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신이 멍했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저 멀리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의 자줏빛과 섞여 희미하게 보였다. 바로 흰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철탑, 도쿄타워였다. 새해 첫날의 태양 빛을 받은 도쿄타워는 마치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던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의 마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 pp.14~15
그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수없이 마주했던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경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향기를 떠올리며 코로 들이마시는 시늉을 했다. 이어서 떠오르는 태양 빛에 빠져들었다. 그다음 그는 주변을 찬찬히 지켜봤다. 흥건한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 흰색 기모노의 가장자리부터 적셔가는 모습, 기모노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을. 그때,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 p.15
총사령관으로 여러 전쟁터를 직접 누빈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얼마나 비정하고 부조리한 살육인지 깨달았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가 딸에게 독일어를 공부시키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상대 나라의 언어를 완벽하게 익혀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 p.32
“넌 어떻게 생각해? 학교에서 유대인에 대해 하는 이야기 말이야.”
“내 생각은… 그래, 학교에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학교에서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에밀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제가 에밀의 손을 잡자 에밀이 힘차게 악수를 하며 미소를 지었어요.
“우리, 앞으로 아주 잘 지낼 것 같은데.”
에밀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 p.99
“그래, 그래, 볼프강. 하지만 우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어.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아버지가 겐소쿠를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겐소쿠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추는 바람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전쟁 때는 그 선서를 지킬 수 없어.”
--- p.121
우리가 타락하는 것은 욕망이 너무 커서야.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집중하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하지만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어. 모든 인간은 삶을 마감할 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 어떤 용서도 구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구나. 나에게조차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어.’
--- p.151
“젠장! 몰랐잖아! 말을 함부로 해서 미안하다, 꼬마야! 이놈의 전쟁으로 우리 모두 이성을 잃었어! 우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지! 우리가 인간이 맞는지 짐승이 아닌지, 그것도 모르겠어. 어쩌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미안하다, 꼬마야!”
이렇게 말해주는 앙주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맞았습니다. 전쟁으로 방향과 이성을 잃기도 했지만 인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랬습니다.
--- p.212
제가 직접 가담한 부끄러운 만행은 아니었지만 왠지 죄책감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부모님도, 친할아버지도, 겐소쿠도, 죽음이라는 안락함 속으로 사라졌지만 저 혼자 살아서 대신 죄를 짊어진 채 벌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누구를 위해 복수 같은 것을 할 수 있을까요?
--- p.296
J.T는 사무라이들이 높이 평가하던 용기, 헌신, 남다른 애국심과 같은 미덕이 한국군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독립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한국은 애국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 p.328
겐소쿠는 자기 아들과 딸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조상이 지은 죄는 우리 자신이 지은 죄보다 감당하기 버거우니까요.
--- p.348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한국 문화에도 매료되었습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알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 출신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귀한 도자기들을 팔아야 했습니다. 일요 장터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도자기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닥에 깔린 천 조각 위에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도자기의 가격을 너무 싸게 깎는 흥정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p.456
앞으로 달라질 일이 없다면 직접 그 유령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제 운명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겐소쿠가 맞았습니다. 속죄는 불가능했습니다.
--- p.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