정감에 사로잡히는 화자의 속내엔 다름 아닌 “음 유월 스무이튿날”에 와서 유족들의 젯밥을 운감殞感하는 혼백으로서의 ‘나비’의 상징성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풍경으로서의 나비가 등장하는 자연의 실재와 생사고락을 소거하듯 짊어지고 떠난 망자의 상징이 하나로 갈마드는 환하고 밝지만 음예陰?한 속내가 너나들이하는 듯한 ‘나비’는 영속과 소멸의 겹침이 아닐까. 피치 못한 존재의 숙명 중의 하나인 죽음의 순차란 나비가 “서너 번 빙그르 돌” 살고 죽음은 기계적인 질서보단 갑작스러움과 엄연함이 뒤섞인 돌발과도 같은 것이리라. 일찍이 장주莊周께서 설파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여울에 생각의 발을 담가보면 나비가 사자死者/使者일 수도 있지만, 한고비 그윽이 넘어 ‘소요유逍遙遊’의 자유혼自由魂으로 능노는 여지도 가능하다. 비록 이 시편에서는 고사古事의 기척이 완연하지는 않지만 생사를 자유롭게 한 얼이 당도해 “날갯짓 하염없도록 그늘 다 거두실” 그날의 간원懇願만큼은 시편 전반에 여실하게 배어 있다.

삶을 조망하는 일이 죽음을 숙고하는 일일 수 있고 죽음을 건너다보는 것이 삶을 오롯이 늡늡한 선처善處로 다독이는 마음자리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시편은 그리로 가는 ‘나비’를 초대하고 또 좇듯이 따르고 있으니 생사가 각처各處가 아니라 도처到處의 넘나듦의 화해이자 대화의 눈빛 교환임을 가만히 알겠다.

‘바람집’회원들이 선생님의 많은 작품 중에서 좋은 시조 한 편을 뽑았는데 ‘보광동 종점’이 최종 낙점되었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제가 서울 용산구 보광동 출신입니다. 태어나서 만 27세까지 자란 곳인데, 공교롭게도 보광동 출신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 시댁마저도 보광동입니다(웃음). 결혼 후 한동안 분가해서 살다가 다시 돌아와 몇 년을 살았지요.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네요. 지금은 종점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81번 시내버스 종점이었지요. ‘종점시장’이 있었고 그 주변 노점에 1,000원 균일의 야채들이 즐비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종점 골목에 작은 우체국은 아직도 남아있더군요. 시집을 부치고 적금을 들던 곳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겐 고향이지요. 바느질이 싫어서 떡볶이를 팔던 아주머니가 그래도 ‘옷수선’이 먹고살기에 낫다고 다시 재봉틀을 돌리던 그 가게가 생생합니다. 재개발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한강을 조망권으로 가진 보광동이라 높은 꿈은 남아있는 곳입니다. 이제는 한강 다리를 건너 강남을 연결하는 버스들이 지나다니고 있지요. 보광동은 내 어린 날의 웃음소리와, 젊은 날의 열정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이 작품을 중앙일보에 오승철 시인께서 리뷰했던 적이 있습니다.

허름한 건물들이 허름한 종점 길목 드리 없는 간판들이 드리없이 걸려있다 각설탕 각진 설움을 풀어 내줄 찻집도 하나

플라스틱 바구니를 무더기로 널어놓고 천 원에 모신다는 난전을 돌아 나오면 저만치 발꿈치 끝에 깔리느니, 천 원의 그늘

떡볶이 판 거둔 자리 재봉틀 얹혔다는 수선집 여인네의 수선한 살림 걱정에 덩달아 맞장구치듯 선풍기도 끄덕대고

부동산 문지방보다 발길 뜸한 우편취급소 시집 몇 권 부치려고 건널목을 지나는데 '재개발 용산3구역' 후광으로 펄럭인다
- 이승은, 「보광동 종점」 전문

종점은 언제나 ‘설렘’과 ‘불안’과 ‘분주함’을 안고 있다. 막다른 곳에 이른 막다른 느낌, 그것은 막막한 정신의 바닥을 온전히 드러나게 한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 삶의 종착역에 밀려온 사람들이 모래톱처럼 쌓여 사는 자리.

시인의 시선이 머문 ‘보광동 종점’은 인생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 끝이자 시작인 동시에,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의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찻집-난전-수선집-우편취급소를 파노라마로 훑고 지나는 어안魚眼렌즈처럼 시인은 풍경의 안팎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시집을 부치러 가는 우편취급소 건너편에 후광으로 펄럭이는 재개발 안내 현수막은 종점이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준다.

표현 면에서도 시인이 농처럼 던지는 능란한 수사修辭가 시의 탄력을 더해준다. 첫수의 ‘건물들이’와 ‘드리 없는’의 발음의 유사성, 셋째 수의 ‘수선한 살림’과 ‘수선집’의 동음이의어를 바탕으로 한 언어유희와 각 수마다 동음어의 반복을 통한 리드미컬함이 그러하다.

‘보광동 종점’은 기실은 손금처럼 얽힌 일상을 살다가 우리가 이르게 되는 도처가 종점이라는 것을 환기한다.

