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역 3·1운동은 3월 9일부터 시작하여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그리고 전 면에서 전개되었다. 일제의 한 기록에 의하면 수원, 수안, 안성과 더불어 ‘가장 광포한 시위’ 지역 중의 하나였다. 평택지역 3·1운동의 역사적 위상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중략)… 둘째, 평택의 만세운동은 지역적 고립을 벗어나 수원지역 및 안성지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셋째, 일제의 평가처럼 전국적으로 유별나게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중략)… 넷째, 평택지역 3·1운동을 전개하는데, 천도교의 조직과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 p.42~43
진위청년회의 활동은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 사업이다. …(중략)… 둘째는 지역에서의 사회사업이다. …(중략)… 셋째는 대외사업이다. …(중략)… 넷째는 체육행사다. …(중략)… 다섯째는 교육사업이다. …(중략)… 진위청년회는 일제강점기 1920년대 평택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단체로서 활동하였다. 청년회 임원뿐만 아니라 회원 역시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일제 식민기관인 면사무소 면장을 포함하여 교원, 지역 상공인, 지역 언론인 등으로서 경제력도 상당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청년회를 통해 평택지역의 여론과 경제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전시체제가 전개되면서 일제식민 지배에 협력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 p.98~99
이택화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이해 4월경 일제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이날 이택화는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물을 길러갔다가 백봉주재소에서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 등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판결문을 통해 이택화의 활동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판결문에 의하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핑계로 가택을 침입하여 형법 제130조 및 제55조에 돈을 강취하여 형법 제236조 제1항 및 제55조에 그리고 강도죄로 형법 제54조 및 제10조에 적용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이로 인해 이택화는 1920년 4월 28일 수감되어 1924년 11월 27일 출옥하였다.
--- p.117~118
이병헌은 한말 경기도 진위(현 평택)에서 출생하였지만 수원을 기반으로 일생을 천도교인으로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중략)… 첫째, 이병헌의 활동무대는 수원이었다. …(중략)… 둘째, 동학 및 천도교인으로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병헌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동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청년기 이후에 는 천도교와 관련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손병희의 부름을 받은 이병헌은 독립선언서를 운반하고 3월 1일 당일에는 태화관과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그리고 만세시위 등으로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수원으로 피신해서도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제암리학살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남긴 기록은 ‘제암리학살사건’에서 희생된 인물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p.155~156
(평택의 인물로서의) “이석영은 일제의 강점 이후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하여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고, 한인 자치 단체인 경학사 조직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 설립과 유지에 자신의 재산을 쾌척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민족운동가와 신흥강습소 학생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서 이석영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93
원심창은 1906년 12월 1일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하였다.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원심창은 14세 때 고향에서 3·1운동을 경험하였고, 이 경험이 그를 민족운동의 열혈투사로 전환시켰다. 1920년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22년 말경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 학생의 신분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1925년경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에 가입한 이후 불령사, 흑색운동사, 흑색전선연맹, 흑우연맹과 노동단체인 동흥노동동맹, 그 외에도 무산자학생학우회와 동경조선무산자동맹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국에서 남화한인청년 연맹과 남화구락부, 흑색공포단 등에 가입하여 아나키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중략)… 특히 원심창이 참여하였던 톈진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암살미수사건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대표적인 활동의 하나였다. 또한 원심창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이라 할 수 있다.
--- p.224~252
평택에서는 지역학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14년 3월의 행정구역 개편은 당시는 진위군이었지만, 오늘날 평택이라는 공간적 틀을 형성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통합100년을 맞는 2014년을 전후해서 대두된 평택학은 이후 평택문화원의 ‘평택학 강좌’를 통해 지역학으로서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략)… 이를 통해 평택시민들은 지역 정체성(문화전통, 동질성 등)을 체감하면서 지역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발적으로 지속 발전 가능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결국 평택학은 첫째, 근대 1백 년을 지나고 있는 평택의 고유 이미지 구축, 둘째, 세계문화 일류도시로서의 위상 갖추기, 셋째, 평택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학적 고찰, 넷째, ‘평택’이라는 지역의 정체성 확립, 다섯째, 평택인과 함께 하는 인문학 조성, 여섯째, 평택인으로서의 삶의 가치관 부여, 그리고 미래 평택 발전을 위한 토대 마련 등의 과제를 감당해 가야 할 것이다.
--- p.276~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