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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새가 되는 시간

시인동네 시인선-23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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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577
ISBN10 1158966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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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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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슬퍼질 때가 있다 배우자나 자식이 맘에 하나도 안 들고 직장에서도 친한 친구도 아무도 내 맘을 몰라줄 때 사는 게 시큰둥하고 꼼짝하기도 싫고

무진장 슬퍼질 때도 있다 청천벽력같이 돌연사한 친구나 더 견딜 줄 알았는데 홀연히 떠난 친구나 코로나라고 장례식장도 못 가고 보내버린 가족 때문에 분노까지 치밀고

무턱대고 슬플 때도 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속없이 푸른 하늘, 예전 그대로 화려하게 피는 꽃들 봐도 눈물 나고 드라마 속 불륜에 욕하다가도 약자가 되어 펑펑 울기도 하고 트로트 열풍에 따라 부르며 울기도 하고

슬픔의 각도기로 잴 수만 있다면 꼭 그만큼만 슬퍼할 수 있고 꼭 이만큼만 슬퍼하라고 위로할 수도 있을 텐데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의 각도
---「슬픔의 각도」 전문

막 살다가
막 이상이 왔다
족저근막염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려
막 죽을 듯한 고통을 맛보고서야
막막해서 생각해 보니
막이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막이라는 것이 있었다니
피부에서 내장 속까지 보이지 않는
막이 있을 줄이야!

누구는 위점막이
누구는 각막이
누구누구는 자궁막이 이상해졌다고 해도

막을 모르고 그저 흘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막을 치며 살았다
막을 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막인가 혼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살았을지 온몸 지탱하던 발바닥 족저근
막의 외로운 삶, 그 아픔 속에 너와 나 보이지 않는
막의 이상이 실은 더 무섭다 언제나 투명하게 너와 나를 감싸던 그
막이 어느 순간 망가졌는데도 무덤덤하게 지내다가
막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아픔이 오고 나서야
막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막의 연약함이 필요악이고
막을 치지 않고 살 수 없다면
막을 똑바로 보며 새로운 인생 막을 열어야지
막 더 이상 화나지 않게
---「막」 전문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한 모퉁이 돌아드는데
눈앞에서 갑자기 뭐가 번쩍 한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과속투성이다
아차 하는 순간
섣부른 행동으로 벌어진 사태들
주워 담을 수 없는 경솔함들

사랑도 그렇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다
한 모퉁이 돌아드는데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놈의 사랑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단속에 딱 걸린 것처럼
번쩍 번쩍
머리 가슴 온몸이 감전되고 만다
에고, 중상이다!

과속위반이야 카메라에 찍힌 그 속도만큼
벌금만 내면 깔끔한데
사랑은 찍힌 속도도 없고
벌금을 매길 수도 낼 수도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처리할까?

안절부절 밤이 길다
---「과속단속카메라」전문

겨우 한 자리 난 표를 구해서
급히 타고 보니
풍경들이 거꾸로 지나가네

방향은 서울인데
집도 나무도
희끗희끗 잔설들도
다가오지 않고 지나가네

시간도 덩달아 거슬러 올라
30대로 20대로 10대로
유년 시절 추억의 금호강도
모두 거꾸로 흘러가네

거꾸로 흘러야만 떠날 수 있는 곳,
고향이네
---「거꾸로 가는 기차」 전문

훠이이 봄바람에 꽃비 내리면
벚꽃은 낱낱이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윽한 향기도
낭창낭창 흐르던 다섯 꽃잎의
우아한 자태는 사라져도
새로운 몸이 생긴다

더 이상 떨어질 걱정도 없이
그리운 나무 밑에서
기다란 띠 모양 꽃무덤이 생긴다

꽃무덤은 바람 따라 춤을 추며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고
바람 따라 훨훨 날아간다

꽃이 진다고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새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비행을 한다
---「꽃이 새가 되는 시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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