이렇듯 삶의 풍경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며 시조의 징검다리를 놓는 시인. 삼십 년 넘는 시력에 걸맞게 시조의 빗장을 열고 지를 줄 아는 그를 이 시대의 시인의 자리에 앉힌다.

작품을 쓰다가 막히면 어떻게 하시는지요, 시조를 쓰는데 염두에 두고 있는 어떤 원칙이 있으신지요?

제가 백일장 출신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현장감이 있는 편입니다. 대체적으로 작품이 한순간 훅, 하고 들어오는 편인데 중간에 막히면 그냥, 생각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옵니다. 좀 더 젊은 날에는, 자유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소재의 채택과 사유의 전개 과정을 살피곤 했는데, 요즘은 문밖을 나서지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망원시장이 집 가까이에 있는데, 건너편 월드컵시장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많은 생각들이 가지를 치곤해요. 치열한 서민들의 살아 움직이는 몸짓과 목소리에서 오늘을 배우고 겸손한 힘을 얻습니다. 때론 한강 변을 걷기도 하는데, 조선시대 때 이곳은 ‘마포나루’로 새우젓과 소금 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답니다. 사시사철 아무 대가 없이 주는 풀과 꽃과 바람을 만나는 기쁨이 남다릅니다.

종종 전철이나 버스로 가까운 곳을 다녀오기도 하고요. 특별히 해외로 나가게 되면, 외국어에 좌절하면서 묵언의 쓸쓸함에 빠져드는데, 그럴 때 낯선 사물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여 받아 적습니다.

어쩌면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다가오는 천지만물이 하는 말을 거스르지 않고, 공손히 따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이미 누군가 짚어낸 아이디어나 혹은 이곳저곳에 많이 등장하여 더 이상 새로운 온기가 없는 언어를 경계합니다. 이 작품이 나만의 위안으로 끝나지 않고 독자와 더불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또한 원칙이 있다면 종장 첫 구에 ‘~의’라는 관형격, 소유격조사를 쓰지 않는 것입니다. 시조의 종장, 첫 음보 세 글자는 다음 음보에 이어짐 없이 독립하여 있을 때 시조의 격과 맛이 살아납니다. 스승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유동 이우종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이라 지금껏 받들고 있습니다.

저희들처럼 이제 시조를 시작하는 후배들이나 시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릇 문학이란 세상천지에 모든 것이 다 소재가 될 수 있지요. 시조 역시,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심히 지나친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서 읽는 이의 마음에 실핏줄을 잡아당기는, 공감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형식 또한, 우리의 말 자체가 어미에 조사를 붙이면 세 글자, 네 글자가 형성되므로 시조의 정형은 자연스러운 호흡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때, 시時에 가락, 조調를 쓰는 시조야말로 ‘지금, 여기’를 수용해야 하는 현대적인 장르입니다. 다만 산문처럼 늘어놓고 글자 수를 맞춰 끊어놓은 것은 결코 시조가 될 수 없습니다. 정형이 주는 아름다운 리듬감과 절제미를 품어내야 합니다.

시조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규격화된 정형에, 진술을 비유적으로 담아내는 문학 장르입니다. 현대시조를 쓰는 사람이라면 ‘정형을 입은 현대’를 추구하면서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시조’를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후학 여러분들은, 기존의 성과만을 고집하면서 배타적인 태도에 머물지 말고, 선배들께서 이룩해놓은 성과 위에 자유로운 발상과 변화를 모색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사물이나 사태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나만이 찾아낸 ‘발견의 재미’를 느낀다면 이미, 시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지요.

본인이 평소 구사했던 언어의 고정관념이나 문법을 건너뛰는 법을 익히세요. 예를 들어 구와 구, 장과 장의 의미 간격을 넓히거나, 종결어미를 구성할 때, 새로운 미래 가치관을 제시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폭넓게 시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면서 시조 발전의 측면에 힘이 된다면 어떤 도전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제게 있어 시조는 늙지 않는, 푸른 공간입니다. 시조와 더불어 살아왔기에 제 삶에 영근 마디도 있고, 지금 이 자리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지만 마음 귀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더 물소리를 새겨듣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에 귀를 열어두시고, 많은 선배님들의 말씀도 소중히 새겨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스물둘에 등단하여 이제는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시조를 생각하고 작품을 앉힐 때는 그 시절처럼 늘 이마에 푸른 기운이 돕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시조라는 청춘을 품고 있기에 생각의 풀밭을 걷는 초록 발자국이 가끔씩 나이를 지우기도 합니다.

의미 있는 모든 말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과 함께하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시인초대석_이승은」중에서

첫 동인지를 엮으면서
이승은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바람집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조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품을 모으면서
출발할 때
설레고 두렵던 마음도 함께 녹였습니다

동인지 창간으로
움츠러드는 바람집이 아니라
당당히 교류하는 바람집이 되고자 합니다.

풋내기들을 위해
귀한 시간 내셔서 대담해 주신 한림화 선생님
맛깔스러운 제주방언을 소개해 주신 김신자 선생님
울림의 언어로 시평을 해 주신 강영란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조를 향한 꿈을 꾸게 해주신
오승철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첫발을 내딛게 도움 주신 황금알 출판사도 고맙습니다

편집동인 일동
---「편집후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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